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했던 내가 미웠니?”…착신 정지된 휴대전화에 묻는다[히어로콘텐츠/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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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처 안고 살아가는 ‘남겨진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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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모 씨(60·여)와 박모 씨(69)는 하루에 몇 번씩 스스로에게 묻는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심지어 얕은 잠을 자면서도 생각한다.
살아있을까? 왜 사라졌을까? 그때 붙잡았어야 하는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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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70대에 접어드는 박 씨는 15년째, 올해 60대에 접어든 윤 씨는 8년째 같은 질문의 방에 갇혀 있다. 자식을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묻은 이의 숙명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증발해버린 부모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어떨 때는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겠다’ 싶다. 그러나 자식만은 죽은 게 아니라 그저 사라졌을 거라는 믿음이 부모의 생을 지탱하는 한 가닥 희망이다. 증발한 자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남겨진 자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동아일보는 ‘20대 아들’을 놓친 부모를 만나 ‘남겨진 자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 어머니의 기억… 들을 수 없는 대답
2012년 현충일, 지하철 미화원 윤모 씨는 아주 오랜만에 아들과 밥 한 끼를 먹었다. 계속되는 야근에 도통 얼굴을 못 본 아들이었다. 기분 좋게 쌀국수 한 그릇을 싹 비운 아들은 식당을 나서며 “가보겠다”면서 혼자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출근하려니 했다.
그 뒤로 한동안 윤 씨는 아들과 연락하거나 만나지 못했다. 윤 씨의 직장이 파업에 들어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밤샘 농성을 하는 날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닷새 뒤 집에 오니 우편함에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민석이가 계속 출근을 하지 않네요. 연락 좀 주세요.’ 아들이 일하던 레스토랑 점장이 붙여둔 것이었다. 그제야 아들의 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요청으로 당분간 착신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아들 대신 상냥한 안내원 목소리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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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씨는 아들이 아기 때부터 보험회사, 식당 등 곳곳에서 일하느라 바빴다. 아들은 이모할머니 손에 자주 맡겨졌다. 어릴 적 가장 큰 말썽이 어쩌다 학원을 빼먹고 오락실에 가는 것뿐일 정도로 모난 데 없는 아이였다.
한창 사춘기이던 14세, 아들은 부모의 이혼을 겪었다. 윤 씨는 이혼 후 곧바로 지하철 청소를 시작하면서 매일 밤 10시에 나가 다음 날 오후 1시에 돌아오는 고단한 삶으로 접어들었다. 윤 씨가 퇴근해 반찬을 챙겨 놓고 잠들면 아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혼자 밥을 먹었다. 모자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날은 한 달에 한 번 저녁 식사 정도였다.
아들은 2006년 한 전문대에 입학했다가 1년 만에 자퇴했다. 하지만 소믈리에가 되겠다는 목표가 분명했고 자격증 공부도 했다. 군대에서 보낸 편지에는 “집에서 대화도 잘 안 하는 아들이지만 쑥스러워 그런 거니 이해해 달라. 효도하겠다”는 의젓한 다짐도 담겨 있었다. 아들은 제대 후 공부를 하더니 2011년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윤 씨는 등록금 430만 원을 마련하는 게 버겁지만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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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씨는 이렇게 반듯한 아들이 사라졌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들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 몰랐던 사실을 발견했다. 아들이 2011년 다시 입학했다던 대학은 ‘그런 사람이 등록한 적이 없다’고 했다. 현금서비스 등 600만 원에 달하는 각종 고지서도 날아왔다. 윤 씨가 아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몰랐던 모습만 나타났다. ‘어디 가서 내가 엄마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창피함이 물밀 듯 밀려왔다.
윤 씨는 아들이 미안해서, 혹은 부끄러워서 잠시 떠났지만 곧 돌아올 거라 믿었다. 그런데 아들은 사라진 지 2년 뒤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죽은 건가’, ‘다단계에 빠졌나’…. 악몽이 머릿속을 휘감을 때는 미친 듯이 걸레질을 했다. 아들 또래가 지나가는 것만 봐도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아들이 사라진 뒤 몇 개월 지난 어느 날. 윤 씨는 갑자기 괘씸한 마음이 폭발해 아들 소지품을 마구 내다버렸다. 그 뒤로 8년을 감정을 마비시킨 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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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씨는 지금에야 형제도 없는 아들이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반듯한 아이니까 괜찮겠지’ 했던 무심함이 후회로 돌아온다.
윤 씨는 종종 아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누른다. 여전히 ‘고객의 요청으로 착신이 정지되어 있다’는 상냥한 안내가 흘러나올 뿐이지만, 윤 씨는 전화기를 붙들고 묻는다. “어린 네가 의젓하다고 무심했던 엄마가 미웠니? 엄마가 너의 속을 조금 더 알았다면 지금과 달라졌을까?”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진 영원히 들을 수 없을 대답이다.
○ 아버지의 기억… 알 수 없는 질문
2005년 어느 가을 밤. 박 씨는 경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동네의 한 PC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2000년 즈음부터 가출을 일삼던 아들이 PC방의 한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스물여덟 살이나 된 녀석이 PC방 요금 몇만 원이 없어 신고나 당하고 있다니…. 5년 만에 만난 아들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혀를 끌끌 찼다.
돈을 물어주고 집에 가자고 했더니 아들은 하던 게임을 마저 해야 한다고 했다. 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흘만 시간을 주세요. 다 정리하고 갈게요.” 박 씨는 그 말을 믿었다. 집에서 엄마랑 계속 기다리겠노라며 PC방을 나섰다. 그게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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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의 아들은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했다. 박 씨는 아들이 머리도, 외모도 자신을 똑 닮았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부터 은행 입사 이후 늘 성공 가도를 달려온 자신처럼 아들도 승승장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들은 중학교 때부터 기대와 점점 멀어졌다. 등수가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수학 영어 과외를 시켜봤지만 제자리였다. ‘공부는 싫어도 운동은 하겠지’ 싶어 보낸 태권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박 씨가 태권도 관장에게 아이가 잘 다니는지 물어보니 “안 나온 지 오래됐는데 모르셨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춘기라 하기엔 방황이 길어졌다. 고등학교 생활도 중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1996년 아들은 가까스로 비수도권의 한 사립대에 들어갔다. 박 씨는 아들을 서둘러 군대에 보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탈영을 하는 바람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제대한 뒤에도 예비군 훈련에 연달아 빠져 벌금을 냈다.
‘우리 가족에게 무슨 문제가 있나….’,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웠나….’ 박 씨는 수없이 자문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부족한 것 없이 다 해줬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풍족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큰소리를 낸 기억도 별로 없었다. 일이 바빠 세심하게 아이를 돌보진 못했지만, 그 시대 아버지들은 다 그렇게 살았다.
답을 찾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차 화가 났다. 시골에서 태어나 노력 하나로 도시의 성공적인 삶을 일군 박 씨였다. 자신을 똑 닮은 아들이 열심히 살지 않는 걸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갈수록 아들을 보면 한숨과 싫은 소리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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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 박 씨가 방문을 열어보니 아들이 없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오밤중에 집을 빠져나간 것이다. 마치 수증기 같았다. 이내 돌아왔지만 또 사라졌다. 처음엔 며칠, 나중엔 몇 달. 점점 집을 떠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집 안에 아들의 흔적이 점점 희미해졌다. 아들도, 흔적도, 추억도 엉키고 뒤섞여 증발하는 것 같았다.
처음 아들이 사라졌을 땐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하지만 증발이 반복되면서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누군가 점점 더 알게 되는 게 싫었다. 사정을 아는 이웃이나 직장 동료 등이 아들 행방을 묻는 것도 싫었다. 사람을 피해 충북의 한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박 씨는 15년째 아내와 둘이 고요히 산다.
박 씨는 얕은 잠결에 까무룩 생각한다. ‘혹시 어린 아들이 나와 똑같을 거라 믿었던 내 착각이 아들을 짓눌렀던 건 아닐까? 어느 순간 아들을 부끄러워했던 내 모습이 아들을 떠나보낸 건 아닐까?’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진 영원히 알 수 없을 일이다.
나락으로 내몰려… 스스로를 삭제한 사람들
우발적 가출-범죄 연루와 달라… 상처 등 쌓이며 자발적 단절 선택
실직, 파산, 사별, 이혼, 질병…. 인생이란 언제 어떤 시련이 닥쳐올지 모른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뻗지 못할 수도 있다.
남들은 실패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 나의 존엄성을 해치고 싶지는 않다. 벼랑 끝으로 밀려 추락하기 직전이지만 거리로 나가 구걸하며 살아가고 싶진 않다. 그럴 때 누군가는 생각한다.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여기, 정말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는 이들이 있다. 홧김에 집을 나가는 가출이 아니다. 범죄나 사고에 연루돼 숨거나 숨겨진 것도 아니다. 증발은 자발적인 의지로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 이웃, 동료 등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단절하는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삭제하는 일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 어딘가에선 ‘증발’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해서, 이혼으로 인한 상실감을 채우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받아온 상처가 쌓이고 쌓여서 사라져버리는 이들이 있다. 남겨진 이들의 마음에 생긴 멍은 시간이 갈수록 크고 진해진다. 이들 주위에는 증발하려는 자를 돕는 이가 있는가 하면 증발한 자의 뒤를 쫓는 이들도 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보급률이 95%에 달하는 2020년 대한민국에서 완벽히 증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에 동아일보가 3개월간 추적한 증발자와 그 가족들은 묻는다.
“당신, 정말 벼랑 끝까지 밀려나 본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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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기사 취재: 김기윤 이호재 사지원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양회성 이원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프로젝트 기획: 김성규 이샘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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