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보려면 꼭 무대 앞으로 가야할까?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소?” 명성황후는 아련한 목소리로 호위무사에게 물었다. 호위무사는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머뭇거리는 그의 뒷모습은 무언가를 감추는 듯 하다. 이마 위로 바싹 묶어 맨 머리띠의 장미 문양은 명성황후를 향한 사랑과 헌신을 묘사하듯 강렬하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니다. 창작 20주년을 맞은 뮤지컬 명성황후의 한 대목이다. 그런데, VIP석에 앉아서 공연을 본다 한들 배우의 눈동자와 떨리는 뒷모습까지 느낄 수 있을까? 배우의 의상까지 자세히 살펴보는 건 더욱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SAC on Screen을 통해서라면 모두 가능하다. SAC on Screen은 무대를 쫓는 10대 이상의 초고화질 영상으로 다각도의 뮤지컬을 담은 영상화 작업이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영상미가 더해진 편집은 육안으로는 놓칠 수도 있는 섬세한 각도를 잡아낸다. 정면 또는 측면을 바라봐야만 하는 관객의 시야가 360도로 넓어지는 색다른 경험인 것이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한 장면 |
예술의 전당은 2013년을 시작으로 3년째 공연 영상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는 뮤지컬, 오페라 등으로 자체 레퍼토리를 늘렸다. 현장감이 생명인 시간예술을 영상으로 옮기려는 노력은 무엇 때문일까.
경험의 확대가 아닌 확장
많은 관객들이 공연의 현장감을 느끼고자 무대 앞으로 발품을 파는 수고를 감수한다. 그런 측면에서 SAC on Screen은 현장감 없는 공연의 ‘재생’에 그칠 수 있다. 하지만 경험의 확대가 아닌 확장에 방점을 찍는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땅 끝 마을 아이들도 즐기는 공연예술”은 SAC on Screen이 전면으로 내세우는 목표이다. 스크린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 공연의 요소를 100% 느끼지 못하더라도 ‘경험적’ 요소에 가중치를 더 크게 두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장르에 대한 경험은 공연 예술에 대한 인식의 틀 자체를 확장시킬 수 있다. SAC on Screen의 오페라 ‘마술 피리’를 보면 배경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모차르트의 아리아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좋은 음악은 귀가 본능적으로 알아 듣기 때문이다. 영상을 통해서나마 오페라의 맛을 보았다면 잠재적 관객 혹은 오페라 전문가로 거듭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관련 링크)
공연의 맛을 더하는 에필로그
백건우 피아니스트는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세계적으로도 찬사 받는 거장이다. 두터워 보이는 손가락 끝에서 나오는 연주는 놀랍게도 쉼표 하나까지 섬세하다. SAC on Screen에서 준비한 ‘백건우 리사이틀’은 그러한 연주에 인터뷰, 리허설 등을 통해 백건우의 아우라까지 더했다.
영상 속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인터뷰 장면 |
“음악은 배움에 끝이 없어요” 작년에 일흔을 넘기고 피아노 앞에 앉은 지 60여년이 흐른 피아니스트가 담담히 말한다. 자만에 빠질 법도 한데 그가 얼마나 음악에 신중하고 여전히 고민하는지 알 수 있는 답변이다. 인터뷰 영상 뒤에 이어지는 연주는 그래서인지 더욱 진심이 느껴지는 듯 하다. 이는 SAC on Screen으로 느낄 수 있는 공연의 또 다른 즐거움이자 공연영상화의 큰 매력이다.
또 한번의 첫 공연
SAC on Screen의 뮤지컬 ‘명성황후’가 끝나고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 관객들도 자리로 돌아왔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무대 앞이 아닌 스크린을 무대 삼아 있던 극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무대 밖의 무대를 한 번 더 나오자 몇몇 기자들과 주인공을 맡았던 뮤지컬 배우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작년 10월 서울에서의 커튼콜을 마친 공연이지만 한편으로 스크린을 통한 ‘첫 공연’을 마친 분위기였다. SAC on Screen의 명성황후는 나아가 다른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또 한번의 ‘첫 공연’이 되기도 할 것이다. 수 백번의 첫 공연이 스크린을 메운다면 기약 없는 커튼콜은 공연계의 기분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글 계란비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