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심 비공개로 바뀌자 새 증언 쏟아져…‘안희정 구속’ 결정타였다
항소심 144쪽 판결문 들여다보니
“피고인, 공개 재판으로 전환되기 전에 한마디 하시겠습니까.”
지난달 9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54)의 항소심 결심 공판. 2심 재판장인 홍동기 서울고법 부장판사(50·사법연수원 22기)는 수행비서 성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게 물었다.
비공개 재판 때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옛 측근들의 발언을 공개 재판 전에 반박할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다. 하지만 안 전 지사는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3주가량 뒤인 이달 1일 안 전 지사는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2심, 5회 중 4회 비공개 재판
A4용지 144쪽 분량의 2심 판결문에 따르면 1심 무죄가 2심에서 뒤집힌 것은 비공개 재판 때 나온 제3자의 증언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2심은 공판 준비기일을 포함해 모두 5번의 재판 가운데 4번을 전부 또는 일부 비공개로 진행했다. 모두 9번의 재판 중 2번만 비공개로 했던 1심과 크게 달라진 것이다.
1심에서 자신의 신원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적극적인 진술을 꺼리던 증인들이 2심 비공개 재판 때는 피해자 김지은 씨(34)에게 유리한 ‘추가 증언’을 했다. 안 전 지사의 비서실장이었던 A 씨는 2심 법정에서 “1심 때는 공개 재판이라 (제대로) 말하지 못했는데, 피해자가 정무비서로 옮길 때 호소한 취지는 ‘공무원들이 자기를 깔본다. 한직인 거 아니냐’였다”고 말했다. 김 씨는 10번의 피해 가운데 9번이 정무비서로 옮기기 전인 수행비서 시절 발생했다고 밝혔다. 2심 재판부는 이 진술을 판결문에 그대로 인용하며 “김 씨가 정무비서로 보직이 바뀌는 것이 실제로는 퇴출되는 수순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전 수행비서 B 씨는 2심 법정에서 “안 전 지사의 4번째 성폭행 직후 김 씨로부터 피해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 진술했다. 안 전 지사의 옛 측근들이 비공개 재판에서 일관되고 상세한 증언을 한 점이 2심 재판부의 유죄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김 씨는 1심보다 2심에서 더 적극적으로 피해 사실을 구체적으로 털어놨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자신에게 다소 불리하게 평가될 수 있는 부분도 솔직하게 진술하고 있다”고 밝혔다.
“‘위력 행사’ 입법 공백 아니다”
현행 법률에 따른 ‘위력 행사’ 여부에 대한 1, 2심 판단도 달라졌다.
1심 재판부는 폭행, 협박 같은 유형의 위력 행위가 없으면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가 있더라도 처벌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공백이 발생할 수 있는 현실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 없는 입법 공백’이라고 표현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지위나 권세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무형적인 세력에 해당한다”고 반박했다. 판결문을 통해 “안 전 지사는 김 씨가 권력적 상하관계에 있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등 성적 자기결정권을 자유롭게 행사하기에 취약한 상태임을 인식한 상태에서 이를 이용해 간음 행위에 나아갔다”고 밝혔다.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의 성립 요건에 대한 판단 기준을 1심이 매우 협소하게 설정하고 있다”는 검찰의 항소를 2심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성인지 감수성” 대법원과 동일
2심 판결문 16쪽에는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판결문에는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 씨에게 ‘피해자다움’이 없었다는 안 전 지사 측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성인지 감수성 관련 부분은 지난해 4월 대법원 판결문에 사실상 똑같이 나온다. 여학생에게 신체 접촉을 해 해임당한 대학교수의 소송에서 당시 대법원은 “‘성인지 감수성’을 갖추고 2차 피해를 우려한 피해자를 고려해 증거 판단을 해야 한다”며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2심 재판부는 친구의 아내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남성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피해자 부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언급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고, 파기환송심은 최근 이 남성에게 징역 4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김예지 기자 yeji@donga.com·이호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