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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마지막까지 좀비였다'...영원한 레전드로 기억될 정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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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성이 UFC 은퇴를 선언한 뒤 오픈핑거 글러브를 벗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UFC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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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할로웨이와 경기에서 KO패 당한 정찬성이 경기 후 아내 박선영씨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있다. 사진=U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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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찬성 SNS 캡처

코리안좀비는 마지막 순간까지 좀비였다. 자기가 쓰러지고 깨질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들어갔다. 결과는 KO패, 그리고 은퇴 선언. 2007년 6월 경북 경주에서 MMA 데뷔한 뒤 17년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비록 마지막 경기는 패배였지만 그의 선수 인생은 화려한 승리였다.


‘코리안좀비’ 정찬성은 지난 26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종합격투기 대회 ‘UFC 파이트나이트 싱가포르 : 할로웨이 vs 더 코리안좀비’ 메인이벤트 페더급(65.5kg 이하) 매치에서 전 챔피언이자 현 랭킹 1위 할로웨이에게 3라운드 23초 만에 펀치에 의한 KO패를 당했다.


정찬성은 지난해 4월 현재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호주)를 상대로 타이틀전에 나섰지만 TKO패 한 뒤 1년 4개월 만에 UFC에 복귀했다. 1라운드부터 선제공격을 펼치면서 승리에 대한 강한 의욕을 내비쳤다. 하지만 할로웨이는 스피드와 반사신경에서 정찬성보다 한 수 위였다. 같이 펀치를 뻗으면 할로웨이의 주먹이 먼저 정찬성에게 닿았다.


2라운드에서 큰 펀치를 허용해 다운을 당한 뒤 서브미션 패배 직전까지 몰렸던 정찬성은 3라운드에서 승부수를 던졌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초반부터 이판사판으로 몰아붙였다. 하지만 할로웨이는 노련했다. 큰 펀치를 살짝 피한 뒤 카운터펀치로 연결해 정찬성을 실신시켰다. 정찬성은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지는 순간까지도 상대를 노려보며 주먹을 휘둘렀다. 마지막까지 좀비처럼 싸웠다.


경기 후 정찬성은 “할로웨이를 진심으로 이길 줄 알았다”며 “3등, 4등, 5등을 하려고 격투기를 하는 게 아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 격투기를 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이어 “톱랭커를 이길 수 없다면 냉정하게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인터뷰를 마친 뒤에는 오픈핑거 글러브를 벗으면서 선수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지인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그의 눈에는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그의 아내 박선영씨는 옆에서 오열을 하고 있었다. 팬들은 함께 ‘좀비’를 외치면서 정찬성의 마지막을 아낌없이 응원했다.


참으로 정찬성 다운 마무리였다. 정찬성이 전세계 격투팬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경기는 2010년 4월 WEC 48 대회에서 열린 레오나르도 가르시아(미국)와 경기였다. 당시 두 선수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엄청난 난타전 명승부를 펼쳐 화제가 됐다. 계속 펀치를 얻어맞고도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에 현지 언론은 ‘코리안 좀비’라고 불렀고 이후 정찬성의 또다른 이름이 됐다.


당시 정찬성은 그 경기에서 1-2 판정패를 당했다. 경기에서 지고도 정찬성은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이후 정찬성은 약 1년 뒤 UFC에서 가르시아와 다시 맞붙어 ‘트위스터’라는 신박한 기술로 서브미션 승리를 따냈다. 코리안좀비 신화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팬들이 정찬성에게 더 열광하는 이유는 그가 승리만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2018년 11월 야이르 로드리게스(멕시코)전에서 그는 점수 상 이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피니시 승리를 노리며 거칠게 몰아붙였다. 그러다 경기 종료 1초 전 기습적인 백스핀블로를 맞고 뼈아픈 KO패를 당했다. 그게 정찬성이 싸우는 법이었다. 할로웨이와 마지막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정찬성은 경기 후 공식 인터뷰에 참석하지 않았다. 머리 충격과 눈 부상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으로 곧장 향했다.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정찬성은 자신의 SNS를 통해 더 자세하게 은퇴 심경을 털어놓았다.


정찬성은 “모든 걸 이루진 못했지만 충분히 이룰 만큼 이뤘다. 제 머리 상태에서 더 바라는건 욕심 같아 멈추려고 한다”며 “내가 해온 것에 비해 과분한 사랑을 받은것 같아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했다. 더불어 “이제 더 이상 평가받고 비교당하는 삶을 살지 않을것 같아 홀가분하고 후련하고 또 무섭기도 하다”며 “뭘 할지 모르겠지만 뭘 해도 최선을 다하고 뭘해도 진심으로 해보려한다”고 덧붙였다.


전세계 UFC 선수들은 정찬성의 은퇴 소식에 아쉬움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경의를 표했다. 정찬성과 마지막 순간까지 주먹을 섞었던 할로웨이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코리안좀비는 레전드다. 그에 대한 감정은 오로지 존경 뿐이다”고 강조하며 “좀비의 마지막 상대가 돼 영광이다”고 말했다.


UFC 최고 스타인 코너 맥그리거(아일랜드)는 “정말 멋진 경기였고, 멋진 퍼포먼스였어, 코리안 좀비는 클래식이다”고 글을 올렸다. 전 라이트급 챔피언 찰스 올리베이라(브라질)도 “진정한 레전드. 코리안 좀비, 은퇴를 즐기길...”이라고 적었다.


정찬성과 대결을 펼친 바 있는 페더급 파이터 로드리게스는 “진정한 레전드에게 존경을 전한다. 행복한 은퇴가 되길 바란다. 당신과 싸울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전 UFC 플라이급 챔피언 드미트리어스 존슨도 “코리안좀비의 멋진 커리어에 축하를 보낸다”고 글을 올렸고, 페더급 파이터 아놀드 앨런 역시 “코리안좀비의 전설적인 커리어는 커다란 영감을 준다”고 인정했다.


할로웨이에게 정찬성과 경기에 대해 질문했던 알렉스 베후닌 격투기 전문 기자는 “정찬성의 커리어에서 가장 슬픈 부분은 그가 군 문제로 전성기의 대부분을 도둑 맞았다는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한국 교민들과 싱가포르 현지 팬들도 정찬성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경기장 분위기만 보면 마치 정찬성이 승리한 것 같았다. 그의 등장음악인 크랜베리스의 ‘좀비’가 흘러나왔고 팬들은 하나가 돼 그 음악을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다. 마지막 순간 정찬성은 가장 행복한 파이터였다.


[싱가포르=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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