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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나도 매일 포기하고 싶다. 그러나..." 박정민의 '버티는 마음'

"우리 모두 잘 속이려고 애쓰며 사는 거죠"

책도 쓰고, 서점도 내고, 연기도 하는 이웃집 남자

‘쓸모있는 인간’에서 ‘쓸만한 인간’으로, 배우 박정민

"열심히 한다고 잘되지 않아…적정 포인트 이르러야"

"실력 들통날까 두려워… 강박불안 앓았지만 극복"

"촬영장 운전 직접, 매니저 의존 안하면 정신 맑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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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33살). 작가이자 서점주인이자 배우다. 10대 소년들의 파국적 관계를 파고든 영화 ‘파수꾼'으로 이름을 알렸다. ‘동주' ‘변산' ‘타짜' ‘시동' 등 단편영화 8편, 장편영화 23편에 출연했다.

‘가끔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나오는 당신의 평범한 옆집 남자.’ 박정민이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평범한 옆집 남자는 ‘쓸만한 인간'이라는 책도 썼다. 상수동의 작은 동네 서점 주인으로 음료도 싹싹하게 서빙하고, 셈 바르게 계산도 잘한다. 대박을 터뜨린 적은 없지만, 파수꾼(2만 명)' ‘동주(120만 명)' ‘그것만이 내 세상(340만 명)' ‘사바하(240만 명)' 등 출연한 몇몇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 자칭 ‘옆집 남자’는 매우 양면적이라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면서도, 가공할만한 열심으로 자신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곤 한다.


그가 운영하는 서점 입구엔 ‘네가 울었던 그 책을 밤낮으로 읽었다. 너와 함께 울지 못해 참으로 울었다'는 뭉클한 초대 문장이 적혀 있다. 손님에게 책 속 문장을 뽑아 적은 카드를 건네고, 읽던 책을 키핑해주며, 가끔 배우의 얼굴로 조용히 사인도 해주면서, ‘사실 박정민은 이 공간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이율배반적인 남자.


충동적인 자아와 반성하는 자아를 한 몸에 지닌 ‘문제적 모범생’.


‘잘하는 친구들 옆에서 꿋꿋하게 서 있으려고 더 바들바들 떨어가며 열심히 했다'지만, 그는 박정민이다. 이제훈의(‘파수꾼'), 강하늘의(‘동주'), 이병헌의(‘그것만이 내 세상'), 김고은의(‘변산') 옆에서 조금도 꿀리지 않고, ‘설마 이것도 할 수 있어?’ 충무로가 시험하듯 안기는 고난의 미션을 꼼수 없이 돌파해낸 정석의 배우.


그렇게 좌충우돌하며 그가 도달한 종착지가 ‘쓸모있는 인간'이 아니라 ‘쓸만한 인간'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박정민을 만났다. 온통 화이트로 채색된 상수동 그의 작업실에서였다. TV와 책, 커피 머신이 있는 간결한 공간이었다. 초콜릿과 갓 내린 커피 한 잔을 들고 그가 들어왔다. 얼마 전 한 영화 방송촬영장에서 우연히 만나 이뤄진 ‘충동적’ 약속이었다. 그 사이 환경이 빠르게 바뀌어 영화 ‘시동'의 개봉이 결정됐고, 내일이면 다음 영화 촬영을 위해 태국으로 떠나야한다는 그다.


긴박한 일정이었으나 긴 인터뷰 내내 대화의 즐거움이 공기의 밀도를 채웠다. 고구마 같은 진지함과 사이다 같은 시원함이 조화롭게 퍼져갔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아는 자, 자아의 해상도가 높은 인간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상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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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독서가 박정민. 정밀한 자기 분석으로 자아의 해상도가 높다.

인터뷰 중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충동과 반성’이었다. "열심히 한다고 잘할 수는 없다"고 했다. "적정 포인트에서 이르고 뭘 좀 알아야 좋아진다"고. "어제도 포기하고 싶었고 오늘도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조금 더 강해 여기까지 왔을 뿐"이라고도 토로했다.


서점 주인이면서 책을 낸 작가, 동시에 배우로 살고 있어요. 33살 젊은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다니, 축복입니다.


"일단 저지르고 후회하고 반성하면서 고쳐나가요(웃음). 충동적 인간이죠. 책방은... 처음엔 몰래 열었는데 너무 알려져서 고민이에요. 사실 전 관심받는 걸 안 좋아해요. 지금은 박정민이 빠져도 공간에 힘이 생기는 게 목표예요."


하지만 당신의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박정민이라는 취향의 키워드가 공간에 스며있더군요. 예컨대 책 속에서 발췌한 문장 카드와 10% 디스카운트 쿠폰, 양주처럼 읽던 책을 키핑하는 시스템, 게다가 당신이 여행 중에 사들인 외국책들까지... 취향 공동체의 느낌이 강했어요. 책 속 문장은 직접 뽑나요?


"초반엔 제가 다 뽑았어요. 이젠 직원들도 손님들도 쓰면서 참여하죠(웃음). 그것도 딜레마가 있어요. 처음엔 내가 공감하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죠. 지금은 손님들이 좋아할 만한 문장을 찾고 있더군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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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동에 있는 그의 서점 ‘책과 밤 낮'의 입구. 박정민의 지적 취향이 다채롭게 들어찬 공간이다.

‘내가 좋아하는’ 과 ‘남이 좋아하는’... 두 개의 욕망이 충돌하니 딜레마에 빠지는 건 당연해요.


"하하. 그뿐이 아니에요. 유럽 여행 가면 좋아하는 책의 원서를 사요. ‘드라큘라’ ‘테레즈라깽' ‘너무 시끄러운 고독'...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유럽에서 발견하고 DHL로 부치면, 정작 서점에선 손님들의 외면을 받고 한구석에서 썩어갑니다. 딜레마예요. 제 취향이 마이너일까요?"


글쎄요.


"가령 흐라발 작가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프라하의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발견했을 때 보물을 찾은 느낌이었어요. 밀란 쿤데라는 유명하지만, 흐라발을 만날 줄이야! 흐라발은 소설 속에서도 끝없이 책 이야기를 해요. 버려지는 책을 압축하는 지하의 폐지압축 노동자가 35년 동안 그 속에서 아끼는 책을 골라 읽어치우죠. 그사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대량 압축시설과 파쇄 기계를 본 늙은 노동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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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폐지 노동자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듯 상심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딜레마는 박정민을 이루는 중요한 키워드인 듯 했다.


송강호나 최민식이 배우들의 배우이듯, 흐라발은 작가들의 작가지요. 또 누구를 좋아합니까?


"조지 오웰, 카뮈, 다자이 오사무를 좋아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여성 인권 이슈로 대놓고 추천할 순 없지만, 당시 데카당스 문학을 대표하는 좋은 작품이지요. 사회에서 겪는 감정 상태가 변화무쌍해질수록 부끄러움 많은 인생을 살았던 한 젊은이가 더 깊게 다가와요."


패배와 실패에 민감한 편인가요?


"패배감, 열패감,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인간 실격'의 요조라는 인물이죠. 비극적이고 나르시스트적인 인물이지만, 예술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은 그 감정 상태를 이해합니다."


‘인간 실격'이라는 텍스트와는 다른 의미에서 나는 류승범, 류준열과 함께 박정민을 ‘흙수저의 아이콘’으로 인정합니다. 당신들을 보면 특별히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하거나 매달리지 않아요. 부모 세대의 성공 신화를 좇아 비명을 지르며 (남의 인생을)사는 대신, 스스로 침착하게 자기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타짜, 원 아이드 잭(이하 타짜)'에 함께한 류승범 선배님은 전부터 굉장히 존경했어요. 준열이도 그래요. 그 친구의 행보를 보면 그 베풂과 선행이 존경스럽죠. 다만 제가 흙수저 청춘을 대변하거나 위로한다는 어쭙잖은 생각은 안 해요. 저는 보통 젊은 친구들보다 돈도 많고 유명하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데, 위로라니요... 오만이죠. 단지 책방은 제가 20대 때 좋아하던 곳이니, ‘와서 즐겨보시라’고 권해보는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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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불안하고 뒤틀린 인간을 연기했던 오컬트 영화 ‘사바하'.

한편 연기적으로는 항상 애를 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들어가는 작품마다 신기술을 마스터하는 방식으로. 화투, 피아노, 랩… 왜 그렇게 초인적으로 열심인가요?


"(진지하게)다들 열심히 살지 않나요? 들여다보면 다들 자기 직업 세계에서 정말 열심이잖아요. 특히 영화 현장에선 감독의 열심은 아무도 못 따라갑니다. 배우는 잠깐 왔다 가지만, 그분들은 7~8년을 한 영화에만 매달리거든요."


하지만 이 시대에 열심은 약간 촌스럽게 해석되기도 하지요.


"관객으로선 노력 마케팅이 불편할 수도 있죠. 저 역시 ‘열심히 했으니 재밌게 봐주세요’라는 말은 좀 창피해요. 열심은 제 몫이고, 관객은 좋은 결과물을 봐야죠."


그런 면에선 스웩 넘치는 랩을 선보였던 영화 ‘변산'의 흥행 실패는 아쉽더군요. 당시 이준익 감독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변산'은 결과 빼고는 다 좋은 영화였어요. 배우와 감독과 스태프가 다 행복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아서 슬펐어요. 우리가 너무 우리 행복에만 급급했구나. 우리 진심에 취해서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점검을 못 했구나… 주인공인 학수와 아버지의 불화가 너무 쉽게 봉합됐다는 피드백을 들었어요. 실제 그런 경험이 있는 관객은 감정적으로 불편했다는 거죠."


혹시 공감에 실패한 게 자기 책임이라고 느끼나요?


"이준익 감독은 어른으로서 많은 걸 품어주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인공이고 발언권이 있었어요. 중간에 제가 의견을 냈었어야 했는데… 당시엔 랩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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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과 함께 한 영화 ‘변산'. 흥행은 참패했지만 현장에선 더없이 행복했다고.

매번 그렇게 반성하나요?


"모두의 감정을 다 맞출 순 없죠. 하지만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면 제 부족을 뼈저리게 느껴요. 영화 ‘사바하'도 ‘타짜'도 비슷한 궤적으로 반성합니다. 배우는 한 역할을 연기하면서, 영화적으로 사건을 만나 크고 작은 메시지를 전하게 돼요. 감독의 디렉션과 관객의 정서 사이에서 선을 지키려면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내 고향은 폐항.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변산'은 한 줄의 시에서 시작한 영화다. 노을과 바다와 랩과 시가 어우러진 영화에서 박정민은 한 곡을 제외한 전 곡의 랩을 직접 쓰고 불렀다.


나는 그가 작가로서 낸 첫 책 ‘쓸만한 인간'에서 ‘찌질하다의 반대말은 찌질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한참을 웃었다. 자신을 아낌없이 제물로 던지는 인간, 회피하지 않는 인간, 단어를 굴려서 놀 줄 아는 인간이 책도 쓰고 랩도 쓴다.


스스로 랩을 쓸만한 인간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죠?


"셰익스피어나 소네트를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그 맛이 떨어지잖아요. 희곡도 영어 운율에 맞춰야 멋이 있더라고요. 랩에 맞는 라임과 박자, 말맛이 있는데, 그 단어의 배열을, 제 언어로 하고 싶었어요. 저는 글을 취미로 써서 실력이 미천하지만 내가 아니면 쓸 수 없는 가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요."


수다의 리듬이 싱싱한 박민규 작가, 장진 감독에 심취했던 박정민이 그가 쓴 랩을 읊었다. ‘해가 지는 동네, 바람 부는 곳에, 아버지가 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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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는 마음으로 낸 개정판 ‘쓸만한 인간'. 그는 이 책을 ‘그냥 보통 사람들이 살 법한 인생을 보통 사람들이 쓸 법한 문장으로 적은 종이 뭉치'라고 표현했다.

그의 책을 읽고 나는 많이 웃었다. 오사카 도톤보리의 한국 술집에서 ‘파수꾼'에 나온 이제훈의 팬과 장근석 팬에 둘러싸여 술 마시다 주인장에게 된통 바가지 쓴 사연, ‘응답하라 1988’에 성보라 쓰레기 남친으로 3분 나와 3천 개의 욕을 먹은 이야기, ‘변산'에 래퍼로 출연한다니 ‘너 아빠 닮아 노래 못해'라며 단숨에 이중 ‘디스’를 성공시킨 어머니까지. 배우 박정민보다 작가 박정민은 훨씬 더 가볍고 제멋대로고 눈치 보지 않고 명랑했다.


누군가를 위로하기보다는 웃기고 싶다는 박정민. "모든 글은 웃으라고 쓴 거예요. 내가 사실은 이런 찌질이였답니다. 나 이렇게 살았어요. 웃기죠?라고."


기분 좋게 자기를 하대하는 풍경이, 읽기에 참 좋았어요.


"저는 ‘무한도전'에서 마흔 넘은 아저씨들이, 그분들도 사실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카메라 앞에서 어설픈 척 모자란 척 웃겨주는 게 너무 좋았어요. 내가 좀 망가져서 내 인생에 지장 없고, 남들이 웃으면 그게 참 좋아요."


자기를 던지는 건 굉장히 위험하고 놀라운 일이에요. 연기도 연주도 그림도 글도. 그런데 그걸 해내는 사람들이 있죠. 관객은, 독자는 그럴 때 굉장한 안도와 황홀을 느껴요. ‘저렇게 해도 무너지지 않는구나. 괜찮구나, 아름답구나... 나와 다르지 않구나...'


"그런 것 같아요. 다행히 영화는 기본 100명이 그 작업을 함께 해요. 그런데 책은 작가 혼자서, 그 투신을 감당하더군요. 그걸 알고 무서워졌어요. 두려움을 알기 전에 책을 내서 다행이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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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다 나 같은 사람, 비슷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 잘 속이려고 애쓰며 사는 거죠.”

강박증에 관한 고백을 보고 놀랐습니다. 심리 질환이 어떻게 극복되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더군요.


"2006년 군대에 가서 알았어요. 탈영병 잡는 헌병대 소속이라 휴대폰이 있었는데, 밤마다 폴더폰이 모포 모서리를 조금이라도 벗어날까 봐 잠을 못 잤어요. 불안해서 깨어있으니 점점 좀비가 되어갔어요. 컵이나 수건, 관물대에 물건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식은땀이 났죠. 죽을 것 같아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첫 질문이 "살면서 구속을 많이 받았느냐?"예요."


그 말에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도 새벽 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했어요. 그만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어요. 그때 의사 선생님이 그랬죠. "지금은 힘들지만, 결국 도움이 될 거예요." 그 말이 예언처럼 맞았어요. 강박을 잘 쓰면 부족한 걸 느끼고 노력을 쏟아붓게 돼요."


피아노를 모르던 당신이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쇼팽의 ‘녹턴'을 유려하게 연주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연주하는 흉내가 아니라, 완전히 빠져서 연주를 하고 있더군요.


"(나지막하게)처음엔 피아노를 한 5시간 정도 연습하고 가야지, 해요. 그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하게 돼요. 랩 가사도 한 줄만 더...한줄만 더, 쓰다 보면 어느새 동이 텄죠. 박자 안에 단어를 쪼개 넣는 일이 재미있었어요. 사실 저는... 매 영화, 매 장면을 다 잘하고 싶어요. 잘못하면 그 고통이 너무 심해요. 하지만 알아요. 다 잘할 수는 없다는 걸, 어제 잘 못 했어도 오늘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개봉 후에도 ‘아 저 장면!’하면서 괴로워하면 심신만 피폐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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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 연기와 피아노 연주를 동시에 해내서 놀라움을 안긴 ‘그것만이 내 세상'의 박정민.

요즘 당신을 지배하는 가장 강렬한 감정은 무엇이죠?


"여전히 불안입니다. 꽤 오랫동안 이 상태로 살아온 것 같아요."


뭐가 제일 불안한가요?


"들킬까 봐. 저의 부족이 ‘뽀록’날까 봐 두렵습니다."


저도 그 마음 상태를 잘 압니다.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데도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부정을 떨칠 수 없겠지요?


"네. 그걸 사기꾼 콤플렉스라고 하더군요. 내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고, 들켜서 손가락질 받을까 봐 두려운 증세. 나는 능력 있는 상태가 아닌데 언젠가 그게 대중 앞에서 뽀록날까 봐 불안해하는 상태. 태생적으로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랍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었어요."


위로가 되는군요!


"네. 그런 의미에서 웬만하면 다 나 같은 사람, 비슷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우리 모두 잘 속이려고 애쓰며 사는 거죠."


그렇게 조금씩 쓸만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랬으면 좋겠어요. 때로는 겉으로만 그럴듯하고 속은 썩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가 어느 날은 결핍이 심한 사람이 되기도 해요. 다행히 어릴 적 친구들이 한없이 우울해하는 저를 지금까지 잘 지켜주고 있어요(웃음)."


불안에 끌려다니는 상태가 아니라, 불안을 달래서 데리고 다니는 상태인 듯했다. 자기 불안을 관찰하고 정리하는 동안, 박정민의 연기와 글은 깊어졌다. 이목구비는 점점 실용적으로 잘 생겨졌다. 나는 박정민의 희고 반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세의 더께가 없어 들어오는 감정에 따라 한없이 투명하거나 묵직해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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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열정에 취해 남보다 더 갈지자로 인생을 걸었던 박정민의 해맑은 얼굴.

영화 ‘동주' 촬영 전에 일이 너무 안 풀려 유학 가려고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사실이에요. ‘나는 안될 놈이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어요. 세상에 대해 화가 나 있었어요. ‘내가 진심을 안 담고 연기했는데도 왜 오케이하지? 대본 연구도 안 했는데 왜 좋다는 거지?.’ 그런데도 오랜만에 만난 친지, 친구들이 "너는 언제 잘돼? 언제 주인공 해? 언제 TV에 나와?"하면 넋이 나갔어요. 떠날 결심을 하고 원룸 보증금 8천만 원을 빼서 영국 유학 사이트를 알아보는데, 이준익 감독님이 전화하셨어요. 헛생각 가득한 제 머리채를 잡아다 윤동주 옆의 송몽규 역할로 앉혔죠. 불과 3년 전이에요."


포기하지 않길 잘했군요!


"저는 늘 포기하고 싶어요. 어제도 포기하고 싶었고 오늘 아침에도 포기하고 싶었어요.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조금 더 강할 뿐이죠. 365일 중 65일은 그만둔다고 속으로 소리치면서도, 300일은 버텨요."


65일은 도망가고, 300일은 버티는 마음. 보통 사람인 우리도 그 마음으로 산다.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어서 버틴다.


배우가 되기 전부터, 20대의 박정민은 좌충우돌했다. 수재들만 간다는 공주의 기숙학교 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꿈을 좇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들어갔다. 2009년 재수 끝에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영상원에서 또 한 번 연기로 방향을 틀었다.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공부만 하던 모범생 아이가 감독이 될 거라고, 배우가 될 거라고 선언했을 때마다, 아들이 안정된 직장에서 월급 받길 바랬던 부모님은 여러 번 가슴이 철렁했다. 나중엔 ‘꽹과리 친다고 전공 또 바꾸면 죽을 줄 알라’며 단념하셨다.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열정에 취해 남보다 더 갈지자로 인생을 걷는 사람이 있다. 고생을 사서 하며.


충동적인 기질이 당신 인생에 도움이 됐나요?


"제 거의 모든 행동은 충동적으로 저지르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이 스텝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당연히 실수도 하죠. 아니면 말고요(웃음). 서점도 그래요. ‘책과 밤'이라는 작업실을 겸한 작은 책방을 냈는데, 너무 잘 돼서 ‘책과 밤낮'으로 확장을 했어요. 자꾸만 저지르고 또 보완하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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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적인 스케일이 깊게 배어있는 이병헌 옆에서 밝고 리듬 있는 연기를 보여준 박정민.

연기적으론 어떤가요? 억압돼 있고 불안하고, 뭔가 뒤틀린 인간을 정확하게 묘사하더군요. 역설적으로 자폐 소년(‘그것만이 내 세상')을 연기할 때 가장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였어요.


"(멋쩍게 웃으며)그건 박정민을 가장 잘 숨긴 배역이었어요. 저는 박정민을 뽐내지 못하고 창피해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의 평소 모습에서 멀어질수록 더 신이 납니다. 하지만 비슷한 자폐 증세가 있는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어요. 연기를 못했다는 소리를 듣는 건 괜찮지만, 그 친구들의 가족이나 선생님이 보고 불쾌하면 실패라고 생각했죠. 연습을 거듭할수록 많이 편해졌어요."


함께 한 이병헌과 윤여정 선생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데요. 당신의 근성, 당신의 겸손… 그들과 함께해서 행복했나요?


"(두 손을 맞잡고)저에겐 큰 사치였어요. 이병헌 선배는 수학의 ‘정석’ 같았어요. 완벽한 모범 답안, 사기꾼 콤플렉스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죠. 윤여정 선생님에겐 너무 큰 사랑을 받았어요. 그분들께 실망을 주기 싫어서 더 열심히 했어요."


열심히 할수록 성장한다고 느꼈나요?


"(웃으며)아니요. 열심히 한다고 좋아지진 않아요. 적정 포인트에서 이르러 뭘 좀 알아야 좋아지죠. 열심히 하는 건 순전히 제가 안정되기 위해서죠. 준비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을 없애려고요. 몇 시간 대본만 봤다고 연기의 질이 확 달라지는 그런 기적은 없더라고요."


연기의 질이 확 달라지는 기적은 언제 일어나나요?


"오히려 ‘열심’을 움켜쥐지 않았을 때 홀연히 오더군요. ‘동주'의 마지막 형무소 장면을 찍을 때였어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중국 용정에 윤동주 선생 생가 등을 찾아간 적이 있어요. 윤동주 선생의 비석엔 꽃도 있고 찾아온 흔적이 있는데 그 옆에 송몽규 선생 비석은 풀만 무성해서 아쉽더라고요.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마지막 촬영할 때 불현듯 그 외로운 비석이 눈앞에 떠올라서 제 감정을 끌고 갔어요. 그때 느꼈죠. 무엇이든 다져놓으면, 언젠가는 풀려나온다는 걸."


집에 올 땐 어떤 기분이 들지요?


"보통은 좋지 않아요(웃음). 후회가 밀려들죠. 가끔은 후련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편집을 잘 해주겠지’ 정도로 마음을 추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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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개봉하는 영화 ‘시동'에서 정해인과 함께 연기하는 박정민.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지 않고 촬영장까지 직접 운전하며 오가는 이유는 뭔가요?


"(경쾌한 목소리로)그게 편해요. 그렇지 않으면 허둥지둥 집에서 나와 밴에서 자고, 부스스한 얼굴로 촬영 스태프들을 만나겠죠. 언제부턴가 "제가 잠을 못 자서…" 이런 말로 첫인사를 하는 제가 꼴 보기 싫었어요. 직접 운전대를 잡으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요. 차 안에선(경차 ‘모닝'이다) 대사도 연습하고요. 점점 정신이 맑아지고 사람이 좀 독립적으로 돼요(웃음). 매니저는 현장에서 만나고 우린 각자의 일을 하죠."


작은 일이라도 스스로 하는 사람의 삶엔 생기와 리듬이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그렇게 모범생인 자신이 맘에 드나요?


"예전엔 싫었어요. 못 노는 인간이라는 프레임을 깨고 싶었죠. 공주의 기숙학교인 한일고에 갔을 땐, 한동안 노는 아이인 척 연기도 했어요. DNA가 안 맞더라고요(웃음). 다시 모범생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맘에 듭니다."


최근에 작업한 영화 ‘시동'은 즐거웠나요? 어설픈 반항아 역할이 힐링이 됐습니까?


"하하. 많이 웃었어요. 마동석 선배님은 그 존재만으로 웃음의 시동을 걸죠. 원작이 만화인데, 정말 유쾌한 성장드라마로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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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적인 인간과 반성하는 인간의 경계에 있는 박정민.

요즘엔 무슨 고민을 하나요?


"영화 한 편을 만들 때, 어디까지 신경 써야 할까? 어떤 영화가 왜 세상에 나와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함께 만드는 역할을 하고 싶었죠. 그런데 제가 열광한 영화는 ‘시네마’의 범주인데, 요즘엔 어벤져스와 마블이 대세더라고요. 오랫동안 선배 감독들이 닦아놓은 길을 또 어떻게 쓸고 닦아야 하나, 고민입니다."


마지막으로 33살의 박정민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골똘히 생각하며)저는 아주아주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어요. 그곳에서 많은 걸 봤어요. 수렁에 빠져보니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아등바등한다고 좋아지지 않죠.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갈 수도 없어요.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됩니다… 그렇다고 될만한 일만 찾아다닐 수는 없죠. 요즘엔 조진웅 선배의 말을 생각해요. "모든 선택의 기준은 오직 사람이다."


33살의 저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거예요. 선택의 기준은 오직 사람이에요. 이윤이나 실리만 추구하면 힘들 때 못 버티더라고요. 그리고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일터에서 변하지 않는 저의 다짐은 두 가지예요.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와 ‘하기로 했으면 열심히 하자'. 하하하."


그토록 확실한 다짐을 읊고, 박정민이 크게 웃었다. 불안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시원스러운 웃음이었다.


우리 모두, 사는 동안 쓸모 있고 싶어 한다. 동시에 ‘쓸모 있는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대체 얼마만큼의 눈물을,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할까, 불안해한다. 그렇게 작은 걱정이 집채만 한 파도로 덮쳐올 때, 억압의 레벨을 슬쩍 낮춘 박정민을 생각한다. 저지르고 후회하고 반성하는, 알고 보면 누구에게나 곁을 주는 꽤 ‘쓸만한 인간'을.

조선일보

영화 ‘동주'에 출연한 강하늘과 박정민. 강하늘이 윤동주 역을, 박정민이 윤동주의 평생의 벗 송몽규 역을 맡았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은 송몽규를 모티브로 쓴 작품이다.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윤동주의 시 ‘자화상’. 평생의 벗이었던 송몽규를 모티브로 지은 시.


박정민은 영화 ‘동주'에서 송몽규를 연기했고, 그해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디렉터스 컷 시상식 등 2016년에 있었던 거의 모든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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