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 손해 보면서 골프장 닫고 콘서트 여는 회장님
‘서원밸리 콘서트’ 여는
대보그룹 최등규 회장
최등규 대보그룹 회장이 “언제부터 썼는지 모르겠다”는 서류 가방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는 “오래됐지만 멀쩡해서 전국의 건설 현장과 휴게소를 방문할 때 여전히 애용한다”고 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골프는 코로나 수혜 스포츠다. 골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골프장 예약이 연중 내내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런데 경기도 파주 ‘서원밸리 컨트리 클럽’은 최고 성수기인 5월, 그것도 주말(토요일) 하루를 통째로 비운다. 골프 손님을 받지 않는 대신 골프장을 무료 개방하고 ‘서원밸리 자선 그린콘서트’를 연다. 페어웨이를 무대와 객석, 심지어 주차장으로 내준다. 서원밸리를 운영하는 대보그룹 관계자는 “골프장 하루 매출과 행사비, 페어웨이 잔디 복구 비용 등을 합치면 약 5억원 정도 손실이 발생한다”고 했다.
연 매출 2조원에 빚 없는 알짜 중견 그룹으로 알려진 대보그룹 최등규(74) 회장은 돈을 흥청망청 쓰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다. 오는 28일 콘서트를 앞두고 서울 수서동 대보그룹 본사에서 만난 최 회장은 꿰맨 자국 선명한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는 20년 넘게 같은 슬리퍼를 신고 있다.
최등규 회장이 20년 넘게 신고 있는 슬리퍼. 끊어진 부분을 꿰맨 자국이 선명하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왜 여태 신냐고요? 아직 쓸 만하니까요. 이 서류 가방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사무실에선 점심 먹으러 나갈 때 반드시 소등합니다. 전기 아낀다고 임차료를 덜 내진 않지만, 일부러 낭비할 필요 없잖아요?”
이토록 근검절약하는 회장님이 어째서 매년 5억원이나 손해를 보면서 콘서트를 열까.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돈 벌러 서울로 올라와 새벽에 신문을 돌렸어요. 걸음이 옮겨지지 않을 정도로 배고픈 날이 많았죠. 그럴 때면 어느 집 대문 앞에 놓여있던 우유를 몰래 훔쳐 먹곤 했는데, 지금까지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그게 기업의 이익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의 씨앗이 된 것 같아요.”
◇가장 소중한 걸 내줘야 진정한 나눔
-이익을 나눌 방법은 여럿인데 왜 하필 콘서트였나.
“진정한 나눔은 가장 소중한 걸 내줄 때 가치가 있다. 골프장에서 가장 소중한 건 잔디다. 그린콘서트 때 페어웨이에서 온 가족이 뛰어놀고 공연도 관람할 수 있도록 잔디를 내주었다.”
-콘서트를 열게 된 계기는.
“2000년 서원밸리 개장을 앞둔 주말 어느 날이었다. 골프장에 갔더니 직원 자녀들이 잔디에서 신나게 놀고 있더라. 평소 골프장은 손님과 캐디까지 5명만 이용하는 곳으로만 알았는데, 아이들에게는 잔디와 벙커가 훌륭한 놀이터가 되겠구나 싶었다. 콘서트를 개최해 하루만이라도 아이들이 잔디에서 마음껏 놀 수 있게 하자고 직원들에게 제안했다.”
-직원들이 순순히 찬성하던가.
“평일도 아닌 주말 영업을 포기하자고 하니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웃음). 하지만 골프 대중화와 인식 개선에 기여할 수 있으리란 확신을 갖고 콘서트를 추진했다.”
페어웨이가 공연 무대와 객석, 주차장으로 변신한 ‘서원밸리 자선 그린콘서트’./대보그룹 |
서원밸리 그린콘서트는 2000년 10월 14일 처음 열렸다. 이후 아름다운 봄 풍경과 함께하고 저녁 시간 쾌적하게 콘서트를 관람할 수 있도록 매년 5월 마지막 토요일에 개최하고 있다. 최 회장은 “올해는 코로나로 3년간 중단됐다가 다시 열려 더욱 뜻깊다”고 했다.
누적 관람객 45만명. 바자회, 식음료 판매 등 수익금은 전액 기부한다.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스우파)’ 출연 후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댄스팀 코카N버터와 ‘미스터 트롯’으로 뜬 장민호, 슈퍼주니어 이특·신동, AB6IX, 백지영, 박미경, 김조한, 임창정 등 유명 연예인들도 콘서트 취지에 공감해 재능 기부 형식으로 참여한다. 최 회장은 “2015년에는 지금처럼 글로벌 스타가 되기 전이었던 방탄소년단(BTS)이 출연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독서실로 다진 사업 기반
최 회장은 충남 보령 원당마을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천해수욕장이 바로 앞이다. 그룹명 대보는 대천과 보령에서 따 왔다. 고등학교 3학년 되던 해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졌다. 평소 멀리까지 물 길러 다니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던 최 회장은 한 달간 꽁꽁 언 땅을 파 우물을 만들어놓고 서울행 열차를 탔다. 손에는 어머니가 쥐여준 보리쌀 한 포대가 들려 있었다.
-껌팔이, 신문 배달 등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일자리를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날도 있었다.”
-독서실로 사업 기반을 다졌다던데.
“푼돈을 벌더라도 대학과 관계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상경 후 반년쯤 지나 종로 EMI 영어 학원 수위 자리가 났다. 수위라지만 학습 분위기를 잡는 군기 반장 역할도 해야 했다. 이후 원효로 독서실 총무실장 자리가 났다. 대형 학원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선지, 면학 분위기를 쉽게 조성할 수 있었다. 독서실이 좋아졌다고 소문났고, 다른 독서실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독서실을 직접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고향 땅을 팔아 세종문화회관 인근 2층 건물에 독서실을 열었다. 열자마자 학생들이 몰렸다. 서대문 사거리 4층 건물을 통째로 빌려서 400석 규모 대형 독서실을 만들었다. 당시 단일 건물로는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서실이었다. 경기고, 경기여고 등 명문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이후 강남 부동산으로 큰 돈을 모았다.
“잠실이 개발될 무렵 아파트와 상가에 투자했다. 한때 아파트를 80채 가지고 있었다.”
-뒤늦게 대학에 갔고, 교수 중매로 결혼도 했다던데.
“1970년대 초반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졸업을 앞두고 교수님이 불렀다. 8대 국회의원을 지낸 오중렬 전 의원의 둘째 딸을 소개해줬다. 지금의 아내(오수아씨)다.”
◇돌산으로 부도, 건설로 재기
승승장구하던 최 회장은 화강석 사업에 진출했다가 일생일대 위기를 맞는다.
-화강석 사업엔 왜 손을 댔나.
“‘대보실업’을 세우고 미국 이유식 ‘거버’와 각종 과자를 수입해 백화점에 납품했다. 스쿠버다이빙과 스키 장비도 수입했다. 그런데 잘되기만 하면 대기업이 달려들었다. 대기업 좋은 일만 해주는 셈이더라. 새로운 사업을 찾다가 건축 마감 재료인 화강석을 알게 됐다. 산은 대대손손 캐도 계속 돌이 나온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전북 익산에 있는 ‘낭산 돌산’을 1979년 샀고, 1980년부터 화강석 생산 사업을 했다.”
-화강석을 캐다가 전 재산을 잃고 부도까지 냈다던데.
“초기엔 좋은 돌이 나왔다. 일본으로 수출 많이 했고, 청와대 영빈관에도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돌 상태가 나빠졌다. 나쁜 돌을 거둬내면 좋은 돌이 나오리란 기대에 그동안 모은 돈에다 은행·친척·지인들에게 빚을 얻어 쏟아부었다. 돌을 파내려면 에어컴프레서를 돌려야 하는데, 한 달에 거의 아파트 한 채 값의 기름을 태워야 했다. 하지만 좋은 돌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집을 처분하고 두 아들을 각각 본가와 외가로 보내야 했다.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말자’는 원칙을 이때 세웠다.”
다행히 위기는 기회가 됐다. 많은 이가 재기를 노리는 최 회장에게 “관급 공사 하청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했다. 이윤은 적지만 돈 떼일 염려 없고 납기만 잘 지키면 된다는 것. 건설 회사를 차렸지만 일감을 따내지 못하다 1984년 어렵게 서울 대방동에서 충북 청주로 이전하는 공군사관학교 활주로 공사를 처음으로 수주했다. 이후 수자원공사 수도권 광역 상수도, 광주 상무대 시설 공사, 강원도 양양·충북 영동 군 시설, 국립묘지 토목 공사, 인천만 수호안 축조 공사 등 관급 공사를 계속해서 수주했다. 창립 10주년인 1990년 수주 180억원을 돌파했다.
◇휴게소 변기 직접 손으로 닦아
고속도로 휴게시설은 대보그룹의 주요 사업 분야 중 하나다. 1995년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입찰에 나온 고속도로 휴게소 56곳 중 옥산휴게소를 처음 낙찰받았다. 지금은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 36곳, 주유소 30곳을 운영한다. 최 회장은 화장실부터 바꿨다.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이 지금처럼 깨끗해진 건 그가 기여한 바가 크다.
-맨손으로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변기를 닦았다는 일이 유명하다.
“옥산휴게소를 인수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너무 더러워 깜짝 놀랐다. 일본은 놀랍도록 휴게소 화장실이 깨끗해서, 화장실은 그 나라 수준을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직원들에게 지시해도 ‘공중 화장실은 더러울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이 깨지지 않더라. 솔선수범한다는 마음으로 맨손으로 변기를 닦았다. 그제야 화장실이 깨끗해졌다. 소문이 나면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도로공사 사장이 ‘옥산휴게소 화장실에서 식사 한번 하자’고 농담하기도 했다(웃음).”
올해 창립 42주년을 맞은 대보그룹은 2000년 국내 10대 골프장으로 꼽히는 서원밸리, 2002년 코로나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 명부 시스템을 구축한 IT 기업 대보정보통신을 인수하며 중견 그룹의 면모를 갖췄다.
최 회장은 “기업 활동을 통해 나오는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지속 성장의 원동력”이라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나눌까 궁리한다”고 했다. “2001년 여름 가뭄 때 서원밸리에서 확보한 물을 주변 농가에 공급했습니다. 그린콘서트는 또 다른 나눔 방법이었고요.”
훔쳐 먹은 우유 한 봉지를 이토록 크게 불려서 사회에 되돌려주게 될 줄은 그 스스로도 몰랐을 것이다.
[김성윤 음식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