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땐 끓는물 붓고 폭행… 조폭형 보이스피싱
68억 뜯은 해외거점 조직 71명 구속
“한달 500만원 버는 콜센터” 미끼
10∼20대 中-태국-필리핀 끌고가 여권 뺏고 감금한 채 일 시켜
보이스피싱 단체에서 탈출하려다 붙잡힌 조직원의 모습. 다른 조직원들이 끓인 물을 부어 심한 화상을 입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제공 |
취업준비생 A 씨(21)는 2017년 12월 말 중학교 동창에게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중국에 있는 여행사 콜센터에서 일하면 한 달에 500만 원을 벌 수 있다. 비행기 표와 교통비까지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친구를 따라 간 곳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이란 것을 눈치채고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지만 여권과 휴대전화를 빼앗긴 채 숙소에 감금됐다.
이들은 A 씨에게 3일 안에 보이스피싱 대본을 강제로 외우도록 강요했고 틀리면 때렸다. 매일 오전 8시부터 늦은 밤까지 전화를 돌려야 했다. 견디다 못한 A 씨와 여자친구는 약 1주일 만에 탈출을 시도했다가 발각돼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결국 올해 1월 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2층 숙소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했다.
경찰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 윤모 씨(28), 이모 씨(36) 등은 중국과 태국, 필리핀에 보이스피싱 콜센터를 만든 뒤 2015년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80명이 넘는 조직원을 포섭했다. 별도의 모집책을 활용해 돈이 급한 이들에게 접근하고 ‘실적의 15∼20%를 수당으로 주겠다’며 유혹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포섭된 조직원 중 20대가 56명으로 가장 많았다. 대부분 군대에 다녀와서 직장을 구하다가 범죄에 가담하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던 10대도 18명(미성년자 1명 포함) 있었다.
감금 생활은 가혹했다. 기존 조직원들은 새로 합류한 조직원의 휴대전화와 여권을 빼앗고, 내부에서는 철저히 가명을 사용했다. 숙소 안에서는 외부를 볼 수 없어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도망가면 반드시 찾아내 죽인다’ 등의 행동강령이 있었고, 도망치다 붙잡힌 조직원에게 끓인 물을 붓기도 했다. 외부 통화는 주말에만 한 차례 팀장이 보는 앞에서만 할 수 있어 ‘해외에서 돈을 벌고 있다’ 등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보이스피싱 일당은 먼저 중국의 ‘큐큐’나 ‘위챗’ 등 모바일 메신저를 이용해 피해자들의 전화번호가 담긴 데이터베이스를 구매했다. 이후 사기는 3인 1조 형태로 이뤄졌다. 1단계는 한국의 시중은행에서 국민행복기금 같은 저금리대출 상품을 권유하는 것처럼 음성메시지를 보내 피해자들을 속여 개인정보를 얻었다. 이어 2단계 조직원이 ‘당신의 신용이 낮아 대출이 어렵다. 그 대신 다른 곳에서 대출을 받고 바로 갚아서 상환 능력을 보여주면 된다’고 거짓말을 해 돈을 빌리게 했다. 그리고 3단계로 조직원이 미리 준비해놓은 계좌로 피해자에게서 송금을 받았다. 피해자 중에는 기존 대출금을 못 갚고 있던 50대 가장이 많았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피해자 312명으로부터 1인당 500만∼6000만 원씩 약 68억 원을 뜯어낸 혐의(범죄단체 등의 조직, 사기)로 86명을 검거해 71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검거가 안 된 총책 윤 씨 등을 잡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윤다빈 기자 empt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