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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가대표 ‘쓰리박’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남달랐습니다”

국내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대중들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스포츠 스타들이 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실력은 해외 감독들의 마음마저 사로잡죠. 그래서 국내의 뛰어난 선수들은 저 멀리 해외에서까지 활동하며 한국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한때 국내외 안팎으로 스포츠 이상의 감동을 안겼던 국민 영웅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그들의 근황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공동묘지에서 담력훈련

한인 최초 메이저리그 100승


메이저리거 박찬호가 처음부터 야구를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육상부였는데요. 먹을 게 귀했을 당시 ‘운동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야구부’가 부럽다는 이유로 야구부로 방향을 틀게 되죠.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야구로 진학하고 뛰어난 운동신경 덕분에 한·미·일 청소년 야구 대회까지 참가합니다. 사실 투수가 되기 전 박찬호는 타자로 야구를 시작했는데요. “야구 선수로 성공해서 배불리 먹고살겠다”라는 목표가 있었으나 타석에 들어가면 공에 대한 공포가 생겼습니다. 그 공포를 이기고자 홀로 공동묘지에 가서 담력훈련 겸 스윙 훈련을 했죠.


투수로서 박찬호는 임선동 선수와 조성민 선수에 비해선 주목받지 못했는데요. 컨디션을 위해 팀이 혹독한 훈련을 하지 않아도 감독에게 ‘개인 훈련을 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열심히 훈련했죠. 그 모습을 감명 깊게 본 감독은 박찬호를 1선발로 뽑습니다. “‘야구=박찬호’라는 말을 듣고 싶다”라는 꿈을 가졌던 소년은 ‘임선동 선수에게 뒤질 것이 없다.’, ‘물밑에 숨어 있는 ‘대어’라는 평가를 받으며 점점 주목받게 됩니다.


박찬호는 한·미·일 청소년 야구 대회 1차전에서 승리 투수를 거머쥐고 유니버시아드 야구 대회에서도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 후 인생 대격변을 겪었죠. ’30만 달러를 줄 테니 군대에 다녀와서 팀에 합류해라’라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스카우트 전화를 받는데요. ‘이게 무슨 일이지?’ 가족들과 의논하고 있을 때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전화도 받습니다. 한국에서 메이저리그를 간 전례가 없었기에 박찬호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LA 다저스의 스카우트 전화를 받게 됩니다. 당시 가깝게 지냈던 한인 교포 ‘스티브 김’이 LA 다저스와의 통역 겸 연봉협상을 도와주는데요. 60만 불의 몸값을 120만 달러로 성사시키고 박찬호의 첫 에이전트가 되어주죠.


박찬호는 화려한 메이저리그 입단식을 마쳤습니다. 역대 두 번째 아시아인 메이저리거가 됐죠. 불같은 강속구와 낙차 큰 커브로 ‘코리안 특급’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다저스의 1선발 에이스까지 올라가죠.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100승을 달성하고 아시아인 최다승을 기록했습니다. 뛰어난 실력, 어려움을 딛고 성공을 거둔 모습은 1997 외환위기로 어려웠던 국민들에게 야구 이상의 위안과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은퇴 후에도 예능 진짜 사나이 출연, 차인표와 토크쇼 공동 MC, 대학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갑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대화를 조금 길게 이어나간다는 매력 아닌 매력으로 ‘TMT(투 머치 토커)’라는 유쾌한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6살 유괴 아픔 겪고

전설적인 프로 골퍼로 성장


박세리는 6살 때 유괴를 당한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당시 친구와 슈퍼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는데요. 유괴범이 “나랑 다른데 가면 맛있는 게 더 많이 있다. 같이 가자”라며 접근합니다. 박세리는 거절했으나 친구가 가보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따라가게 되죠. 따라간 곳은 생전 처음 가보는 동네였습니다. 미닫이문을 열고 컴컴한 방으로 들어갔죠.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사람이 “이렇게 어린애들을 어디다 써! 돌려보내!”라고 소리 지른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밖으로 나왔고 사람들에게 집에 전화를 해달라는 도움을 요청하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갑니다.


박세리 역시 육상으로 스포츠에 입문했습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6학년 때 싱글 핸디캐퍼였던 골프광 아버지에게 이끌려 골프를 시작하죠. 어린 나이에 쉬는 날 없이 늘 새벽 2시까지 엄격하게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빚 때문에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골프 선수로 성공해야지’라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박세리는 중3이라는 나이에 KLPGA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프로 선수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것은 그야말로 이슈였죠. 고3 때는 아마추어 신분으로 시즌 4승을 거뒀습니다. ‘무서운 10대’, ‘프로 잡는 아마추어’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버렸죠. 이후 골프 팬들의 주목을 받으며 정식 프로로 전향합니다. 국내에서 연이어 높은 성적을 거둔 박세리는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향합니다.


마침내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1998년 US Women’s Open에서 우승을 거두게 됩니다. 당시 대회에서 양말을 벗고 연못에 들어간 공을 스윙해내는 레전드 장면을 남기죠. 어두웠던 IMF 시절 악전고투하며 우승하는 모습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어둠 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라는 위로가 됐습니다. 그리하여 박세리는 박찬호와 함께 국민적인 영웅으로 남게 됩니다.


연이어 USGA 여자 오픈 우승, 브리티시 여자 오픈 우승, LPGA 챔피언십 우승으로 최연소 메이저 4승을 기록합니다. 최종 목표였던 LGPA, KLPGA 명예의 전당에 입회하죠. 어깨 부상의 여파로 2105년부터 거의 플레이하지 못했고 선수 생활을 끝마쳤습니다. 그러나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여자 골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은퇴 후 더욱 빛나는 활약을 보여줬습니다. 지금은 CEO를 꿈꾸죠. 와인, 골프 의류, 골프 코스 디자인 사업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해외축구 중계의 아버지

산소탱크 ‘해버지’


박지성은 어릴 때부터 공을 끼고 살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왜소한 체구임에도 공을 차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기에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부에 바로 지원합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축구부는 사라지게 되죠. 박지성은 굴하지 않고 추운 겨울에도 홀로 운동장에서 연습했습니다. 코치 선생님은 이런 박지성을 축구부가 남아있는 세류 초등학교로 전학시켜줬고 그렇게 박지성은 다시 축구 인생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박지성이 축구 선수로 진로를 정하자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했습니다. 학창 시절의 박지성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기 때문이죠. 키는 173cm로 선수치고는 작았고 체구도 또래들보다 몹시 작았습니다. 하지만 박지성의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박지성의 선택을 지지했고 결국 아버지도 항복하고 맙니다. 부부는 박지성을 성장시키기 위해 개구리를 포함한 희귀 음식으로 몸보신을 시키고 고기를 맨날 먹였습니다.


체구가 왜소한 만큼 박지성은 더욱 훈련에 매진합니다. ‘성실둥이’, ‘부지런둥이’, ‘축구 귀신’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죠. 하지만 노력에 비해 국내 대학팀 어느 한 곳도 박지성을 원하지 않았고 명지대 축구팀에 가까스로 입단합니다. 박지성은 더욱 이를 악물고 ‘설움을 일거에 날려버리겠다’라는 각오로 명지대 축구부 vs 올림픽 대표팀 평가전에서 맹활약을 펼칩니다. 그렇게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고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죠. 이후 박지성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합니다. 한국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었던 히딩크까지 매료시키죠.


박지성은 무릎 부상으로 한동안 최악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아인트호벤 선수가 되어 유럽까지 진출했으나 벤치 신세만 져서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모두가 이전에 뛰었던 교토 퍼플상가 일본팀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으나 박지성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부상을 이겨내고 내 실력을 보여줄 때까지 아인트호벤에 남겠다”라고 의지를 보였죠. 그리고 마침내 박지성은 2005년 유럽 챔피언스리그에서 아인트호벤을 4강으로 이끕니다. 이때의 눈부신 활약이 맨유 퍼거슨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어 맨유 입단과 선수 생활까지 성공적으로 해내죠.


박지성이 맨유에 입단하면서 한국엔 해외 축구 중계가 흥하게 됩니다. 그래서 박지성은 ‘해외 축구 중계의 아버지=해버지’라는 별명을 얻게 되죠. 남다른 활동량과 체력 덕에 ‘두 개의 심장’, ‘산소탱크’, ‘세 개의 폐’라는 수식어도 붙었습니다. 비록 무릎 상태가 악화되어 은퇴를 선언했지만 축구 해설가, 축구행정가 활동을 이어가며 축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습니다. K리그 최강팀 전북 현대의 행정가로 도전한다는 깜짝 근황으로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죠.


설마설마하다가

진짜로 이뤄진 쓰리박 조합


박찬호+박지성+박세리 ‘쓰리박’이 모였습니다. 쓰리박은 방송을 통해 인간 박찬호, 인간 박지성, 인간 박세리의 삶을 공개했습니다. 셋은 운동선수가 아닌 인생 2막을 열기 위해 발을 내디딘 것이죠. 박찬호는 은퇴 후 겪었던 우울증을 밝혔습니다. 인정받던 선수의 삶에서 무관심의 대상이 된 것을 견딜 수 없었죠. 그런데 골프를 하게 되면서 다시 두근거리는 삶을 살게 되는데요. 이제 박찬호는 골프 프로 테스트에 도전할 예정입니다.


박세리는 맛있는 것을 먹는 과정과 건강한 식재료에 대한 욕심을 갖게 됩니다. 넓은 농장에서 돼지들의 사료 준비와 돈사 청소까지 몸소 체험하죠. 농장 주인들과 인터뷰까지 진행하며 청정 식재료를 향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제주도 집에서 두 남매를 열심히 키우고 있는 박지성은 사이클에 푹 빠졌습니다. ‘먼 곳까지 갈 수 있고 내가 무언가를 조종한다는 느낌이 좋다’라고 사이클에 푹 빠진 근황을 공개했죠. 이렇게 쓰리박은 서로의 전성기를 회상하며 국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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