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 문득 안녕, 옥천…향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분주한 일상에 포위된 채 살아가는 시대에 옥천은 천천히 다시 돌아보라고 권한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향수’의 정경처럼 포근한,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곳. 옥천에 오시려거든 고향집 오듯이 오시라. 옥천이 그렇게 이야기 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였다. 그건 올해도 마찬가지.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리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천정이 황금빛 넓은 들로, 또 성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로 변하곤 했다. 왠지 모를 기분 좋은 설렘도 함께였다.
가을이 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 옥천이다. ‘향수’의 고장이자 시인 정지용이 나고 자란 곳. 시어처럼 아름다운 풍경의 시골 마을이 옥천일 거라고 믿는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누런 곡식이 고개를 수그리고 금빛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어느 가을 날, 꼭 한번 찾아가리라 마음먹었다.
따지고 보면 옥천은 먼 시골이 아니었다. ‘남한의 배꼽’으로 불리는 국토의 정중앙이자 경부선 철도와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다. 그래서 흙 냄새 나는 시골의 모습을 진작에 벗어버릴 수 있었던 고장이다.
그런데 난 왜 그곳을 그런 느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건 이동원이라는 가수와 성악가 박인수가 정지용의 시를 노래로 만든 ‘향수’를 발표했을 때부터 마음 한편에 단단하게 고정되었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세월이 한참 흘러도 노래의 느낌이 변하지 않았던 것처럼 시인의 고향도 마땅히 그럴 거라는 생각, 그것이지 않았을까.
옥천으로 접어들면서 저절로 눈이 바빠졌다. 흘긋흘긋 곁눈질로 찾았던 건 ‘향수’에 그려진 고향 마을의 풍경이었지만 처음 만난 옥천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지방 여행길에서 흔히 마주할 수 있는 구읍의 풍경, 그것이었다. 이맘때쯤이면 황금빛으로 변한 들녘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기대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고 만다.
하지만 시인 정지용이 태어난 옥천 구읍에는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가 정겨운 마을 풍경이 되어 있었다. 눈을 돌릴 때마다 마주하게 되는 아름다운 시어들은 마침내 시인의 고향에 당도했음을 알려주었다. 비단 ‘향수’만이 아니었다. 그의 수많은 시어들이 적혀 있는 마을은 마치 한 권의 시집을 펼쳐놓은 듯 보였다. 아름다운 시가 수놓은 아름다운 마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 또 있을까. 옥천의 첫 인상은 그것이었다. 누군가 ‘옥천에 오시려거든 고향에 오듯 오시라’고 했던 것처럼, 딱 그런 느낌의 푸근함과 정겨움이 마을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시인의 마을’ 구읍 기행
정지용 생가 옆으로 흐르던 실개천, 올해로 34회를 맞은 지용제, 정지용 문학관 |
옥천을 찾아간 날은 운 좋게도 ‘지용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올해로 서른네 번째. 옥천이 낳은 시인 정지용을 추모하고 그의 시문학 정신을 기리는 옥천의 대표적 문화행사가 ‘지용제’다. 매년 5월에 개최되던 행사는 코로나로 인해 10월에야 겨우 열리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불안이 말끔히 가신 건 아니지만 마을 곳곳은 축제를 여는 설렘과 들뜬 분위기로 활기가 돌았다. 축제의 중심이 되는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에는 이른 아침부터 제법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 들었다. 올해 ‘지용제’가 내세운 ‘시가 숨 쉬는 마음, 시를 꿈꾸는 마을’이라는 슬로건처럼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문학의 정원을 거니는 듯한 표정들이다.
사마시 합격자들이 유학을 가르치던 옥주사마소, 태조 7년에 창건된 옥천향교, 각신서당이라 불리던 이지당, 육영수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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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흙담과 사립문을 지나 소박한 초가로 들어선다. 정지용의 생가다. 본채 안방에는 둥근 테 안경을 쓴 정지용의 초상화와 그의 시 ‘할아버지’가 걸려 있고, 부엌 옆에는 ‘지용 유적 제1호. 명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1902년 5월15일(음력) 실개천가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 원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새집이 들어섰다’는 동판이 붙어 있다. 1996년 옥천군은 허물어진 옛집을 없애고 본채와 행랑채, 돌담과 우물이 있는 아담한 초가집으로 꾸며 놓았다. 정지용 생가 옆에는 문학관이 있다. 1층 전시관 입구에 앉아 있는 정지용의 밀랍인형은 긴가민가할 정도로 생생한 모습이어서 방문객들을 흠칫 놀라게 한다. 문학관 전시실에는 정지용 문학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정지용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그의 문학을 시대별, 연도별로 정리해놓아 한국 현대 시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을 상세히 살펴볼 수 있게 했다.
▶황홀함의 끝, 옥천의 비경 셋
용암사 일출, 용암사 |
옥천에 가려거든 그곳에서 꼭 새벽을 맞아야 한다. CNN이 인정한 세계적 비경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용암사의 운해와 일출이다. 거두절미하고 옥천 여행은 용암사에서 맞는 새벽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신라 진흥왕 13년(552)에 창건된 용암사는 작지만 아름다운 사찰이다. 건축미 빼어난 산사는 수려한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서 맞는 일출과 천지사방을 온통 뒤덮는 운해는 그야말로 감동 그 자체다. 누구나 그 광활하고 황홀한 풍경을 마주하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눈 한 번 깜박거리는 것조차 잊을 만큼 대자연 위에서 펼쳐지는 비경은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신비스런 조화다. 신성하기까지 한 고요 속에 서있으면 세상사 번민을 잠시 잊는다. 그 사이 구름을 헤치고 붉게 떠오르는 태양은 마치 부처의 거룩한 자비 같다.
용암사의 새벽을 여는 건 어둠 속에서 스멀거리며 피어 오르는 운해다. 그 절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용암사의 운해를 감상하기 좋은 계절이 바로 지금부터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 간절기, 이른 봄이나 늦은 가을이 적기다. 물론 간절기에도 기후 조건에 따라 운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용암사의 운해와 일출을 동시에 보는 건 하늘의 뜻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용암사, 용암사 마애여래불 |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부소무니마을 앞 호반에는 크고 작은 암봉들이 700m가량 병풍처럼 나란히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병풍바위로 부소무니마을 앞 물 위에 떠있는 산이라고 해서 부소담악이라 일컫는다. 본래 산이었지만 대청댐이 준공되면서 산 일부가 물에 잠겨 마치 물 위에 바위가 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절경이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 하여 우암 송시열이 소금강이라 예찬했을 정도로 옥천 제일의 선경을 자랑한다. 지난 2008년 국토교통부가 전국의 하천, 호수, 계곡, 폭포 등 한국을 대표할 만한 아름다운 하천 100곳 가운데 하나로 선정할 만큼 기막힌 비경이다.
부소담악을 지나 대청호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상상도 못했던 ‘천상의 정원’을 만난다. 옥천의 보석과도 같은 힐링 스페이스 수생식물학습원이다. 대청호의 풍광과 어우러진 식물원이자 휴양 공간인 이곳은 ‘과학체험학습장’으로 지정받았다. 이곳에는 수련을 비롯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거의 모든 수생식물이 재배, 전시되어 있고 계절별로 수백 종의 야생화가 피어난다. 나무와 숲, 꽃과 풀 그리고 바위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이곳은 지상 낙원을 떠올리게 하는 멋진 공간이다. 꽃과 나무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바람이 지나가는 길’, ‘바람보다 앞서 가지 마세요’, ‘침묵하십시오’와 같은 표어들이 시시때때로 사유의 시간을 선사해준다. 천천히, 편안히, 여유롭게 살라고 얘기해주는 듯하다. 이곳의 멋진 풍경을 완성하는 집도 있다. 중세 유럽의 고성을 떠올리게 하는 웅장한 건축물들과 언덕 한 편에 세워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예배당’이다. 산책길의 끝자락에는 분재원과 실내정원, 수련농장, 다육이정원이 있다. 작고 아름다운 식물들을 천천히 여유롭게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수생식물학습원을 천천히 둘러본다면 대략 1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수생식물학습원은 반드시 사전 예약을 해야만 방문이 가능하고, 일요일은 개방하지 않는다.
▶옥천의 길
▷향수호수길
대청호, ‘천상의 정원’ 수생식물학습원 |
옥천은 걷기 좋은 곳이다. 구읍은 물론이거니와 금강이나 대청호를 끼고 걷는 길은 고향길처럼 편안하다. 그 가운데 대청호반의 아름다운 경관을 따라 이어놓은 향수호수길은 거리와 시간 모두 적당해 옥천을 찾는 여행자라면 꼭 한 번 걸어볼 만한 길이다. 전체 길이가 5.4km. 약 3시간 정도 걸리는 이 길은 옥천선사공원에서 출발해 금강 줄기를 따라 대청호가 펼쳐지는 장계관광지까지 이어진다. 생태문화 탐방로란 별칭처럼 산과 강을 가까이 하며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과 생태계의 오묘한 조화를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다. 대청댐이 들어서기 전 옥천과 보은을 잇는 국도37호선이 지나던 길로 호수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금강과 대청호의 비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명품길이다.
옥천에는 향수바람길과 향수 100리길도 있다. 향수바람길은 장계관광지에서 안남면 연주리까지 이어지는 등산로 겸 산책로로 전체 길이가 약 23.2km. 걷는데 6시간 정도 걸린다. 대청호와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는 둔주봉 언저리까지 가벼운 등산과 산책을 즐기면서 옥천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풀섶이슬길(7.2km), 넓은벌길(4.1km), 성근별길(7.4km), 전설바닷길(4.5km) 등 예쁜 이름을 가진 4개의 길이 있다. 향수 100리길은 향수의 고장 옥천을 구석구석 살펴볼 수 있는 길이다. 전체 길이가 50.6km로 걷는 것보다는 자전거나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이 좋다.
▶여행자의 공간
▷옥천전통문화체험관
전통전례문화 체험을 위해 만든 공간이지만 한옥 숙박과 휴양을 위한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옥천의 옛 지명을 따라 옥주관(커뮤니티센터), 옥천관(체험동), 관성관(전시동), 고시산관(숙박동) 등 4개의 전통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천관에서는 전통공예와 전통음악, 예절과 다도 등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고, 관성관에서는 미술, 서예 등의 기획 전시와 옥천의 역사와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상설 전시가 진행된다. 체험관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은 한옥 숙박을 체험할 수 있는 고시산관. 한옥의 정취와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숙박시설로 4인실 10개와 8인실 3개를 갖추고 있다. 저렴한 이용료와 깨끗한 시설로 인기다. 체험관 내에 식당과 카페가 있고 가까운 거리에 구읍 명소들이 산재해 있어 편리하다. 온라인 예약을 통해서 이용 가능하다.
위치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00
운영 시간 10:00~17:00 *월요일 휴관
▶옥천의 맛
▷생선국수
옥천의 대표 음식인 생선국수는 여러 종류의 민물고기를 뼈째로 푹 우려낸 국물에 국수를 넣어 먹는 음식이다. 어죽에 밥 대신 국수가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얼큰하고 시원하면서 부담이 없어 속풀이로 제격일 뿐만 아니라 단백질과 칼슘, 비타민이 풍부하여 보양식으로도 좋다. 물 맑은 금강과 대청호를 끼고 있는 옥천의 별미로 청산면 중심 거리에는 ‘생선국수의 원조’라 불리는 60년 전통의 선광집을 비롯, 찐한식당, 금강식당, 청양회관, 뿌리식당 등 생선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여럿 있다.
▷도리뱅뱅
‘도리뱅뱅’ 혹은 ‘도리뱅뱅이’로 불리는 이 음식은 작은 민물고기를 프라이팬에 동그랗게 담아 조리한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충북 옥천의 향토 음식으로, 물 맑은 금강에서 잡아 올린 손가락 크기의 민물생선을 프라이팬에 동그랗게 담아 기름에 튀긴 후 매콤한 고추장 양념에 조리는데 고소하고 바삭한 맛이 일품이다. 청산면에서 생선국수를 하는 집들 대부분이 이 음식을 만들어 팔며 보통 생선국수와 곁들여 먹는다.
[글과 사진 이상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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