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된 계기? DNA에 찍혀 태어난 거죠
[덕후의 비밀노트]
‘프로그레시브 록 음반 덕후’ 정철씨
우표-지우개 수집하다 中2 팝 입문
웹사전 만들고 사전서적 4권 발간
음반 1만장… 밴드 직구입, 가장 아껴
22일 저녁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만난 정철 씨는 “최근 이사를 했는데 이삿짐센터 아저씨들께 ‘판 모서리가 깨지면 충격 받아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놨다”며 웃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레코스케’(모토 히데야스 지음·한경식 옮김·안나푸르나)는 레코드 ‘덕후’의 비범한 일상과 로망을 코믹하게 그려낸 만화다. 원저자, 발행인, 기획자, 역자 모두 가히 특급 ‘L자(판 환자)’로 구성된 드림팀. 그 가운데 편집자 정철 씨(44)도 있다.
인플루언서 커머스 플랫폼 ‘핫트’를 운영하는 ‘소셜빈’의 서비스기획실장인 정 씨는 음반 마니아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실험적이고 서사적인 음악인 ‘프로그레시브 록’ 장르에 통달했다. ‘덕후’가 된 계기를 묻자 ‘단호박’ 대답이 돌아온다.
“덕후는 되지 않습니다. 태어납니다. DNA에 찍혀서 나와요.”
우표, 지우개, 메모지를 수집하다 음반에 닿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팝으로 입문해 헤비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록에 빠졌다. 대학 졸업 뒤 네이버, 다음에서 웹사전을 만들었다. ‘검색, 사전을 삼키다’ 등 사전 관련 서적만 네 권을 썼고 2017년 ‘프로그레시브 록 명반 가이드북’을 공저했다.
약 1만 장의 음반을 소장하고 있다. 그중 절반 이상이 프로그레시브 록 음반. 1인 출판사 ‘빈서재’를 세워 ‘백일신론’ 등 일본사 고전 총서도 펴내고 있다.
―사전 전문가다. 음반 정리도 사전처럼 하나.
“세부 장르에 따라 LP장을 세로 열로 구분해 정리한다. 여기 거실장을 보라. ABC순이지만 여기 첫째 줄은 이탈리아, 둘째 줄은 프랑스, 셋째 줄은 독일, 넷째 줄은 북유럽, 다섯째 줄은 영국의 음악가다. 판이 추가돼도 아래 칸으로 밀며 정리하기 좋다.”
―가장 아끼는 음반은?
“밴드 멤버에게서 직접 산 것들이다. 이쪽 시장이 작아져서 요즘 팀들은 음악을 잘 만들어도 스타의식이 없고 겸손하다. 멤버들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나 e메일을 보내면 반가워한다. ‘아넥도텐’(스웨덴), ‘펜드래건’(영국), 기도 나쓰키(일본)와 교류한다. 농산물 직거래하듯 그들에게 사면 사인까지 해 택배로 부쳐준다. 후원자가 된 기분도 들어 좋다.”
―주로 어디서 음반을 사나.
“국내에서는 서울 마포구 김밥레코즈, 도프레코드, 메타복스, 이츠팝. 죽치고 앉아 있다보면 (다른 마니아) 형들도 자연스레 만난다. ‘덕후’에게도 사교성, 붙임성이 필요하다. 자가발전만으론 한계가 뚜렷하다. 내가 네이버 재직 시 ‘지식인’ 서비스에 관여해 봤잖나. 늘 어떤 분야든 답변자보다 질문자가 더 귀하다. 바꿔 생각하면, 질문만 공손하게 잘하면 답변해줄 사람은 널려 있다.”
―1970년대 음악에 멈춘 마니아들에게 뒤 세대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를 추천해준다면?
“먼저 포큐파인 트리(영국)다. 1990년대 이후 이 판을 석권한, 가장 핑크 플로이드에 가까운 밴드다. 소리를 끌어내 공간에 꾹꾹 끼워 넣어 부유하는 느낌을 준다. 다음으론 오페스(스웨덴)다. 초기의 블랙메탈을 걷어내고 프로그레시브로 온 최근 음반부터 역순으로 찾아 들으면 좋겠다. 그리고 워블러(노르웨이). 애수에 찬 복고적 사운드가 특징인 심포닉 록이다. 멜로트론을 특히 많이 쓴다.
―‘레코스케’ 주인공의 마니아 파워는 어느 정도인가.
“편집하면서 큰코다쳤다. 주인공들의 대화는 석학 대담과 다를 바 없다. 일본에서 1970년대 말에 잠깐 나왔던 특수 경마 게임용 LP판, 비틀스 노래 ‘Yellow Submarine’의 온도(音頭·선창과 제창을 하는 일본 특유의 성악곡 형식) 버전 등 일본 현대 문화사의 맥락을 찾아 해설하느라 애먹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