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도 저출산 걱정… 혼기 놓친 양민에게 500냥 지원
국학진흥원, 당시 결혼문화 책으로
19세기 말에 활동한 기산 김준근이 그린 조선시대 혼례 풍속도. 양반가 혼인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나이가 더 많은 연상연하 커플이 점차 늘어났다. 독일 MARKK(옛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은행나무 제공 |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김연자 ‘아모르 파티’) 유행가 가사처럼 이제 결혼은 선택의 영역이 됐다. 조선시대에는 자식을 낳아 노동력을 확보하고 대(代)를 이어야 했기에 결혼은 필수였다. 신분과 상관없이 결혼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사업팀이 펴낸 ‘조선의 결혼과 출산문화’(은행나무)를 통해 익히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결혼 문화를 살펴봤다.
하층민, 노동력 확보 위해 나라에서 중매
‘하늘과 같은 성덕과 바다와 같은 은혜로/좋은 날로 이미 혼인날을 정하였으니/예전에는 옷도 먹을 것도 없는 가난을 한탄하는 소리만 있었지만/오늘은 신랑 신부의 좋은 일을 즐겁게 여기는 소리만 있네.’(작자 미상 ‘동상기(東廂記)’)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지금의 ‘N포 세대’가 있듯, 18세기 조선에도 가난 때문에 혼기를 놓친 이들이 있었다. 이때 관리들이 나서 미혼 남녀를 조사해 중매하고, 결혼자금 500냥과 혼수를 나눠줬다. 출산으로 인한 양민의 증가는 곧 노동력 증가를 의미하고, 이는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사족(士族)의 딸로 서른 살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못하는 사람은 호조(戶曹)에서 왕의 허락을 받아 혼수를 제공한다”는 기록이 있다. 법전인 속대전에도 “혼기를 넘긴 자에 대해 한성부와 각 도에 명령해 이들을 찾아내 호조 및 영읍(營邑)에서 혼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하층민 사이에서는 열 살 미만 여자 어린이를 데려가 15세 전후에 결혼시키는 예부제(豫婦制)도 성행했다. ‘꼬마 며느리’를 키워 노동력에 보탰고, 나중에 물품으로 친정에 대가를 치렀다. 이는 혼례에 드는 비용을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
아들 낳으려… 연상연하 커플 많았던 양반층
양반층에게 혼인은 가문의 존속이 달린 문제였다. 여성의 혼인 연령은 임신이 가능한 17세 전후로 고정됐지만 빨리 후손을 얻기 위해 양반 남성의 혼인 연령은 점점 내려갔다. 1500년대 후반 양반 남성의 평균 혼인 연령은 18.3세에서 꾸준히 낮아져 1800년대 후반에는 15.5세가 됐다. 경남 산청 지역의 호적 기록(1686∼1799년)을 보면 당시 연상연하 부부의 비율이 중·하층민에서는 각각 36.2%, 36.4%였는데, 상류층은 44%에 달했다. 양반가 여성들은 남편이 일찍 죽더라도 재혼을 금지당했다. 정절을 중시한다는 명목도 있었지만 자녀들이 새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되면 대가 끊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중매로 힘겹게 혼인하는 경우도 있었던 하층민과 달리 상류층에서는 집안끼리 마음만 맞으면 청혼서 발송부터 혼례까지 10일 안에 끝났다. 결혼 성수기는 날씨가 좋은 봄, 가을이 아니라 농번기와 식중독 위험을 피한 겨울이었다.
책을 집필한 박희진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현재의 출산, 혼인 등 인구지표는 과거의 (남아 선호 등) 사회문화적 현상에 영향을 받은 결과”라며 “한국 사회에 연속적으로 작용하는 조선의 제도문화적 맥락과 인구 동태 사이의 연관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