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과의 결혼? 힘들었지만 후회 없어…다시 하라면 못한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은 1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2층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서재에서 진행된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선생은 평생 글을 쓰느라 누워 쉰적이 없다”며 “그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정말로 허덕허덕 바쁘게 살았다”고 말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노상 글을 써야 해서 그에게는 서재가 필요했다. 내가 그의 서재를 치외법권 지대처럼 일상 세계와 격리시키려고 기를 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강인숙(90) 영인문학관장(건국대 명예교수)이 다음달 26일 남편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1934~2022)의 1주기를 앞두고 최근 자전적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열림원)을 펴냈다. 강 관장의 표현대로 한 가정의 ‘치외법권 지대’였던 고인의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 서재에서 16일 강 관장을 만났다. 그는 “1년 가까이 이 선생 서재의 디지털 아카이빙(기록보관) 작업을 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았다”며 “올 가을쯤엔 (이 전 장관의 바람대로)서재를 일반에 공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생전 모습. 동아일보DB |
1958년 10월 23일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의 결혼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동기로 만나 5년 연애 끝에 결혼한 두 사람은 성북동에 셋방을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열림원 제공 |
생전 130여 권의 책을 쓴 ‘시대의 지성’ 이 전 장관과 64년을 함께한 삶은 어땠을까. 강 관장은 웃으면서 “대단히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다”면서도 “다시 살라면 못 살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결혼 생활은 학교거든요. 인간에 대해 알게 되고, 부모가 되면 또 얼마나 사람이 돼요? 아이들이 부모를 많이 가르치잖아요. (원고 교정 등) 이 선생 심부름한 것도 후회 안하고, 그럴만한 분이었으니까. 근데 그러면서 내 일을 하려니까 힘들었죠. (이 선생은) 완벽주의자라 누굴 칭찬하는 법이 없었어요. 자기가 한 일도 만족하지 못하고.”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16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 2층에 위치한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서재 앞에서 최근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글로 지은 집’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강 관장은 책에서 남편 이야기하길 꺼려 왔다. 하지만 이번 책은 ‘구순 동갑내기 이어령·강인숙의 주택 연대기’라는 부제처럼 부부가 안정된 보금자리를 마련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어 이 전 장관과의 일화나 가족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 선생 이야기가 나오니까 본인에게 모니터링을 시켰죠. 사후에 내기로 합의를 봤고요. 읽고는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원래는 서로의 글을 읽거나 얘기하지 않아요. 집에만 오면 애 셋이 달려들어 ‘내 얘기 좀 들어 달라’고 아우성 치고 잠들면 이 선생은 또 작업을 하셔야 하니까. 그리고 나는 리얼리즘, 이어령 씨는 수사학·기호학 전공이니까 영역도 다르죠.” 그렇게 ‘크로스체크’까지 마쳤는데도 2020년 마무리된 이 책은 발간까지 3년이 걸렸다. 강 관장은 “이 선생이 (투병으로 인해) 책을 못내는 기간이 오니 다 쓴 책도 차마 내질 못했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의 투병 사실은 2019년 공개됐지만, 대장암 발병은 2015년부터였다. “이 양반이 병이 나니까 그때부터 쓸게 많다고 새벽 2시까지 서재에서 매일 글을 썼어요. 빨리 빨리 다 쓰고 가야 한다고. 나는 글을 쓰고 있다가 2시간에 한 번씩 올라와 상태를 살폈죠.” 이 전 장관이 수술을 받은 뒤 항암치료 대신 집필을 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부부가 각자 써낸 책이 이 전 장관 사후 발간된 첫 유작 ‘한국인 이야기’와 강 장관의 이번 책 ‘글로 지은 집’이다.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왼쪽)이 1962년 서울 한강로2가 연립주택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장녀 고 이민아 목사와 함께 찍은 사진. 열림원 제공 |
결혼 후 삶을 정리하는 글을 쓰는 데 집을 ‘연결고리’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선 집이 제일 중요하죠. 인간과 정착공간의 관계를 생각해 본거예요. 아이들의 탄생, 이어령 씨와 나의 사회생활 진척도, 평론적 글쓰기, 서재의 함수관계 등 모든 게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피란민이던 강 관장과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컸던 이 전 장관에게 있어 결혼 4년 만의 첫 내 집 마련은 “‘간장 종지만한 자유’(박완서 소설 ‘조그만 체험기’에서 인용)가 우리를 정신적으로 해방시켜준” 적지 않은 의미였다.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온전한 서재를 갖기 위해 1974년 주택가가 형성되지 않아 외딴 섬 같았던 평창동 499-3번지에 지은 집. 열림원 제공. |
이후 일곱 번의 이사를 거쳐 1974년 산골짜기 외딴섬이던 평창동에 지은 집은 부부의 영원한 보금자리가 됐다. “바위산에 백설이 쌓여 천지가 거룩한 신선계” 같았던 평창동의 자연을 품은 집은 자녀들의 출가 후 2008년 이어령의 ‘영’ 강인숙의 ‘인’을 딴 문학관으로 새로 태어났다.
“그(이어령)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강 관장은 허덕허덕 바빴다고 했다. “내 작업이 이 사람(이어령)을 해쳐선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당시엔 인터넷이 없으니 남편이나 저나 평론을 쓰려면 큰 방에 책을 줄 세워 놓고 뽑아 쓰는 방식으로 ‘푸트노트’(주석) 다는 작업을 했는데, 저만 유독 남편이나 애들이 오면 하던 일을 숨기느라 급급했죠. 제가 일하는 걸 보면 가족들이 부담을 느낄까봐서요.”
1993년 평창동 집 대문 앞에서 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오른쪽)과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왼쪽)이 자녀, 손주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 열림원 제공 |
늘 그에게 1순위였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강 관장은 어쩌다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날엔 ‘자식도 없고, 돈도 없는 외로운 노인의 고독’을 떠올린다고 했다. “혼자 살고 싶은 그들에게 응원가를 불러주고 싶어요. 자유로우려면 외로운 건 참아야죠. 요즘은 익숙해져 괜찮아요. 1년의 학습기간이 있었으니까요.”
강 관장은 평창동 집에서 생을 마감한 이 전 장관과 같은 마지막 바람을 적으며 책을 끝맺는다.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 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