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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각-120년 전 미국인이 지은 집

지하철 5호선 충정로역에서 내려 9번 출구에서 불과 30여 미터만 걸어가면 이 지역 분위기와 걸맞지 않은 집 한 채가 있다. 바로 충정각이다. 옥호만으로는 중국집이나 한식집이 연상되지만, 실은 갤러리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겸하는 대안 공간이다. 훨씬 전에는 외국인이 살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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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평 대지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양옥 충정각. 1층은 레스토랑과 전시장이고 2층은 레스토랑이 주공간이다. 9각형 첨탑 옆의 문을 들어서면 복도로 1층 공간이 나뉜다. 벽난로가 있는 1층에는 테이블이 몇 개와 함께 벽과 틈새 공간마다 전시품이 놓여 있다. 좁은 계단으로 2층에 올라가면 조금 낮은 천장에 나무 서까래가 그대로 노출된 삼각형 지붕 공간이 있다. 정원 쪽으로 창이 난 자리에 앉으면 은행나무, 향나무 등 이 집과 함께 100년을 나이든 나무들이 만들어 내는 운치 있는 뜰이 보인다. 뜰에는 향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건물 측면에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넓은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 위로는 벽에 잇대어 지붕을 설치한 포치 구조다. 이 집의 연혁을 소개하는 안내문을 읽어 보자.


충정각이라는 이름은 미술 작가 겸 평론가인 성환경 선생이 지었고, 현판은 전각 명인이자 서예가인 정병례 선생의 작품이다. 고종 황제는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이 회사에 미국인 맥렐란이 기사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이 땅을 매입해 집을 지었는데 설계는 당시 조선 땅에 서양식 건물, 즉 세브란스 병원, 경신학교 등을 설계한 캐나다인 건축가 헨리 볼드 고든이 맡았다. 그 근거는 그의 기법과 충정각이 거의 일치되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20세기 초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건축 양식으로, 서양식 건물 기조에 이후 소유주인 일본인과 한국인의 생활 양식이 조금씩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맥렐란은 한성전기회사가 1909년 일본에 매각되자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김규묵 씨가 소유했고 1930년대에는 일본인 타카미로가, 그 이후는 배금순 씨가 소유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도시 현대화의 거센 물결에서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드문 건축물이다.


대안 공간으로서 충정각에는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이 전시가 때로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성격과 맞지 않아도 주인도 손님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작품을 일일이 감상하는 멋도 있지만 이 공간 안에 머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시와 예술을 감상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근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건물들이 꽤 있다. 그럼에도 충정각이 조금 별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100년 전에 이 땅에 살고자 했던 외국인이 지은 그의 고향 건축 양식이자 생활 주거 공간이기 때문이다. 회사 사옥, 궁전 건축물, 대갓집 한옥이 아닌 이역만리 조선 땅에 와서 고국 미국의 생활을 그대로 이어가고 싶었던 맥렐란의 꿈이 배어 있는 집. 어떤 공간이든 애초 첫 벽돌을 올릴 때 누군가의 염원이 담겨 있다면 그것으로도 그 건물은 가치 있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서울사랑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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