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에서 1년에 2억 받던 회사가 300억 매출 낸 사연
국내 최대의 여성 패션 테크 스타트업의 창업자
패션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스타트업들의 주된 특징은 ‘큐레이션 서비스’라는 점이다. 처음부터 자신들이 디자인한 제품을 판매하는 이들도 있지만, 연 매출이 백억 단위로 뛰고 중견 기업으로 성장하는 스타트업들의 많은 수는 사람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또 이에 딱 맞는 제품을 추천해 주는 큐레이션 서비스 운영사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여성 패션 쇼핑몰 분야에서 이와 같은 서비스로 두각을 나타내는 업체로는 단연 ‘지그재그’의 서비스사 ‘크로키닷컴’이 꼽힌다. 일찍이 큐레이션 서비스의 가능성에 주목한 크로키닷컴의 설립자는 서정훈 대표(43, 이하 직함 생략)다.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정의하는 인물
지그재그의 운영사인 ‘크로키닷컴’을 창업한 서정훈 대표 |
서정훈은 자신의 학창 시절을 ‘평범’으로 정의하고 있다. 컴퓨터와 디자인, 축구를 좋아하던 그는 물리학과를 전공하고 토이스토리의 픽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 아주대학교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인물로, 사회생활은 픽사가 아닌 휴대폰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디지탈아리아에서 시작했다. 디지탈아리아는 휴대폰의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휴대폰 업체에 납품하는 기업으로, 서정훈은 병역 특례요원으로 입사해 의무복무 기간이 끝난 이후에도 회사에 남아 활동을 지속했다.
개발자에서 관리자로 승진한 그는 회사에서 새로이 설립한 법인 ‘라일락’의 대표로 승진했다. 그는 라일락의 대표로 4년 동안 일하며, 직원을 50명 규모로 늘리고 누적 매출 100억 원을 달성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피처폰 중심의 시장이 스마트폰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피처폰 GUI가 주된 수익원이었던 회사에도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디지탈아리아과 라일락의 인수합병, 매각 소식이 들려오자, 라일락의 성공으로 사업에 자신감이 붙어있던 서정훈은 회사를 나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창업 후 처음으로 만든 앱 서비스
첫 서비스는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나이키와의 협업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
스마트폰이 휴대폰 시장 전체를 삼켜버린 2012년 2월, 서정훈은 자본금 1억 5천만 원으로 크로키닷컴을 설립했다. 정물이나 인물을 빠르게 스케치하는 크로키를 그리듯 아이템을 빨리 기획하고 실행하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들의 처음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여섯 명이 모이기로 했던 창업멤버 예정자들은 결국 크로키닷컴에 합류하지 않았으며, 한참을 서정훈과 또 다른 창업멤버인 디지탈아리아 출신의 윤상민 CTO 둘만이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창업멤버 두 명이 처음에 주목한 분야는 스포츠팀 관리 앱 ‘Teamable’이었다. 축구에 관심이 많았던 서정훈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앱은 스포츠 동호회 클럽이 스케줄을 관리하고 상대팀을 찾거나 스코어를 관리하는 등의 기능을 담은 서비스였다. 야심차게 내놓은 첫 번째 서비스는 하지만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B2C에서 앱 서비스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이들은 대신 B2B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코리아를 찾아가 스포츠팀을 위해 앱 서비스를 진행할 것을 제안했으며, 다행히도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나이키코리아는 매년 2억 원을 지불하고 3년 동안 이 앱을 서비스했으며, 이 금액은 크로키닷컴 생존에 요긴하게 사용됐다.
두 번째 성공, 그리고 부침
비스킷, 짧은 시간 빠르게 만든 서비스가 빠르게 성공하다 |
첫 번째 앱 서비스 이후 이들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재미로 두 번째 앱을 론칭했다. 짧은 시간 동안 집중해 만든 앱은 ‘쿠키단어장’이었다. 스마트폰에서 영어 단어를 드래그하면 뜻을 알려주고, 단어장에 자동으로 저장하는 앱이었다. 개발에 고작 3일이 소요된 이 앱은 회사에 의도치 않은 성공을 가져다줬다. 매출액은 크지 않았지만 완성도 높은 앱 개발사로 시장에 이름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점차 주목을 받아 가던 이들은 쿠키단어장을 보다 보편적인 이름인 ‘비스킷’으로 바꿔 글로벌 서비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에버노트와 연동되는 기능을 탑재한 덕에, 비스킷은 201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에버노트 개발자 대회에 초청받아 3위에 올랐다. 그리고 이 실적 덕에 정부의 창조경제 지원책이었던 ‘글로벌 K스타트업 프로그램’ 대상에도 선정될 수 있었다. Teamable과 비스킷의 성공 덕에 이들은 1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비용을 제해도 5억 원이 남는 돈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후속 BM의 개발이었다. 비스킷 이후에도 회사는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팀원 내부의 분열로 인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결실을 맺지 못했다. 대부분의 팀원이 다 떠나고 다시 창업멤버 두 명만 남은 상태에서, 이들은 한 번만 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이것이 실패하면 깔끔하게 사업을 종료하기로 합의했다.
철저하게 ‘의식주’에 주목해 만든 서비스
동대문을 집요하게 주목한 끝에 마침내 만들어낸 서비스, 지그재그 |
2015년에 접어들자 서정훈은 새로운 사업모델의 방향성을 정립하게 된다. 첫 번째는 글로벌 시장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국내 시장에 집중한 서비스를, 그리고 두 번째는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의식주 분야의 서비스를 내놓기로 상정한 것이다. 의식주 중에서도 서정훈은 ‘의’에 주목했다. ‘식’은 배달앱들이, ‘주’는 부동산앱들이 이미 시장을 선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패션 분야로 시선을 돌린 서정훈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동대문 의류 업체들의 성장세였다. 당시에는 패션 업계에서도 특히 동대문산 여성 의류를 떼어다 판매하는 개인 쇼핑몰들의 성장세가 가팔랐던 때였다. 서정훈은 ‘동대문’이라는 키워드를 보다 깊숙이 연구하기 위해 동대문에서 의류 사업을 하는 친구, 연 매출 100억 원을 올린다는 개인 쇼핑몰 운영자 등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쇼핑몰 방문자들의 다수가 검색이나 주소 입력이 아닌 즐겨찾기(북마크)를 이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해, 모바일에서 패션 쇼핑몰들의 북마크 역할을 하는 큐레이션 서비스를 개발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성장에 속도를 높이기 시작하다
높은 리텐션 지표를 바탕으로 론칭, 성공을 거두다 |
2015년 2월 크로키닷컴의 패션 관련 앱 서비스가 스토어에 업로드됐다. 당시 서정훈의 주변인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의 아이디어에 비판적 의견을 전해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인사이트가 성공을 가져올 것이라 확신했다. 친척, 친지들을 동원해 홍보를 하고, 앱 사용자 지표를 얻기 위해 페이스북으로 모객 마케팅을 진행했다. 그렇게 천 명을 모아 한 달간 서비스를 한 이후의 지표는 놀라웠다. 이용자의 한 달 잔존율이 70%를 넘었기 때문이었다. 크로키닷컴의 그때까지의 앱들의 한 달 잔존율은 5% 남짓이었다.
믿음이 확신으로 바뀐 순간 서정훈은 속도를 높였다. 2015년 6월에는 상품 검색과 찜하기 기능을 더한 정식 서비스를 개시했고, 이듬해 1월에는 사업을 더 확대하기 위해 알토스벤처스에서 30억 원을 투자 받았다. 처음으로 외부에서 받은 투자였다. 크로키닷컴의 앱 ‘지그재그’는 그렇게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년 만에 앱의 다운로드 수는 400만 회를 넘어섰으며, 정식 서비스 당시 300개였던 쇼핑몰 리스트는 반년 만에 천 개로 늘어났다.
마침내 수익화에도 성공,향후가 기대되는
2019년 3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수익화에도 성공한 지그재그 |
많은 유망 스타트업들이 이용자 확보에 성공하고서도 서비스 유료화에 실패해 무너지곤 한다. 수수료 책정에 실패해 소비자, 입점 업체들이 떠나면서 서비스가 활력을 잃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그재그에 있어서도 앱의 수익 모델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는 커다란 숙제였다. 서정훈은 알토스벤처스로부터 투자를 받은 다음 달 입점 쇼핑몰에 대한 수수료 정책을 발표했다. 이용자가 지그재그 앱을 통해 쇼핑몰을 방문하고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 5%의 수수료를 받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입점 업체들은 반발했으며, 입점 업체 중 절반가량이 재계약을 거부했다. 결국 지그재그는 발표한 정책을 철회했으며, 서비스의 유료화는 다음 단계로 미뤄졌다.
매출이 없는 상태에서도 유의미한 데이터베이스를 차곡차곡 쌓은 덕에 크로키닷컴은 순조롭게 추가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2017년 5월 70억 원을 추가로 유치한 이들은 검색창을 활용한 광고 상품을 내놓았으며, 이에 대한 반발은 판매 수수료 수취 정책보다 부드럽게 받아들여졌다. 현재 순항 중인 지그재그 서비스는 2019년 300억 원 매출을 달성했으며, 지난 2월 국내 패션 쇼핑앱으로는 최초로 2천만 다운로드를 돌파했다. 여성 패션에 관련해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고 있는 크로키닷컴은 국내에 몇 안 되는 패션 테크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다. 번뜩이는 인사이트와 과감한 결단을 통해 회사를 지금의 위치로 성장시킨 서정훈의, 그리고 크로키닷컴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최덕수 press@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