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의 세계에서 인생을 씻어내다···오대산 적멸보궁
적멸보궁.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해 놓은, 그 자체로서 부처요, 사찰인 영적 지점이다. 그곳에 가서 기원하면 복이 들어오고 액운이 사라진다고 한다. 적멸의 적은 고요, 쓸쓸, 열반의 뜻을 지닌 한자이다. 멸은 불이 꺼짐, 사라짐, 죽음을 뜻한다. 보궁은 보배로운 궁전이다. 적멸보궁에 들어가 완벽한 고요함 속에서 나를 만나보겠다며 떠난 여행이다. 등산길엔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었으나, 하산 길에는 공허함이 찾아왔다.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
반듯하고 아름다운 적멸보궁 계단 |
해발 1170m. 음, 무리한 산행은 아닐까?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은 오대산 정상인 비로봉 아래, 승천하려는 용의 정수리쯤에 위치한다. 기운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곳이 최고의 명당이라고 확신한다. 먼 옛날, 신라 시대에 대체 자장율사는 그 지점을 어떻게 알고 진신사리를 봉안할 생각을 했을까? 적멸보궁이 위치한 곳은 산 전체가 명당이라는 오대산 봉우리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명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심지어 중국 황제의 명으로 아시아 최고의 명당을 찾던 지관 다섯 명이, 바로 이곳을 발견하곤 확인 상소를 올리려 하던 찰나 벼락이 떨어져 전부 죽고 말았다는 풍문도 있다. 아무튼, 해탈을 이룬 석가모니가 그 고요한 평화를 맘껏 즐겼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를 유래로 하는 적멸보궁은 한국에 다섯 곳이 있다. 그중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을 찾아갔다.
적멸보궁을 오르는 길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자동차를 몰고 가면 월정사 매표소를 지나 선재로를 달려 상원사까지 오를 수 있다. 상원사는 해발 917m에 위치한다. 적멸보궁 가는 길에 만나는 중대 사자암은 약 1164m, 적멸보궁은 1170m이고, 오대산은 1563m이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까지 약 250m, 비로봉까지는 약 650m 높이인 것이다. 눈 내린 겨울 산이고, 가파른 산길을 걸어야 하니 만만한 높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었다. 한 걸음이라도 덜 걷겠다며 상원사 바로 앞 숲길까지 올라가 차를 세우고 배낭, 스틱, 아이젠 등을 챙기면서 오대산 적멸보궁 여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눈 내린 겨울숲이지만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었다. 오대산은 육(肉,陸 통용)산이다. 흙이 많은 산은 사람이 내딛는 발을 폭신하게 받아주는 여유가 있다. 겨울 돌산을 걸을 땐 행여 미끄러지지 않을까 바짝 긴장해야 하는데, 육산을 걸을 땐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져 생각에 잠기게 된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열반)는 멈춤, 꺼짐, 소멸을 뜻한다. 바람이 멈추고, 촛불이 꺼지며, 존재가 사라진 상태. 해탈했을 때 석가모니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이를테면 원하는 회사에 취직했을 때, 대출금을 다 갚았을 때, 갈등하던 친구와 진심으로 화해했을 때 니르바나 세계에 도달하곤 한다. 석가모니는 니르바나를 완수한 뒤 남은 삶을 니르바나 상태로 살다 죽었지만, 인간은 문제 해결 뒤에 곧장 새로운 문제를 스스로 만들어 새로운 걱정 세상으로 들어가곤 하는 게 결정적 차이다. 대개의 삶이란 그렇다. 생로병사의 모든 번뇌에서 완전하게 해방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요함의 절정을 맘껏 즐겨라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은 뒤 니르바나 상태로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해방된 자신을 즐겼다. 수행도 중단했다. 제자들은 보리수 아래에서 배시시 정신줄을 놓은 듯 오직 자신만을 느끼고 있는 석가모니에게 실망했다. 그러나 해탈을 완성해 부처가 된 석가모니에게 더 이상 무슨 수행이 필요할까! 석가모니는 향연의 시간을 만끽한 후 열반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기로 결심했다. 설법을 통해 잔뜩 삐쳐있던 다섯 제자들의 마음을 되돌려 놓았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자를 뜻하는 ‘불’, 진리를 지키는 삶 ‘법’, 모여서 수행하고 공유하는 ‘승’, 이라는 원칙의 불교 교단이 잉태되었다. 교단은 종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깊게는 철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적멸보궁은 이렇듯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해탈한 자신을 즐기던, 그 고요하고 기쁜 상태를 말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적멸보궁들은 신라 선덕여왕 시절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사절 겸 유학승으로 갔을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당나라 청량산(일명 오대산)에서 수행 중 문수보살의 현신으로부터 100여 과의 석가모니 사리와 장삼, 불구 등을 받았는데, 경주로 돌아오자마자 황룡사구층석탑,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 등에 진신사리를 모셨다. 훗날 자신의 종교 사회적 동지였던 선덕여왕이 내란 후유증으로 죽고 진덕여왕이 김춘추, 김유신 등과 권력을 잡자 자장은 강릉 지역으로 가서 곳곳에 사찰 창건과 적멸보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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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작품 같은 사찰 중대 사자암
등산로가 좁아지는가 싶더니 절벽 사찰 하나가 나타났다. 중대 사자암이다. 중대란 오대산에 있는 다섯 곳의 암자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 곳이라는 뜻이다. 오대산의 뜻이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이라는 게 상식이지만, 불교에서는 오대산 자체가 문수 성지이며, 그곳에 있는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의 존재를 표현한 이름이 오대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자암 법당인 비로전 앞에 서니 전각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 소맷돌(돌계단의 난간 부분)에 사자 두 마리가 형형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사자암이라는 이름은 동물 사자에서 온 게 아니라 문수보살에서 비롯되었다. 진리의 부처 문수보살을 상징하는 게 사자이기 때문에 사자상이 있고, 이곳 이름도 사자암이 된 것이다. 실제로 비로전 안에 들어가면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있다. 비로자나불은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라는 뜻이고, 문수보살은 지혜를, 보현보살은 진리를 향한 수행을 뜻한다. 한편 오대산 동대 관음암에는 관세음보살이, 서대 수정암에는 대세지보살이, 남대 지장암에는 지장보살이, 북대 미륵암에는 미륵보살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 중대에는 1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있다. 사자암이 이곳에 세워진 근거인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 때 신문왕의 왕자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으로 출가하여 수행하다 오대를 참배하던 중 1만명의 문수보살을 직접 본 뒤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 뒤로 조선 태종, 명종, 고종 때 각각 다시 지었다. 오늘 본 사자암은 1999년 정념 스님이 오대를 상징하는 5층 향각을 구상, 2006년 8월에 완공한 가람이다. 이곳을 지나는 길이라면 꼭 비로전에 들어갈 것을 권한다. 보통의 절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비로전 내 벽체 사방 8면에 각각 다섯 사자좌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상계에 500문수보살상, 하계에 500문수동자상 세계가 펼쳐져 있다. 사자 위의 보살, 또는 연잎 위 동자들의 모습은 종교를 떠나 하나의 거대한 미술 작품 같았다. 찬찬히 살펴보는 동안 세포들이 움찔움찔 반응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산길인가 꽃길인가
건봉사 적멸보궁 사리탑인 석가여래치상탑비. 세계적으로 희귀한 석가모니의 치아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
9개의 적멸보궁 5대 공식 적멸보궁 외에 네 곳의 적멸보궁이 더 있다. 고구려 승려 아도 화상이 포교를 위해 신라에 세운 구미 도리사, 사명대사가 통도사 사리 일부를 옮기던 중 들려 일과를 봉안한 대구 용연사, 역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약탈해갔던 진신사리를 되찾아와 치아사리를 봉안한 고성 건봉사, 인도에서 온 승려 연기조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지리산 법계사 등이 그곳이다. 이제 600m만 더 올라가면 적멸보궁이다. 불자는 아니지만 그동안 적지 않은 절을 돌아다녀 보았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계단을 본 적이 없다. 현무암으로 보이는 계단이 단정하기 짝이 없다. 계단 양쪽에는 밤길을 비추는 석등들이 띄엄띄엄 앉아있고 그 옆으로는 오대산 침엽수가 하늘을 향해 쭉쭉 올라가 있다. 세찬 겨울바람이 뾰족한 나뭇잎을 스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었지만, 마음이 더욱 안정되는 것 또한 이 반듯한 계단 덕 아닐까? 계단 하나하나를 오르면서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이 마치 불국으로 들어가는 극락교 같고,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 해도 이건 너무 편안한 게 아닌가 하는 배부른 생각도 들었다. 이곳이 꽃길이 된 것은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새벽기도, 사시불공, 참회 정진기도, 저녁 예불, 원력기도 등 매일 스님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이래 한반도 중부 지역의 성지로 국가의 인정을 받았고, 월정사, 상원사 등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과 한암, 탄허 등 부처님급 스님들을 따르는 수많은 신도들의 아낌없는 보시도 한몫했으리라.
이윽고 적멸보궁에 도착했다. 적멸보궁 앞 작은 가람에서 보살님이 부르더니 방문객 이름을 작성하라고 한다. 다 적으니 인절미 접시를 꺼내며 먹으라고 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한 개를 먹고 또 한 개를 먹었는데, 보살님이 비닐 봉투에 남은 몇 개를 넣어 주신다. 배낭 속에는 비로봉 비밀병기 컵라면과 찐고구마가 들어있었지만, 거기에 인절미까지! 오대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허기가 벌써 사라진 느낌, 기분 좋고 감사했다.
적멸보궁은 법당 안에 불상이 없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므로 그 자체가 부처님인 것이다. 굳이 불상을 모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법당은 작은 암자 수준의 크기다. 법당이 있고, 양쪽 벽 너머로 각각 두 사람 정도가 절할 수 있는 좁은 공간이 있다. 법당 안에서는 세 번 절하는 삼배까지만 가능하고, 그 이상 절할 사람은 그 복도에서 상황에 따라 108배를 하든 만 배를 하든 할 수 있다. 적멸보궁 정면으로는 일출을 볼 수 있는 동쪽 언덕이 있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은 적멸보궁 뒷쪽에 있다. 84cm 높이의 작은 마애불탑에는 오층 석탑을 양각으로 새겨놓았다.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 작은 탑은 이곳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묻혀 있다는 표시석이다. 그런데 그 사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오직 탑만이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적멸보궁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적멸보궁 주위를 돌며 탑돌이를 하기도 한다. 탑돌이란 원래 스님과 불자들이 모여 탑을 돌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는데, 백성들이 탑돌이를 좋아하면서 민속이 되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방편, 원, 역(力), 지 등 불교의 형식이 있으나 일반인들은 그저 탑 주위를 돌며 소원을 비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적멸보궁 주위를 도는 탑돌이는 108배 만큼이나 소중한 시간이 될 만 하다.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멸보궁 법당에서 삼배, 복도에서 108배, 그리고 탑돌이까지 마치곤 한다. 그 정도 정성과 집중이라면 액운을 씻는 것은 물론 한 해 동안 큰 복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비로봉 가는 길
생각만 해도 지루한 땀이 흘러내린다. 오대산 적멸보궁에 머문 뒤 비로봉을 향해 걸었다. 아이젠을 장착했고 스틱을 학인했다. 장갑도 꼈고 귀마개가 달린 모자도 꾹 눌러썼다. 해발 1563m의 봉우리를 향하는 길은 오직 오르막.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잠시나마 평지가 나올만도 하겠구만, 비로봉은 그런 휴식 시간을 주지 않았다. 안내판에 의하면 적멸보궁에서 비로봉까지의 거리는 3.5km, 소요 시간은 걸어서 1시간40분 정도이다. 그러나 눈 쌓인 길을 걷느라고 체감거리가 5km로 느껴졌고, 소요 시간도 훨씬 길었다. 추운 날씨였지만 땀이 너무 흘러 정상에 올랐을 때의 한기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인생은 각자도생이라고 하더니, 일행과의 보조는 개뿔, 각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걷기에 바쁠 뿐이었다. 산에 올라가면 꼭 확인하게 되는 결론, 앓는 소리 내봤자 결국 정상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스포츠과학에서는 강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힘들면 내려가도 되는데, 굳이 숨이 넘어갈 지경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강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번 또한 그렇게 정상에 올랐다.
비로봉에는 정상석과 능선의 상고대, 헐벗은 나무, 그리고 까마귀와 박새로 보이는 작은 새들이 있다. 전망도 시원하게 펼쳐져, 가까운 상왕봉, 두로봉, 노인봉, 동대산은 물론 먼 곳 주문진과 그 앞의 동해까지 볼 수 있었다. 발왕산 스키장의 슬로프도 선명하게 보였다. 이렇게 산이 많은 나라에서, 오로지 산만 보이는 백두대간의 겨울 풍경이라니! 그러나 지루하지 않았다. 능선을 따라, 산의 위치에 따라 은은하게 구별되는 자연 색의 농담은 완벽한 수묵화였다. 실제 모습을 보고 있는데, 그것이 눈 앞의 산이 아닌, 그림으로 느껴지다니, 비로봉은 이렇게 오묘한 감정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로봉이라는 이름은 불교의 삼신불(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중 절대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에서 왔다. 오대산 외에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속리산 등에도 비로봉이 있다. 우리나라 봉우리 이름은 죄 스님들이 작명했다는 것인가?
비로봉에서의 마지막 의식은 컵라면 먹기. 준비해 간 컵라면에 보온병 물을 넣고 기다리며 알타리무김치와 집에서 찐 고구마를 꺼냈다. 적멸보궁 보살님이 주신 인절미도 물론이다. 까마귀와 박새들이 주변에 모인다. 산에 가서 야생 동물에게 사람의 음식을 주면 안된다고 하지만, 먹이를 찾기 힘든 겨울철에 채식 몇 가지 나눠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보살님이 준 인절미와 감귤을 잘게 잘라 눈밭 한쪽 몇 곳에 던져주었다. 까마귀가 물고 가면 박새가 쪼로록 내려오고, 금세 사라지고를 거듭한다. 비로봉에 오르면 까마귀와 나눠 먹으라고 인절미 봉지를 챙겨준 걸까? 오직 나만의, 내 가족, 내 친구만의 복을 빈 내게, 더 많은 이웃이 있다는, 산도 산짐승도 모두 네 이웃이라는 섭리를 깨달으라는 뜻이었을지도. 아니다, 별 뜻 없이 그냥 있는 떡 나눴을 뿐? 근데, 나는 왜 적멸보궁에 왔을까. 거기서 빌면 저절로 해탈하게 될까? 난 오늘 니르바나의 니은 근처라도 갔던가? 고요함 근처라도 갔었나? 어떤 생각도 착 달라붙질 않는다.
그리고 하산길에 아스라히 떠오른 생각. 적멸보궁에 숟가락 하나 얹어 무언가를 빌어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짓! 석가모니는 여든 살에 죽었다. 해탈한 상태로 열반에 들었으니, 그래서 모두들 부처가 되려고 빌고 걷고 오르고 명상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는 마지막 설법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월정사 성보박물관
월정사에 팔만대장경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팔만대장경 하면 저절로 해인사가 떠오르는데, 이게 웬일? 월정사 팔만대장경은 해인사의 고려대장경 경판을 인경(일종의 인쇄)한 것으로, 고종 2년에 찍었다. 총 1511종 6802권, 8만1137매의 규모다. 세조의 이야기도 묵직하게 다가온다. 수양대군 세조는 잔인한 방법으로 왕이 된 후 적지 않은 불안 속에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세조의 왕사인 신미 등이 왕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 상원사 중창을 발원하며 쓴 권선문도 이곳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역사실에는 오대산의 역사를 전시해 두었다. 오대산은 지혜의 부처인 문수보살을 기리는 문수 신앙의 성지인데, 그 역사 기록들을 이곳에서 관람할 수 있다. 성보관은 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와 본말사들의 불상, 불화, 복장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불교 유물이 왕실의 유물 못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공간이다. 월정사에 가 본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하는 풍경이 석조공양보살이다. 석조공양보살은 월정사팔각구층석탑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형상의 조각품이다. 국보 제42-2호인 석조공양보살을 주인공으로 하는 전시실에서는 보살상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샌드아트 영상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수행고승실에서는 한암, 탄허, 만화 스님 등 월정사와 상원사의 법력을 드높인 스님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들은 종교를 떠나서라도 존경받아 마땅한 학문과 수행을 실천한 인물들이다. 적멸보궁실은 사리 신앙의 형식과 스토리를 만날 수 있는 전시실이다. 이 밖에 월정사성보박물관에는 강원도 남부 60여 곳 사찰의 불상, 불화, 불교장엄구, 불교의식구 및 경전류의 성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운영 시간 11~3월 09:30~16:30 / 4~10월 09:30~17:00 입장료 무료
왕조실록 의궤박물관
조선 왕조의 『왕조실록』과 왕실의 의전 관련 기록과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특이점은 이곳의 『왕조실록』들이 교정쇄본이라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일이니 교정이 필수라는 것은 상식이지만, 붓으로 쓴 책에 붉은 표시를 한다는 게 어쩐지 낯설다. 『성종실록』, 『중종실록』이 교정본이고, 『선조실록』은 정본이다. ‘의궤’는 왕실의 행사 보고서이다. ‘의궤’에는 의식의 절차, 의식에 사용한 물품들,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등이 기록되어 있고 사용된 기물과 의상, 행렬 장면도 그림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행사 당시의 행렬 장면을 그린 반차도는 화풍이 독특하고 묘사가 뛰어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 장르로 평가되기도 한다. 김홍도 또한 ‘정조대왕 능행도’ 등 걸작을 남겼다. 박물관에서는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과 순정효황후의 결혼식 과정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가례도감의궤’, 승하한 철종, 명성황후의 장례식을 발인부터 장례를 끝낸 후 궁으로 돌아오는 과정까지 소상히 남긴 ‘국장도감의궤’, 대한제국 개국 때 황제 즉위식, 황후, 황태자 책봉, 각종 어책, 어보 제작 과정 등을 기록한 ‘대례의궤’ 등을 볼 수 있다.
[글과 사진 이영근(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67호 (21.02.23)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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