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속옷 - 30년 양복… 기부품일까요 폐품일까요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28>배려는 없고 덩치만 커진 기부
기증하는 중고품은 친한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세요
지난달 30일 동아일보 위은지 기자가 서울 성동구 서울새활용플라자 아름다운가게 기부물품집하장에서 기증된 생활용품을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가게에 따르면 올 상반기 기증물품 10점 중 7점은 재사용이 어려웠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기부는 사랑입니다. 그 형태가 돈이든, 물건이든, 재능이든, 내가 가진 걸 나눠 남을 도우려는 마음은 아름답죠. 하지만 제가 일하는 곳에서 마주하는 기부의 현실은 종종 실망스럽습니다. 어디서 일하냐고요? 전 기부물품으로 들어온 재활용품을 분류하는 작업장에서 일해요.
쓸 수 있는 물건을 남과 나누고, 재활용으로 환경도 보호한다는 점에서 물품 기부는 계속 늘어납니다. 문제는 들어오는 물건 중 반 이상은 사실상 ‘쓰레기’에 가깝다는 점이에요. 오늘도 입던 속옷을 빨지도 않고 보낸 분부터 구멍 난 양말, 색 바랜 수건, 학원 이름이 적힌 태권도 도복을 보낸 분까지 있네요. 도시락통을 여니 썩은 음식물이 들어 있고 텀블러엔 음료 자국이 그대로고요. 분류작업을 하다 기증된 옷 속에 딸려온 커터 칼에 손이 베인 적도 있어요. 이 정도면 기부물품이라기보다는 폐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중고품을 기증할 때 뭘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내 친한 친구에게 주는 물건’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기부의 예절이 자리 잡으면 우리도 선진국처럼 재활용 문화가 발달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어려운 아이 도왔다” 사진까지 공개하는 ‘후원 갑질’ 이제 그만
기부물품이 담긴 상자를 여니 30년 전에나 팔렸을 법한 펑퍼짐한 은갈치색 정장 한 벌이 나타났다. 목 부분에 색조 화장품이 묻은 흰색 맨투맨 티셔츠, 소변 자국 때문인지 사타구니 부분이 노랗게 변한 남색바지도 나왔다. 아…. 이걸 어떻게 다시 쓸 수 있겠나. 안타깝게도 쓰레기로 분류되는 기증품만 자꾸 쌓여갔다.
지난달 30일 본보 기자가 서울 성동구의 재사용작업장 의류분류장을 찾아 직접 기증 의류를 분류해봤다. 10년 전에 비해 국내 기부문화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지적 때문이다. 이날 들어온 의류는 2만 점 이상. 하지만 10점 중 7점 이상이 ‘폐기물’로 실려 나갔다.
물건 재사용을 통해 공익활동을 지원하는 ‘아름다운 가게’에는 지난해 2200만 점의 중고기부물품이 들어왔다. 3년 전에 비해 20%가량 늘어난 수치다. 물건을 보내온 기증자 수는 더욱 빠르게 늘어 지난해 기준 46만 명을 넘어섰다. 3년 전에 대비 2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물품을 기부하면 기부영수증을 받을 수 있고 소득공제가 가능하다 보니 폭발적으로 기증이 늘었단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쓸모없는 물건이 태반이다 보니 폐기율은 3년 전 45∼55%에서 최근 70%까지 늘어난 상태다.
권태경 아름다운가게 되살림팀 간사는 “한 번만 씻거나 세탁해서 보냈으면 쓸 수 있는 물건들이 참 많은데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많은 물건이 버려지는 형편”이라고 아쉬워했다. 서울의 한 구청 관계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헌옷 수거함’도 최근 쓰레기통처럼 전락해 없애는 추세”라고 말했다.
배려가 부족한 기부는 물품 기부에서만 관찰되는 게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금전이나 재능을 기부할 때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무심한 경우가 많다. 올해 초 학교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린 초등학생 A 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A 군을 후원하는 지역의 한 독지가가 지역 인터넷에 김 군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면서 A 군 친구들 사이에 그가 ‘후원 아동’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독지가는 김 군이 조손 가정에 이르게 된 개인사는 물론이고 얼굴과 학교, 이름까지 그대로 노출했다.
A 군을 담당하는 복지사는 “아이들은 감수성이 예민해 친구들에게 ‘후원 아동’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후원자들이 자신의 후원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걸 노출하면 정말 난감하다”고 말했다. ‘나는 기부자’라는 기분에 도취돼 자칫 기부를 받는 이들의 자존감에 오히려 상처를 주는, 이른바 ‘기부 갑질’을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부자뿐 아니라 기부를 받는 자선단체도 올바른 기부문화를 위한 ‘기부예절’을 지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 소위 ‘빈곤 포르노’라 부르는, 빈곤이나 질병으로 곤경에 처한 이들의 상황을 자극적으로 등장시켜 경쟁적으로 후원금을 얻어내는 광고 방식이 대표적이다.
직장인 지모 씨(36)는 “길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을 가로막고 ‘스티커 붙여주세요’를 외치며 기부단체 홍보를 하는 것도 불편한 기부문화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한상욱 밀알복지재단 굿윌본부장은 “기부 물품 분류·판매를 발달장애인들이 담당하기 때문에 기부 그 자체가 장애인들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는 셈”이라며 “기부자들이 직접 매장에 와 현장을 보면 기쁨도 커지고 더 좋은 기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위은지 wizi@donga.com·이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