긴 겨울의 컴퓨터
[IT 강국의 품격] 핀란드편
크리스마스 시즌이지만, 요즈음은 어째 캐롤도 산타클로스도 잠잠하다. 세상살이가 팍팍해진 탓인지, 모두 먹고사는 데 지쳐 지나치게 쿨해진 탓인지 그런 목가적 판타지는 올해도 자리를 못 찾고 있다.
산타클로스의 나라 핀란드. 우리에게는 자일리톨이나 ‘핀란드 교육’처럼 열풍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유행어에서나 만나게 되는 머나먼 나라다. 아, 사우나의 원조국이자, 그 단어가 생겨난 고장이기도 하다. 사우나에는 남녀 친구가 함께 전라로 벗고 들어가서 자작나무로 서로를 두들겨 주다가 함께 얼음물에 뛰어들어가야 제맛. 남녀칠세부동석의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개방되고 자유로운 문화 덕인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20년이나 앞서 제일 처음 여성 참정권을 확보한 나라도 핀란드였으며, 최초의 여성 의원도 핀란드에서 나왔다.
우리 현실이 답답할수록 북유럽 어디쯤을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자 이상향으로 떠받드는 경향이 가끔은 있는데, 핀란드는 그 단골 소재로 딱이었다. 오랜 세월 전세계로부터 사랑받아온 캐릭터 ‘무민’의 고향이기도 하고, 최근에는 전국민에게 기본소득(Basic Income)제를 시도한다는 둥 즐거운 놀라움이 있는 고장인 덕이다.
그런데 사실 핀란드는 IT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핀란드는 무언가에 흠뻑 빠진 개인이 어떤 힘을 보여주는지 증명해 왔다. 리눅스가 태어난 것은 핀란드의 긴 겨울 덕이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 시절 핀란드의 겨울에는 마법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적으로는 8비트에서 16비트로의 이행기, 한국의 세운상가에도 골목마다 컴퓨터의 성능을 뽐내는 화려한 데모 프로그램들이 틀어져 있었다. 지금은 육안으로 CG와 실사를 구분해 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컴퓨터란 느릿느릿한 도트가 눈에 보이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그 컴퓨터 안에서 초현실이든 극사실이든 새로운 세계를 재현해 내는 것은 세계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내는 것 못지않은 최전선이었다. 이 여명기 유럽인들은 데모신(DemoScene)이라는 일종의 서브컬처 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핀란드는 그 산실이었다. ‘어셈블리(assembly.org)’라는 연례행사가 벌어지는 것도 헬싱키의 백야 아래였고(원래 여름 행사였다), 퓨쳐크루라는 추억 속의 그 그룹도 핀란드팀이었다. 이 데모신의 문화는 곳곳으로 퍼져 나갔는데, 앵그리버드를 만든 주인공도 90년대부터 활동하던 데모신 죽돌이였다. 로비오에 수퍼셀에 핀란드의 잠재력은 그 유서가 깊다.
핀란드를 누가 만약 IT 강국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하고 싶은 것을 했더니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화덕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핀란드의 일개 기업 노키아의 몰락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하며, 한국의 재벌그룹이 몰락하면 큰일 날 듯 호들갑을 떨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문화이며 긴 겨울이 오면 또 긴 겨울을 지내는 방법이 있음을 핀란드는 가르쳐 준다. 겨울은 많은 것을 덮지만 결국 또 봄은 찾아온다.
긴 밤 추운 겨울, 밤을 순항하듯 철야로 컴퓨터를 하기에 좋은 계절이 오고 있다. 핀란드식으로.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