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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는 차별 딛고 일본 최고 부호가 된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ICT 시장의 큰손, 일본 최고의 대부호 손정의

한국인이라는 차별 딛고 일본 최고 부

재일한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에서 기업인의 꿈을 키운 한 인물이 지금 전 세계 ICT 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1957년 8월, 일본의 규슈 사가현에 있는 한인 집성촌에서 태어난 소프트뱅크그룹의 창업주 ‘손정의 회장(이하 직함 생략)’의 이야기다. 그의 조부는 대구 출신의 재일한국인이었으며, 그는 어릴 때부터 국적으로 인한 차별을 받아온 인물이었다. 무허가 판자촌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그의 집은 장사를 시작하며 형편이 피게 됐지만, 생활이 나아진 이후에도 그는 국적으로 인한 차별을 줄곧 받았다. 차별을 피해, 그리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손정의는 부모님을 설득해 일본을 떠나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일찍이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사업가 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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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자산가로 이야기되는 인물, 소프트뱅크그룹 손정의 회장

미국에서 그는 재일한국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스스로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혹은 미국인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미국에서 꿈을 펼쳐나가기 시작한 손정의는 주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사라몬테하이스쿨 2학년에 편입한 그는 쉬운 교과과정 때문에 교장을 직접 찾아가 3학년으로 올려줄 것을 요청했으며, 3학년이 된 지 4일 만에 교과서를 다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금 교장에게 요청해 4학년이 되었으나 이번에는 일주일 만에 다시금 교과과정을 다 이해하게 된다.

 

입학 2주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끝마친 손정의는 학교를 떠나 대학교를 가고자 했다. 학교를 떠나 검정고시를 보고 합격한 그는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경제학부로 편입해, 경제학과 함께 관심이 높았던 컴퓨터과학을 공부했다. 학창시절부터 그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는데, 일렉트로닉스 잡지에 실린 인텔 컴퓨터 칩 사진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컴퓨터 업계에 진출하겠다고 매일 다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앞으로의 세상이 컴퓨터가 중심이 될 것이라고 당시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것이다.

미국에서의 작은 성공, 그리고 소프트뱅크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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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알리바바그룹의 가장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소프트뱅크그룹

대학교 재학 중에 그는 마이크로칩을 이용한 번역기를 개발했으며, 이를 개발하기 위해 버클리대학교의 모더 교수를 찾아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모더 교수는 처음에는 손정의의 아이디어를 비웃었으나, 그의 열정을 보고 설득돼 함께 번역기 개발에 착수했다. 번역기의 판매를 위해 손정의는 자신의 첫 사업체를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학교 친구인 홍루(루훙량)과 차리게 되는데, 그 회사의 이름은 ‘유니존월드’였다.

 

미국에서 사업을 전개하던 손정의는 일본에서 태동하고 있는 컴퓨터 산업의 가능성을 보고, 그리고 일본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부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니존월드의 경영권을 친구에게 넘기고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본 귀국 후 약 1년 6개월 동안을 별다른 일 없이 사업 구상만 하던 그는 후쿠오카에서 새로운 사업체를 1981년 설립하게 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소프트뱅크(원 일본소프트뱅크)’였다.

후쿠오카에서의 성공, 커져가는 소프트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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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후를 시작으로, 손정의 회장의 투자는 몇 차례의 잭팟을 터트렸다

소프트뱅크의 첫 시작에서, 손정의에게 커다란 행운이 다가오게 된다. 회사명을 보고 다이치겐쿄은행에서 융자업무를 담당하는 영업사원이 같은 금융업계 기업으로 착각하고 소프트뱅크를 방문한 것이다. 이를 인연으로 손정의는 은행의 고지마치 지점장인 미키야 마사유키를 만날 수 있었으며, 설득을 통해 보증인도 없는 조건으로 1억 엔이라는 돈을 융자받게 된다. 유니존월드 경영을 통해 모은 자금과 함께, 초기 융자금은 소프트뱅크가 사업을 펼치는 데에 큰 힘으로 작용했다.

 

소프트뱅크는 하나의 콘텐츠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유통’, ‘인프라’를 거머쥐는 것을 목표로 한 회사였다. 회사의 첫 사업모델 또한 유통을 전제로 한 것이었는데, 바로 해외에서 유통된 스페이스인베이더 게임기를 일본으로 수입해 유통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다수의 소프트웨어를 유통하며 소프트뱅크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며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창업 8개월 뒤에는 소프트웨어 유통업에 이어 출판 사업까지 발을 들였다.

병마와 싸우고 복귀, 다시금 성공을 거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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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통신사로서 소프트뱅크는 아이폰3G를 일본에 처음 들여온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사업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1982년의 시점에 손정의에게 병마가 찾아오게 된다. 중증의 간염 때문에 그는 5년 정도밖에 살 수가 없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게 되고, 요양을 위해 회사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후 손정의는 3년 동안 병원에 있어야만 했다. 손정의가 부재중인 소프트뱅크는 일본경비보장(현 세콤)의 부사장이었던 오오모리 야스히코가 경영을 맡았다. 병마와 싸우며 일선에서 물러나 회사를 지켜보던 손정의는 도라노몬병원의 구마다 히로미쓰 박사가 창안한 스테로이드 이탈요법을 통해 만성간염을 이기고 1986년 5월 일선에 복귀하게 된다.

 

그의 부재 중 소프트뱅크에 쌓인 빚은 10억 엔에 달했다. 회사의 난관을 타계하기 위해 손정의는 통신 서비스로 눈을 돌려 ‘이전과 같은 번호를 쓰면서 자동으로 가장 싼 회선을 찾아주는 시스템’인 NCC BOX를 개발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모은 자금을 활용해 일본 내에서 마이크로소프트웨어의 독점 판매권을 따내게 된다. 그 결과 소프트뱅크의 매출은 1992년 1,000억 엔을 넘었으며, 1994년 7월에 이르러서는 기업공개를 단행해 2,000억 엔의 자금을 유치하게 된다.

거시적 관점에서의 투자와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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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시오브클랜’의 슈퍼셀의 지분을 텐센트에 양도한 사례 또한 기록적인 빅딜이었다

IPO를 통해 자금을 마련한 소프트뱅크의 ‘투자사’로서의 진면목이 이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손정의는 지프데이비스의 사장인 에릭 히포를 통해 알게 된 만성적자 기업인 야후를 알게 되고, 야후 주식 37%를 얻기 위해 150억 엔의 투자를 단행하게 된다. 인터넷 기업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먼저 주목했던 손정의를 향해 사람들은 비아냥을 쏟아냈다. 미국 언론에서는 그를 일본에서 온 마지막 버블남이라고 불렀으며, 소프트뱅크의 투자금은 곧 휴지조각이 될 것처럼 전망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야후는 급성장해 1999년의 시점에서 야후의 주식 시가 총액은 1조 4,586억 엔에 달했으며, 소프트뱅크의 투자금은 360배로 불어나 있었다.

 

이후의 소프트뱅크는 파죽지세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손정의는 일본 최고의 부호의 자리에 올랐으며, 현재는 이동통신 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군에서 활발히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성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하는 ‘큰손 투자자’로 손정의와 소프트뱅크가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데, 현재의 시점에서 손정의는 차후 성장 가능성이 높은 차량공유 서비스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지배자며 아마존닷컴에 대항할 수 있는 ‘알리바바연맹’의 수장으로서도 위치해 있다.

이제는 인류의 ‘미래 산업’을 주도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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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쿠팡에 천문학적 금액 투자를 결정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손정의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보다도 ‘설득’에 능하다는 점이다. 고등학교의 교장은 그의 설득에 넘어가 그의 요청에 따라 학년을 올려주었고, 회사명을 보고 우연히 들어온 은행 직원은 그에게 지점장과의 만남을 알선해 주었다. 빌게이츠는 손정의와 만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소프트웨어의 일본 독점 유통권을 넘겨주었으며,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3G의 일본 유통 파트너로 거리낌 없이 소프트뱅크를 선택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인터넷 인프라를 국가 기간산업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것에는 손정의와의 만남과 그의 충고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커다란 비전을 가지고 사업가를 시작해, 콘텐츠가 아니라 시장을 선도하며 손정의는 소프트뱅크그룹을 성장시키고 있다. 아울러 그는 현재 1,000억 달러 규모의 ‘비전펀드’를 조성해 성장 가능성이 높은 ICT 기업들에 전방위적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수익성이 보장된 투자보다는 공격적 투자를, 그리고 이를 통해 시장의 파이 자체를 확대시키는 투자 전략을 통해 현재 손정의는 ICT 시장 전반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일본의 ICT 열풍을 주도했던 벤처키드는 어느새, 인류의 미래 산업의 ‘큰손’이 되어 글로벌 시장을 주무르는 인물로 성장했다.

 

글 : 최덕수 press@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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