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공허함만 남았다
현장에서-한국지엠 부평공장
한국지엠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섰다. 노동조합의 부분 파업이 시작되며 회사 전체가 흔들리는 가운데, 사측이 지난 6일 노조의 부분 파업으로 유동성이 악화됐다며 2100억원대 규모의 부평공장 투자 계획을 전격 보류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조는 흔들리지 않고 9일 지금도 여전히 파업중이다. 이것이 기자를 뭔가에 홀린듯 한국지엠 부평공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장을 찾아 얻을 것도,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것도 없었다. 헛걸음만 했다는 비판에도 어쩔 도리가 없다. 모두가 말을 아끼고 모두가 답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자가 현장을 찾아서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다만 코로나19가 창궐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아 오랫동안 지역사회의 '가족'으로 살아오던 이들이 지금 어떻게 싸우고 있으며, 또 어떻게 씁쓸함을 곱씹고 있는지는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이것이 기자가 반복과 투쟁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는 쓸쓸한 한국지엠 부평공장으로 찾아간 이유다.
9일 오전 8시께 촬영한 한국지엠 부평공장 서문 전경. 부평2공장의 폐쇄를 우려한 노조가 사측에 향후 공장 가동계획을 마련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
쓸쓸함, 그리고 굳은 얼굴의 출근길
9일 오전 6시 55분, 입동(立冬)을 맞은 지 이틀 지나 쌀쌀했지만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대로에 위치한 한국지엠 부평공장 동문은 드나드는 차와 사람으로 북적였다. 부평공장 전반조 근무자들로 보였다. 부평공장 전반조 근무자는 평일의 경우 오전 7시와 오전 8시에 출근하고 있다.
노조의 파업으로 현장에는 냉랭한 초겨울의 한기만 맴돌것으로 예상했지만, 현장에는 그래도 한 줌의 온기는 있었다.
부평공장 서편에 위치한 직영 안전서비스센터 출입문 전경. 내부에 창원 부품물류센터 및 제주 부품사업소를 모두 폐쇄하려는 사측 결정을 반대하는 등 내용의 조합원 피켓이 걸려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
부평공장 직원들은 걷거나 자전거, 자동차, 셔틀버스 등을 타고 사업장 안에 들어섰다. 이들은 동서남북으로 뚫려 있는 출입문으로 입장하기 전까지 직원인지 행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아니 행인들과 크게 구분할 수 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간혹 한국지엠의 자동차 브랜드 쉐보레를 상징하는 보타이 엠블럼이 부착된 근무복을 입고 출근하는 직원들도 보였다. 부평공장이 지난 1962년 한국지엠 모태기업 '새나라자동차'의 조립공장으로 설립돼 올해 59년째 가동되며, 이제는 인천의 일부로 자연스레 자리 잡은 역사가 아로새겨진다.
오전 8시 이후 서문 전경. 출근시각이 지나 잠잠해졌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
한 줌의 온기는 맴돌았지만, 역시 부평공장에 들어서는 임직원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이날 단행될 노조 부분파업 때문인지, 쌀쌀한 월요일 아침이어서인지 모른다. 현장에 파고든 온기가 안개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공기를 타고 흐른다.
한국지엠 노조인 전국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는 이날 전반조, 후반조 각각 4시간씩 총 8시간 부분파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측과 지난달 말까지 올해 임금 및 단체 협상에 대한 교섭을 스무차례 넘게 가졌지만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조는 임단협을 2년 주기로 실시하자는 사측 제안을 수용하길 거부하는 등 서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노조는 사측에 대한 요구사항을 관철하고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번 부분파업을 단행했다. 지난달 31일과 이달 2일, 6일에 이어 나흘째 진행됐다.
부평공장 동문 옆에 위치한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
"심각하지는 않다"는 말
오전 7시 40분께 부평공장 서문으로 출근하는 임직원 서너명에게 현 상황에 대한 심정이나 분위기를 물었다. 잰걸음으로 달려가 간격을 두고는 천천히 접근했으나 다들 대답하기 꺼려했다. 안 그래도 힘든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느닷없이 기자의 질문을 받아 난감하기도 했겠지만, 민감한 사안에 관한 생각을 선뜻 꺼내기 어려워하는 눈치다.
한 여성 직원은 기자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 없이 고민하는 듯하더니 "늦어서요. 죄송합니다"라며 황급히 횡단보도를 건너 도망치듯 서문으로 들어갔다.
그러기를 수 차례, 대부분의 직원들이 손사래를 치며 사라진 가운데 간신히 잡은 한 남성 직원 A씨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현재 공장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량배정 난항, 노사 갈등 같은 사안에 관한 내부 분위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서도 "우리 부서에서는 현 상황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는 분위기다"라고 설명했다.
그 역시 기자를 아래 위로 훑어보고는 서둘러, 누가 볼세라 공장으로 들어갔다.
부평공장 남측에 위치한 직영 서비스센터 출구.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
시각의 차이, 아니 간극
오전 8시가 조금 넘어가니 서문이나 남쪽 서비스센터 출입문 등 직원들의 출근 경로가 금새 잠잠해졌다. 전반조 근무자들이 부분파업을 시작하는 시간인 11시 40분이 되기 전 주변 민심을 듣기 위해, 서문 맞은편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들어섰다.
길가에서 만난 한 버스회사 직원 B씨는 최근 부분파업을 벌이고 있는 한국지엠 노조의 행보를 비판했다. 돈 많이 벌고 있으면서 사측에 과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봤다. 노조를 향해 '도둑'이라는 표현도 서슴없이 썼다. 한국지엠 노조가 상위 조직인 민노총의 운영방침에 휘둘려 그런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B씨는 "한국지엠 노조는 보수를 많이 받으면서도 과하게 파업하고 시위하고 있는데 바람직하지 않다"며 "한국지엠 노조의 행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민노총 휘하에 있는 한 이런 행태가 개선되진 않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혀를 끌끌 차는 그의 눈빛에 묘한 이질감이 번진다.
서문 기둥에 쉐보레(CHEVROLET)의 일부 철자와 엠블럼 내부 노랑 부위가 떨어져 나가 있는 모습.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
공장 근처에서 마주친 C씨는 한국지엠에서 35년간 근무하다 퇴직해 식당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퇴직한 후에도 같은 지붕 아래에서 일하던 한국지엠 임직원들과 가까운 곳에서 매일 마주치고 있었다. C씨는 지난 2002년 한국지엠이 출범하기 앞서 지엠대우, 대우자동차 등 사명으로 운영되던 시절 근무 경험에 비춰 현재 한국지엠의 운영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한국지엠은 회사도 아니다"라는 표현으로 운을 뗐다.
C씨는 "김우중 전 회장이 (지엠대우와 대우자동차에) 재직하던 시절엔 가족처럼 구성원 서로 뭉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한국지엠이 들어선 후 개인주의가 팽배해졌다"며 "구성원 간 끈끈함이 사라진 가운데 경영진은 지엠 본사 방침의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일부 노조 조합원들은 과격한 투쟁 의식으로 근무 기강을 흩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다만 노조가 이 어려운 시국에 부분파업을 연이어 할 줄은 예상 못했다"며 "노사 모두 서로 한발씩 양보해야 하는데 실제로 일어나긴 어려울 것 같다"며 씁쓸해 했다.
기자와 짧은 문답을 마친 그가 신경질적으로 담배갑을 뒤지는 사이, 그 너머로 공장의 커다란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활력을 잃은 도시"
오전 11시 20분.
다시 서문으로 가보니 여러 직원들이 삼삼오오 서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의아했던 점은 이날 노조 부분파업이 시작되는 시각인 11시 40분이 지나도 직원들이 쏟아지듯 빠져나오지 않고 조금씩 나뉘어 나온 점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이 조기 배식을 실시하는 비조합원들과 뒤섞여서 밖으로 나온 점을 고려할 때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적은 인원이 눈에 띄었다. 홀로 근무복을 입고 지나가던 연구소 직원에게 물어본 결과 이날 파업이 진행된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노조 집행부 측에 전화를 걸어 문의해보니 "11시 40분에 모든 전반조 근무자들이 (파업 계획에 따라) 퇴근했다"고 답했다.
이날 오후 12시 3분 서문 맞은편 상가의 모습. 식사할 장소를 찾는 사람으로 붐빌 때임에도 길거리가 거의 텅 비어있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
점심 시간을 맞아 서문 맞은 편 상가 골목에 자리잡은 식당으로 이동했다.
한국지엠 근무복을 입은 직원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C씨의 식당에도 우려했던 것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자리 잡고 식사하고 있었다. 다만 60~70석 가량 되는 식당 좌석 곳곳에 보이는 빈자리에서, 파업으로 인한 인원 공백이 느껴졌다. 서문을 비롯한 부평공장 주변 거리는 집 밖으로 나온 주민들과 한국지엠 직원들 덕에 조금이나마 활기를 띄었다. 다만 조합원들이 파업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활력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허전해 보인다.
낯선 침묵이 어울리는 넓은 식당에 의식적인 요란함이 귓가를 때린다.
이날 오후 12시 50분 부평공장 동편에 위치한 출입구. 한국지엠 노조의 부분파업이 진행된 가운데 하늘에 먹구름이 급격히 몰렸다.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
"가을, 그리고 파업"
파업이 시작된 시간대에 공교롭게도 부평공장 하늘 위로 먹구름이 꼈다. 오전 내내 해가 떠있고 맑았는데 급격히 흐려졌다. 전운 감도는 부평공장 앞에 서서 우연적인 현상을 과대 해석했지만, 상공과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노조는 오는 10일 한번 더 부분파업을 실시한 뒤 같은 날 쟁의대책위원회를 열어 향후 투쟁방침을 결정할 계획이다. 사측은 부평1공장에 차세대 신차를 생산하기 위한 공정 증설 계획을 보류하며 맞서고 있다. 엉킨 실타래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형국이다. 마침 부평공장 울타리 빈틈 사이로 노란 은행잎 뒤덮인 풍경이 가을 정취를 물씬 풍겼다. 한국지엠 구성원들끼리 갈등을 이어갈 배경으로 쓰이기엔 아까운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코노믹리뷰=최동훈 기자
부평공장 내 시험주행장 옆 구역이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여 있는 모습. 사진= 이코노믹리뷰 최동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