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닭꼬치집, 20년 생태탕집… 靑春, 아재 맛집에 빠지다
세월을 맛보는 기쁨에 눈뜬 2030
을지로 노가리골목·보광동… 낡고 때묻고 허름할수록 열광
"거기가 노포예요? 뉴플이 아니고요(웃음)?" 미국 뉴욕에서 10년쯤 살다 최근 한국에 들어온 디자이너 강한나(33)씨는 얼마 전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서울 마포 용강동에 있는 40년 된 중국집에서 했다. 그에게 "새로 생긴 곳도 많은데 왜 아저씨들이나 가는 노포에서 파티를 했느냐" 묻자 강씨는 "오래된 곳일수록 내게는 새롭게 느껴진다"고 했다. "일부러 예쁘게 만든 곳은 전 세계 어디나 다 있잖아요. 반면 전통과 세월을 품은 식당은 어딜 가나 귀해요. 아저씨들이 찾는 맛집이 알고 보면 진짜인 거죠!"
낡고 허름한‘아재 식당’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다. 지난 8일 서울 필동의 꼬치집‘필동분식’에서는 20대 직장인 이다겸·최지웅씨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남강호 기자 |
12일 서울 서교동의 30년 된 족발집 ‘마산족발’에도 20대 손님들이 모여 앉았다. /이태경 기자 |
'아재 맛집'이 최근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에겐 을지로가 브루클린이고 보광동이 쇼디치다. 낡고 때 묻고 허름할수록 열광한다. 연남동·입정동·초동·회기동·노고산동·도선동 같은 곳을 돌며 구석구석 오래된 맛집을 찾아내는 것을 보물찾기처럼 즐긴다. 오래된 것(retro)을 새롭게(new) 즐기는 '뉴트로' 현상의 하나. 나아가선 외국보다 서울의 맛과 멋이 못할 것이 없다는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다.
아재 맛집, 성지(聖地)가 되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필동이 세차게 내리는 빗물에 잠겼다. 직장인 최지웅(27)씨는 "이런 날엔 여길 가야 한다"면서 30년 넘었다는 닭꼬치집을 찾았다. 테이블이 6개밖에 없는 가게는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최씨는 "사진 찍는 게 취미인데 서울의 풍경은 매번 바뀌더라. 조만간 없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포를 돌기 시작했다. 사진으로 역사를 남기는 즐거움, 세월을 맛보는 기쁨이 있는 데다, 값도 싸고 맛도 좋다. 진짜 소확행"이라고 했다. 사장 이정심(65)씨는 "요즘 들어 젊은 손님들이 계속 몰려와 감당이 안 된다"고 했다. "아니 다들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거죠?"
최근 인스타그램에서‘아재맛집’으로 소문 난 서울 을지로의 생태집‘세진식당’. /이태경 기자 |
아재 맛집은 보통 비좁고 낡은 골목에 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가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곳이 대부분. 10~20대에겐 그 점도 매력 포인트다. 대학원생 김별(27)씨는 "찾기 힘든 곳일수록 발견하는 쾌감이 있다"고 했다. "남들이 모르는 곳을 찾아내려면 이 정도 고생은 감수해야죠. 구석에 있을수록, 간판이 낡아서 잘 안 보일수록 더 맘에 들어요." 어렵게 찾아낸 곳을 인증샷 찍어가며 자랑하는 건 수순. 인스타그램에서 '#노포'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뜨는 게시물만 4만7000여 개. '#노포맛집' '#노포투어' 같은 키워드로도 수백 개씩 검색된다. 김씨는 "'#안알려줌'이란 검색어도 좋아한다"고 했다. "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맛집이란 뜻이잖아요. 보통 위치 태그도 안 돼 있는데 그걸 보고 역추적해서 식당을 찾아낼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외국인들도 아재 맛집
10~20대에게 아재 맛집은 한번 오면 계속 오고 싶어지는 테마파크처럼도 인식된다. 을지로3가는 '을삼'이라고 줄여 부르고, '만선호프' 등으로 유명한 을지로 노가리골목은 독일 옥토버페스트보다 낫다는 뜻으로 '을페'라고 칭하며 놀러다닌다. 강한나씨는 "진짜(authentic)를 한번 맛보고 나면 나머지는 시시해 보이는 것 아니냐"고 했다.
한국을 찾는 10~20대 일본·중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한국의 아재 맛집은 화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샤이니의 멤버 종현이 자주 갔다는 서울 서교동 오래된 족발집은 요즘 일본 팬들이 찾아와 '울면서 먹는' 맛집이다.
'술 먹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서울 을지로 한 생태탕집, 간재미무침이 유명한 익선동 한 식당 역시 최근 젊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송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