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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하지 말라” 선전하던 소녀의 인생역전

[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동아일보

2021년 뮤지컬 ‘황색바람’에서 개성공단 북한 여성 역을 맡은 연극단 ‘문화잇수다’의 김봄희 대표.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아들 7명을 낳고 6.25전쟁 직전에 월북했다. 전쟁이 끝난 뒤 북한에서 제주도 해녀 출신의 젊은 여성을 만나 또 아들을 8명이나 낳았다.


남로당 출신이라 황해도 농촌으로 쫓겨나 박해를 받으며 힘들게 살았지만, 남과 북에 딸은 단 1명도 없이 아들만 15명을 남겼다.


그중 한 명이 김봄희 씨(33)의 부친이다. 1989년 봄희가 원산에서 태어났을 때 부친은 화물선 기관장을 지냈다. 1995년 봄희가 인민학교에 입학할 즈음 북한은 엄혹한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봄희의 부모들도 장사에 뛰어들었다.


봄희의 부친은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 어린 딸과 두 살 아래의 남동생을 새벽 4~5시에 깨워 텃밭 농사를 함께 짓게 했다.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엔 절대 빈손으로 오지 못하게 했고, 하다못해 토끼풀이라도 뜯어오게 했다.


봄희가 7살 나던 해 아버지는 북한돈 100원을 주면서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오라고 했다. 어린 봄희는 그 돈으로 사탕 10알을 샀다. 그리고 주변 농촌에 나가 1개당 11원씩 팔아 10원을 남겨왔다. 어린 딸에게 부모는 간장, 된장 담구는 법부터 시작해 술을 뽑고 찌꺼기로 돼지를 키우는 법까지 각종 집안일을 가르쳤다.


이렇게 엄격하게 키운 이유는 있었다. 할아버지는 남로당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아들들이 북한에서 출세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아들들을 모두 기술자로 살게 했고,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으려면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게 가풍이 됐다.

# “탈북하지 마세요.”

봄희는 인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뜻밖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음악선생이 “너는 노래를 참 감수성 있게 잘 부른다”고 칭찬하더니 도 보위부 반간첩기동선전대에 추천했다. 반간첩은 방첩이라는 뜻이다.


반간첩기동선전대는 5세~18세 사이의 어린 학생 13명 정도로 구성됐는데, 도의 각 지역을 다니면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신고합시다”고 선전하는 활동을 했다. 그냥 구호만 외치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노래, 춤, 기악, 화술, 대화시 등을 엮어 50분 정도 공연을 했는데, 전체적인 주제는 이러이러하면 수상한 사람이니 꼭 신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봄희는 탈북하기 전인 2006년까지 이 기동예술선전대에서 활동했다. 새벽에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학교에 다녀온 뒤 오후에는 공연이나 훈련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했다. 주말에도 근교 농촌에 장사를 떠났다. 지방에 공연 갈 때는 청어를 사서 배낭에 메고 가 공연이 끝난 뒤 1마리를 옥수수 1㎏과 바꿔 집으로 돌아왔다.


2002년부터 4년 동안은 간첩을 신고하라는 공연이 ‘불법월경(탈북)을 하지 말자’와 ‘자본주의 불법 영상물을 보지 말자’는 공연으로 바뀌었다.


봄희는 한국에 환상을 품고 탈북했다가 수모를 받고 다시 조국에 돌아오는 여성의 역을 맡았다. 남조선에 간 여성은 어느 집 가정부가 됐는데 주인집 부부는 자기들은 비싼 밥을 먹으면서 탈북한 가정부가 일을 못한다며 온갖 욕설을 퍼붓고 개밥을 먹였다. 끝내 견디지 못한 여인은 천신만고 끝에 북한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공연을 1년 반쯤 준비해 강원도 공장, 농장, 군부대, 학교 등 수백 곳을 다니며 진행하는데, 공연 끝나면 감동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선전대라고 특별한 보상은 없었지만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니 봄희는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 앞에 나가 공연을 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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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대학시절 강릉을 찾아 봄을 즐기는 김봄희 대표.

# 고문으로 숨진 외할아버지

봄희가 15세 때인 2004년 갑자기 원산에서 같이 살던 외할아버지가 퇴근길에 승용차에 태워져 끌려갔다. 알고 보니 평소에 친한 사람에게 김정일을 독재자라고 욕을 많이 했는데, 누군가 그걸 보위부에 신고한 것이다.


봄희의 외가는 중국 출신이다. 전라도 출신의 외할아버지는 해방 전 중국으로 건너가 길림육문중학교를 졸업했다. 이곳은 김일성이 다닌 학교다. 외할머니도 중국에서 태어나 처녀시절까지 살았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간 중국에는 대기근이 닥쳐서 4500만 명이 죽었다. 이를 ‘마오의 대기근’이라고 불렀는데, 이때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탈출했다.


외할아버지는 북한으로 넘어와 김책공대를 졸업했고, 강원도의 한 공업소 기술자로 임명됐다. 두만강을 넘어 몰래 북에 들어온 외할아버지와 달리 외할머니는 공식적으로 북에 건너와 북한 국적을 받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어보단 중국어가 더 편했다. 그래서 봄희는 외가에 갈 때마다 중국어를 들어야 했다.


외할아버지가 끌려간 뒤 봄희는 동네에서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달라짐을 느꼈다. 이웃들은 “저 집 할아버지가 잡혀갔다”고 수군거리며 거리를 두었다. 선전대에서도 봄희는 주연 자리를 빼앗기고 무대 뒤에서 다른 애의 립싱크를 해주는 역할을 맡았다.


외할아버지는 몇 달 뒤 집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눈을 감았다. 고문으로 다 죽게 되자 석방한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뒤 장사를 하던 엄마마저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에서 자란 부모를 둔 엄마는 중국에 외삼촌과 이모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활용해 북중 무역을 하다가 큰 사기를 당했다.


자본금을 찾으려 몰래 도강했던 엄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선양(瀋陽)에 자리 잡아 재봉일을 시작했다. 어차피 북에 돌아와 빚쟁이들에게 쫓기느니 중국에서 돈을 벌어 북한 가족을 살리고 빚도 갚으려는 타산을 한 것이다.


엄마가 탈북한 이듬해인 2005년 봄희는 함북 회령에 가서 엄마에게서 돈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 돈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다. 음식장사도 하고, 감장사도 했다. 강원도 안변은 북한에서 거의 유일한 감 산지였는데, 이걸 함북 청진에 가서 팔았다. 생감을 사서 꼭지를 딴 뒤 술을 바르면 청진까지 가는 며칠 동안 팔기 좋게 숙성됐다. 장사를 하면서도 선전대가 부르면 나가서 공연도 했다.

# 회창의 지하 금광

아무리 7살 때부터 장사로 단련된 봄희지만 어른 사기꾼을 당할 순 없었다. 200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달 뒤 그는 사기를 당해 모든 돈을 잃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때 누군가 평남 회창군의 금광에 가서 몇 달을 일하면 목돈을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봄희는 아버지에게 말도 하지 않고 회창으로 향했다.


12월의 을씨년스러운 회창 장마당 앞에서 벌벌 떨며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기만 기다렸다. 장마당 입구에는 12살부터 18살 사이 아이들이 10여명 있었다. 봄희와 같은 신세였다.


금광에 돈을 댄 ‘돈주’는 장마당 앞에서 인부를 골라 가는데 아이들이 매우 인기가 좋았다. 몸집이 작아 좁은 굴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시키는 대로 일도 잘하기 때문이다.


이틀 만에 어떤 남자가 봄희를 불러 데려갔다. 먹여주고, 하루 북한돈 200~300원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북한에서 쌀 1㎏은 800원이었으니 하루 일당이 쌀 300그램인 것이다.


봄희는 어떤 갱도에 들어가 3개월 가까이 단 한번도 밖에 나오지 못했고 씻지도 못했다. 먹고, 자고 등 일상을 굴 안에서 해결했다. 시간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좁은 굴을 기어가서 돌을 캐고 숙식을 해결하는 좀 넓은 공간에 메고 온 뒤 잘게 깬다. 그걸 수은에 넣어 걸쭉한 찌꺼기를 천으로 짜면 금을 머금은 수은찌꺼기가 남는다. 이렇게 며칠 일해 찌꺼기를 모아놓으면 그를 데려갔던 남자가 찾아와서 먹을 것을 주고 찌꺼기는 가져간다.


이런 아동착취는 북한에서도 불법이다. 그래서 안전원들이 불법 금광 채취를 단속하기 위해 돌아다니긴 하지만, 모두가 굴속에 들어가 살고 있으니 쉽게 찾을 수가 없다.


회창은 지하에 따로 도시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법 금 캐기가 성행하는 곳이다. 땅 속 갱도가 수백 개인지, 수천 개인지, 불법 작업장은 또 얼마나 되는지 누구도 모른다. 전국에서 수천~수 만 명이 몰려와 그렇게 땅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채광 지도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냥 들어가서 아무 방향이나 뚫는데, 수시로 옆에서 폭약을 터뜨리는 소리가 꽝꽝 울렸다. 누구도 서로 누군지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죽으면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는다. 봄희는 시신을 몇 번 보았다.


굴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을뿐더러 서로를 감시한다. 누군가 잡혀 작업장이 드러나면 그동안 일한 돈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심했지만 어느 날 안전원이 봄희의 작업장에 쳐들어왔다. 안전부에 끌려갔더니 미성년자라며 고향에 가는 기차에 강제로 태웠다. 석 달 가까이 일한 돈은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아마 그를 고용한 업주는 안전원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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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뮤지컬 ‘그날 우리는’에서 북한에서 사는 한국 여성역을 맡은 김봄희 대표.

# 탈북

석 달 만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돈을 사기당한 딸을 크게 혼을 냈을 것이지만, 아버지는 한숨만 쉬었다. 어머니가 탈북하고 얼마 뒤 아버지는 재혼했다. 외할아버지 사건과 어머니의 탈북으로 죄인의 집안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니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것으로 세탁을 하려 한 것이다.


봄희는 북중 국경에 가서 엄마한테서 돈을 받아오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말리지 않았다.


“살뜰한 분이 아니셨는데, 그때는 참 이상했어요. 도중에 먹으라고 콩과 강냉이를 닦아 배낭에 넣어주고, 역전까지 배웅하려 나섰어요. 떠나면서 뒤를 보는데, 아버지가 엄청 울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우는 것을 그날 처음 봤고,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죠. 뭔가 예감을 했던 것 같아요.”


이미 한 번 다녀왔던 경험이 있는지라, 회령에 가서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봄희야, 중국에 와서 엄마랑 살지 않겠니. 예술학교도 보내주고, 밥도 배불리 먹고,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봄희는 아버지 때문에 잠시 고민했지만, 엄마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머무는 집 브로커는 자꾸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선뜻 두만강을 넘겨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한 달을 보낸 어느 날 브로커가 오늘 밤 강을 건너가라고 했다.


강 건너기 전 어둠 속에서 브로커가 선심을 쓰듯 옷 보따리를 주더니 “지금 두만강에 얼음이 둥둥 떠내려 오니 강을 건넌 다음에 꽁꽁 얼 거야. 이 보따리를 꼭 들고 가서 마중 나온 사람들을 만나면 갈아입어라”고 했다.


봄희는 그의 안내를 받아 두만강을 건넜다. 그때가 2006년 3월이었다.

# 뜻하지 않은 필로폰 운반

강을 넘어가니 봉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서 어떤 남자가 옷 보따리를 갖고 왔냐부터 물었다. 건네주자 남자는 보따리를 이리저리 뒤져 필로폰(얼음) 봉지를 찾아내더니 봄희를 매정하게 차 밖으로 밀어버리고 떠났다.


그때에야 봄희는 자기가 필로폰 운반책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둠 속에 건네받은 보따리 안에 필로폰이 숨겨져 있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다.


젖은 옷은 꽁꽁 얼기 시작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몇 시간을 걷자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한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아저씨, 저 좀 살려주세요. 중국에 엄마가 있는데 전화 좀 하게 해주세요.”


남자는 봄희의 행색을 살펴보더니 자기 집에 데려가 옷도 주고 아침도 해주었다.


“중국엔 참 착한 사람들이 사는구나” 싶어 감동했는데 얼마 뒤 남자가 엄마에게 전화해 “내가 당신 딸을 데리고 있는데, 팔아먹을 수도 있지만 안 팔고 기다릴 거니 돈 얼마를 갖고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전화 속 엄마는 그러겠다고 했다.


며칠 뒤 그 집에 정복을 입은 공안과 다른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남자를 잡아 “인신매매범으로 감옥에 갈거냐 아니면 그냥 입 닫고 있을거냐”고 협박했다. 엄마가 그 사이 중국의 친척 인맥을 동원해 보낸 공안이었다. 그들을 따라 봄희는 선양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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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 국토횡단에 나선 김봄희 대표. 그는 틈만 나면 자전거를 타고 국내 곳곳을 여행하기를 즐긴다. 요즘은 중고트럭을 캠핑카로 스스로 개조해 타고 다닌다.

# 한국 도착

선양에서 어머니는 월세집에서 살면서 재봉일을 하고 있었다. 시장의 옷가게 한족 아줌마가 일감을 넘겨주면 그걸 수선하는 일이었다. 한족 아줌마는 자기가 받은 돈의 절반을 주었는데, 그 돈으로도 먹고 살만은 했다.


중국에 온 봄희는 엄마를 도와 다림질을 했다. 그렇게 모녀가 열심히 일해 북한에 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봄희는 현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예술학교를 보내줄 능력도 없었고, 잘못하면 체포돼 북송될 위험도 있었다. 엄마는 딸을 설득했다.


“봄희야, 이제 남동생도 중국에 들어오게 할 거니 그땐 한국으로 가자. 거기서 네가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그렇게 살자.”


재혼한 아버지는 형제가 많기 때문에 자신까지 탈북하면 많은 친척들이 피해를 본다며 탈북하길 거절했다. 대신 아들은 보내주었다.


엄마는 틈틈이 한국으로 가는 방법을 찾았다. 1년 반이 지난 2007년 12월 마침내 남동생도 탈북했다. 남동생이 도착하기 직전에 엄마는 봄희를 한국으로 가는 브로커에게 인계했다.


“온 식구가 같이 가다 체포되면 그냥 죽는 거야. 너 혼자 가서 이 선이 안전한지 봐. 네가 잡히면 엄마가 돈을 벌어 구할 수 있지만, 엄마까지 잡히면 우리는 죽어.”


한국으로 가는 일행에 합세한 봄희는 동남아 정글을 헤쳐 도착한 태국 수용소에서 몇 달 수감생활을 한 끝에 2008년 봄 한국에 도착했다.


조사기간과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와 중국에 연락하니 엄마는 자신도 곧 따라 떠나겠다고 했다.

#“연기하고 싶어요.”

19세에 한국에 혈혈단신으로 온 봄희는 미성년자라 임대주택을 받지 못해 가톨릭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봄희는 대학에서 연기를 꼭 배우고 싶었다.


이곳저곳 알아봤더니 연기학원을 다니지 않고선 연기 전공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학원은 등록금만 100만 원이 넘었고, 노래 레슨비용도 15만 원이 넘었다. 미성년자라 집도 없고, 정착금도 받지 못한 그에게 돈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대학 입시를 앞두고 포기하긴 싫었다. 그는 무작정 연기학원에 찾아갔다.


“선생님. 저는 연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북에서 와서 돈도 없습니다. 제가 나중에 갚을 테니 저를 제발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6~7군데를 돌아다녔다. 어느 곳에서도 돈이 없으면 배울 수 없다고 하진 않았지만, 선생이 없고, 자리가 없고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그만큼 제가 그때 무지했던거죠.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말을 못하겠어요.” 봄희에겐 가장 되돌아보기 싫은 흑역사였다.


그러던 가운데 엄마와 남동생도 무사히 입국해 부천에 집을 받았다.


어느 날 봄희를 쭉 지켜봤던 수녀님이 부르더니 자기가 아는 목동의 한 학원 원장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이 애를 어떻게 도와줄 수 없냐”고 부탁했던 것이다. 원장은 다시 목동의 한 연기학원 선생에게 “이 애가 어떤지 한 번 봐주라”고 부탁했다.


연기선생은 구구절절 자기소개서를 6~7매나 써서 온 봄희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까무잡잡한 모습에 북한 사투리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긴장돼 말도 더듬거리는 것을 보더니 “너 같은 애는 한국에서 연기를 못한다. 여기가 얼마나 치열한 곳인줄 아냐. 나가라”고 했다.


봄희는 너무 슬퍼 엄마를 찾아가 펑펑 울었다. 엄마가 딸을 다독이다가 밖에 나가 꽃 한다발을 들고 학원으로 찾아가 선생에게 사정했다. 선생이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봄희는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몇 달 동안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의 성함은 황선일인데, 제가 살면서 가장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선생님 뿐 아니라 사모님까지 부부가 저를 수양딸처럼 생각하고 아껴주셨습니다. 제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분이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봄희는 2009년 동국대 연극학부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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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연극 ‘말랑말랑 이야기’에서 할머니 역을 맡은 김봄희 대표(왼쪽).

# 정체성을 찾다

봄희는 한국에 와서 왜 하필 꼭 연기를 하고 싶었을까.


“다른 선택이 많았다는 것을 그땐 몰랐어요. 북에서 연기를 했으니 내가 여기서도 꼭 이걸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외골수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북에서 선전도구의 어린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 노래와 춤을 추면 박수도 많이 받으니 그게 제 인생인줄 알았던 거죠.”


대학 생활은 너무 어려웠다. 봄희는 “아름다운 날치들이 바다에서 춤을 추는데, 못생긴 꼴뚜기가 끼어든 느낌이었다“고 했다.


북한에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사투리도 넘기 어려운 난제였다.


동기들이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놓고 작품성을 논할 때 봄희는 “자본주의 탐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분석했고, ‘명성황후’의 비극을 논할 때 홀로 “민비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고도 했다. 동기들은 슬슬 이 이상한 동기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탈북민들은 대학에 입학해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좋아진다. 그러나 봄희는 그 반대였다. 개론을 많이 배우는 첫 학기는 열심히 외워 3.5를 받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학년이 올라가면 실기가 점점 많아지는데, 봄희와 함께 하겠다는 동기도 없어 다른 대학에서 사정해 데리고 와야 했다.


“동기들 잘못은 아니었죠. 말투나 사고방식이 너무 달랐고, 그렇다고 제가 인간관계를 잘 맺는 법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죠.”


그는 점점 주눅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국비로 미국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지원했다. 구구절절 자기소개서가 먹혔는지 그는 합격 통지를 받았다.


“미국에 꼭 가고 싶었어요. 다문화 국가인 미국은 어떻게 서로 다름을 조화시키며 사는지 꼭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떠난 미국에서 그는 2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감을 다시 찾았다.


“미국에 가서 내가 무조건 한국화 돼야 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어요. 한국에 왔으니 무조건 한국인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인들과 어울리면서 내가 살아온 삶과 정체성 역시 중요한 것이구나. 이걸 버리기보단 잘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미국에 가기 전엔 말투도, 음식도, 옷차림도 무조건 한국식으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녀와선 조화시키는 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봄희는 2016년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7년 만에 졸업한 것이다.

# 40개의 아르바이트

북한에서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혔던 부지런함은 큰 자산이 됐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연극단 단장이 된 지금까지 단 하루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은 날이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그가 했던 아르바이트만 40가지가 넘는다. 그중 으뜸 아르바이트는 2010년 대학로의 한 극단에 들어가 스텝으로 일했던 아르바이트였다.


당연히 안 좋은 기억도 있다. 어느 아르바이트 때에는 딱 하루 조금 늦었는데, 사장이 “너 때문에 손해 본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아냐”고 으름장을 놓으며 즉시 해고했다. 한 달반 일한 일당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지금은 당장 노동부에 신고할 것이지만, 당시의 그는 그걸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 사장 덕분에 제가 배운 것도 있어요. 그때부터 열 받아서 계약서를 쓰는 법, 세금 계산서를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해서 지금은 혼자서 이런 것을 척척 해냅니다. 연극단 운영하면서 돈을 정산하는 일이 많은데, 저는 1원도 틀리지 않게 할 수 있어요.”


대학을 졸업한 연극인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도 대학을 졸업한 뒤 투잡을 뛰어야 했다.


그가 찾은 투잡은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아는 사람이 출연하는 작품에 거의 무보수로 출연해 낮에는 열심히 연기 연습을 하고, 밤에는 동대문 옷시장에 나가 옷을 사서 온라인으로 팔았다. 손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큰 돈이 떨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오디션 자리가 났다는 소리만 들으면 찾아다녔다.


봄희는 2017년 대학로 어느 연극단에서 처음으로 탈북 여성의 역할로 주인공을 맡았다. 아들과 남편을 잃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역이었다. 매일 연습시간보다 1~2시간 먼저 가서 청소를 하고, 오늘이 마지막인 듯 연습했다. 무대에 닷새 동안 오른 연극이지만, 잊지 못할 작품이었다.


한국에선 연극만 해선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는 인형극, 마당극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자격증 공부도 열심히 해서 국가문화예술교육사 2급, 연극심리상담사 2급 등을 따기도 했다.


2017년 한 마당극에서 자리를 얻어 수백 건의 공연을 하게 됐다. 일이 바빠지니 온라인 쇼핑몰도 접었다.


“마당극을 하면서 처음으로 삶을 돌아보게 됐어요. 주로 요양원에서 공연했는데, 수백 곳을 다니며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전에는 유명해져서 김봄희라는 이름을 알리고 싶었지만, 요양원에서 황혼기의 노인들을 계속 보다보니 젊어서 얻은 명예와 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나는 하루하루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 마지막에 후회없이 가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오늘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면서 그때부터 돈을 버는 일과 연애와 여행 등을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어요.”


생각이 바뀌니 인생의 동반자도 만났다. 남편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해외에서 쭉 살았다. 친인척의 절반은 미국, 절반은 캐나다에서 사는 남편은 미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스쿨을 나와 5개 외국어를 할 줄 알지만, 한국어는 매우 서툴렀다. 한국에 와서 대학을 다니던 남편과 봄희는 삶에 대한 서로의 가치관에 끌렸고, 올해 아들도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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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인 2015년 독일 베를린 장벽 앞에 선 김봄희 대표.

# 전세 빼서 차린 극단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한국에서 다뤄지는 탈북 여성의 이미지는 거의 똑같을까. 탈북하다 가족을 잃고, 인신매매로 팔려 다니다가, 한국에 와서도 북한 가족 때문에 불법도 저지르고, 늘 눈물 속에 사는 모습일까. 꼭 그렇지 않다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결심이 서니 극단을 만들고 싶었다. 전세자금을 빼서 극단을 차리고 싶다고 하니 남편이 고맙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2019년 극단 ‘문화잇수다’가 생겨났다.


첫 작품 ‘환영의 선물’은 그가 직접 썼다. 자신의 삶에 대한 독백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여성이 한국인처럼 되기 위해 애쓰다가 어느 날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북한에서 살았던 삶이 꼭 부정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닷새 동안 대학로에서 공연했는데, 객석이 모두 찼어요. 그리고 다들 너무 잘 만들었다고 격려해 주셔서 굉장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금전적으로는 적자였지만, 김봄희 개인적으로나 극단 차원에서나 굉장한 흑자라고 생각해요. 하지 않았다면 오늘이 없었을 겁니다.”


두 번째 작품인 ‘소라게와 바다’는 신춘문예 당선자를 작가로 초대해 만들었다. 북한에서 온 사촌 형제 두 명이 한국에서 사는 사촌 형제 두 명을 만나 한 달 동안 함께 살면서 서로 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2021년 대학로에서 공연을 진행했다.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하는 세 번째 작품 ‘벤 다이어그램’은 다음달 무대에 오른다. 벤 다이어그램은 합집합, 교집합, 차집합, 여집합 등의 개념을 쉽게 표현해 주는 그림을 말하는데, 봄희는 이 연극을 통해 문화가 다른 남북한 사람이 어떻게 어울려 살지를 그려내고 싶었다.

# 인생의 반전

지난 2년 동안은 코로나로 인해 문화예술인들이 큰 타격을 입은 시기였다. 하지만 봄희는 이 기간 극단은 적자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비결이 무엇이냐 묻자 그는 지난 3년 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보여주었다.


연극, 뮤지컬, 인형극, 신체극, 토론극, 청소년뮤지컬, 낭독극, 음악극, 마당극 등은 물론이고, 영화, 단편영화와 다큐영화 등 150가지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그가 맡은 역할도 연출과 극작, 기획부터 시작해, 배우, 예술감독, 조연출, 행정, 북한말 코치 등 다양했다.


지난해 화제가 된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에도 단역으로 잠깐 출연했다고 한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작품에 관여할 수 있을까 놀라웠는데, 라디오와 연극강사와 심리상담 보조강사도 한다고 했다.


그는 갓난 애기가 있는 지금도 아침 7시 전에 일어나 오전 내내 행정 업무를 수행하고 1시에 연습실로 가 4시간 동안 개인 훈련을 하고, 저녁엔 다른 사람들과 공연 연습을 한 뒤 11시에 퇴근한다. 집에 와서는 기획 제안서를 3시까지 쓴다. 제안서를 100군데 넣으면 답이 오는 곳이 1~2곳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다고 한다. 애를 맡길 데도 없어 연습실로 늘 아들을 데리고 다닌다.


그래도 그는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


“여기는 노력하면 능력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잖아요. 힘닿는 데까지 가려 하면 앞으로 가게 되는 사회가 아닙니까. 제가 배우로 예쁜 것도 아니고, 또 인맥도 없는 곳에 와서 너무 모자람이 많은데 노력하지 않으면 어떻게 꿈을 이루겠습니까. 다행스럽게 지금까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는 행운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일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저의 꿈은 50%가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고, 50%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입니다. 요양원 다니면서 일이 다가 아니란 점을 깨달았으니 가정의 중요성도 알게 된 것이죠. 제 아들은 부족한 엄마처럼 좌충우돌 하지 않고 실수를 최대한 적게 하면서 살게 교육하고 싶습니다. 단 아들은 엄마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알고 크게 할 겁니다.”


최근 전 세계에 한류 열풍이 휩쓸면서 대한민국의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그는 자신이 처음 겪었던 어려움을 잊지 않았다. ‘문화잇수다’는 3년째 연기를 하고 싶지만 학원에 갈 능력이 되지 못하는 탈북민과 다문화 청소년들을 위해 연기를 접하고 공연까지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원하면 다른 단체와 함께 프로그램 운영도 지원한다.


매년 20명 안팎의 학생을 받아 노래와 춤, 연기를 가르치는 한편 스스로 직접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게 한다. 그는 이것을 무일푼 자신을 받아 키워준 스승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김봄희가 체험한 한국은 어떤 사회일까.


“여기는 너무나 다양한 삶이 존재하고, 그걸 또 끝없이 작품으로 시도해도 되는 사회, 해도 해도 소재가 고갈될 걱정이 없는 사회라는 점이 제일 좋습니다. 북한에 있었다면 시키는 것만 무한 반복해야 하지만, 여기선 해도 해도 끝이 없을 만큼 하고 싶은 게 많고, 작품을 만들면서 또 좋은 사람들과 만나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창의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걸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녀가 북한에서 태어나 학교를 마치고, 중국을 경험하고, 한국에 와서 대학을 나와 극단 ‘문화잇수다’ 대표까지 되는 데 33년이 걸렸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 앞에서 탈북하지 말라고 선동해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어린 소녀의 인생 역전은 이제부터 시작됐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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