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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by 조선일보

20년 전, 한국에 월드컵 4강을 안긴 그 선수가 아직도 뛰고 있습니다

몇 년생인지 묻는 말에 “2002년생이요”란 답이 돌아오면 조금 나이가 있는 분들은 입이 근질거릴 겁니다. 근데 그 순간 2002년생의 반격이 돌아올 때가 있습니다.

“지금 월드컵 얘기하시려는 거죠?”

몇 년생인지 밝힐 때마다 월드컵 얘기를 들어야 하는 건 어쩌면 우리나라 2002년생들의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안 하려고 하는데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전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 민국!’을 외쳤던 2002 한·일월드컵이 열린 지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시간 참 빠르다’란 상투적인 말이 절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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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 월드컵에서 승부차기 실축을 한 뒤 머리를 감싸쥔 호아킨의 모습. 그는 이날 최고 활약을 펼쳤지만, 승부차기를 성공하지 못하며 쓸쓸히 짐을 싸야 했다. / 조선일보DB

◇ 모두가 기억하는 그때 그 장면

호아킨 산체스란 이름을 혹시 기억하시나요? 대부분은 “누구?” 라고 하겠지만, 부연 설명을 듣는다면 분명히 ‘아~ 그 선수!’라고 하실 분들이 많을 겁니다.


2002년 6월 22일. ‘빛고을’ 광주에선 월드컵 8강전이 열렸습니다. 안정환의 골든골로 16강에서 이탈리아를 꺾으며 세계를 놀라게 한 히딩크호는 8강에서 또 다른 유럽 강호 스페인을 만납니다.


이날 가장 돋보였던 스페인 선수가 바로 호아킨이었습니다. 등번호 22번을 단 앳된 얼굴의 스물한 살 오른쪽 윙어는 한국의 왼쪽 측면을 종횡무진 헤집으며 골에 가까운 장면을 여러 차례 만들어 냈습니다.


호아킨은 연장 전반 2분 그림 같은 크로스를 올려 모리엔테스의 헤딩 골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런데 부심은 크로스가 골라인을 넘어갔다며 아웃을 선언했죠. 스페인에선 지금도 이 아웃 판정은 말이 안된다며 “골을 도둑 맞았다” “한국이 심판을 매수했다”는 등의 주장이 나오곤 합니다. 어쨌든 정말 호아킨에게 정신없이 당한 경기였습니다.


그래도 실점 없이 버텨낸 한국은 경기를 승부차기로 어렵게 끌고 갔습니다. 미국전에서 이을용,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이 페널티킥을 놓쳤던 한국은 다행히 이번 승부차기에선 백발백중이었습니다. 황선홍과 박지성, 설기현, 안정환이 차례로 골망을 갈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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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8강전 당시 호아킨과 이을용. 호아킨의 측면 돌파에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 AFP

그리고 스페인의 4번 키커가 나섰습니다. 바로 호아킨이었죠.


축구에선 흔히 정규시간의 영웅이 승부차기를 놓치며 역적이 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그도 그랬습니다.


공을 차기 전에 잠시 멈칫한 호아킨이 날린 슛은 골키퍼 이운재에게 가로막히고 말았습니다. 2002 월드컵에 열광했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이운재가 씩 웃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한국은 5번 키커 홍명보가 골망을 가르며 역사적인 ‘4강 신화’를 달성합니다. 준결승 진출을 눈앞에 두고 좌절을 맛본 호아킨은 “그날 밤에만 승부차기 장면을 3만번쯤 떠올렸다”고 하네요.


호아킨은 2006 독일월드컵을 끝으로 부상과 부진 등이 겹치며 메이저 대회에 더는 스페인 대표로 나서지 못했습니다. 호아킨이 없는 스페인은 유로 2008과 2010 남아공월드컵, 유로 2012를 연속해서 제패했죠. 2002 월드컵의 실축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을 호아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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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스 입단 초기 시절의 호아킨. 곧 두각을 드러내며 20대 초반 나이에 베티스 최고 스타로 올라섰다. / 트위터

◇ 친정팀에 돌아온 낭만의 스타

그 호아킨은 20년이 흐른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아직도 필드 위에 있습니다.


당시 월드컵에 나섰던 ‘태극 전사’ 23명은 모두 유니폼을 벗었는데 호아킨은 여전히 축구 선수로 잔디를 밟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여정에 또 낭만이 가득합니다.


세비야 근처 바다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호아킨은 열여섯살이던 1997년, 자신의 고향 팀이라 할 수 있는 레알 베티스 유스 팀에 입단했습니다. 2000년 프로에 데뷔한 그는 주머니 속 송곳처럼 곧 두각을 나타내며 중하위권의 작은 클럽 베티스에 큰 영광을 선물했습니다.


2004-2005시즌 호아킨은 어시스트 15개로 도움왕에 오르면서 베티스를 라 리가(스페인 1부 리그) 4위에 끌어올렸죠. 호아킨의 활약 덕분에 베티스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는 업적을 이뤘습니다. 그 시즌에 베티스는 코파델레이(국왕컵) 우승 트로피도 들어 올렸죠. 찬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20대 초반에 베티스의 전설로 우뚝 선 그에게 빅클럽의 러브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호아킨은 첼시 등 명문 클럽의 제안을 뿌리쳤지만, 돈이 많지 않은 베티스가 그를 계속 붙잡고 있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호아킨은 스페인 발렌시아로 향합니다. 그는 베티스를 떠나며 “저는 영원한 베티코(베티스 팬)”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호아킨은 발렌시아를 거쳐 스페인 말라가와 이탈리아 피오렌티나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어느덧 30대 중반, 축구 선수 인생의 황혼기를 향해 달려가는 그에게 중동과 중국이 돈다발을 흔들며 달려들었습니다.


하지만 호아킨은 “한 번도 돈 때문에 축구를 한 적이 없다”며 2015년 베티스의 초록 줄무늬 유니폼을 다시 입었습니다. 가난한 고향 팀을 위해 연봉을 절반 이상 자진 삭감했지만, 그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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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국왕컵 정상에 오른 뒤 우승 트로피를 번쩍 든 호아킨. 베티스 주장인 그의 생애 세 번째 국왕컵 우승이었다. / AFP 연합뉴스

◇ 마흔하나에 다시 우승컵을 들다

호아킨은 돌아와서도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2017-2018시즌엔 스페인 일간지 AS가 선정한 시즌 베스트11에도 뽑혔습니다. 국내 해외 축구 팬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된 ‘그아호(그래도 아직은 호아킨)’란 말이 나올 만한 활약이었습니다.


그는 2019-2020시즌엔 10골을 넣었습니다. 당시 아틀레틱 빌바오와 16라운드에서 해트트릭을 터뜨렸는데 이는 자신의 커리어 첫 한 경기 3골이자 라 리가 레전드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기록을 깬 최고령 해트트릭(38세 140일)이었습니다.


호아킨은 다음 시즌인 2020-2021시즌엔 베티스 유니폼을 입고 461번째 경기에 나서며 팀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그가 가는 길이 곧 베티스의 역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이번 시즌. 라 리가 데뷔 20주년을 맞은 호아킨은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됐고, 필드보다는 벤치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정신적 지주로 베티스의 버팀목이 되어준 그는 팀이 국왕컵 결승에 오르며 다시 우승 기회를 잡습니다.


발렌시아와 맞붙은 결승전. 1-1로 맞선 후반 86분 교체로 들어간 호아킨은 특유의 드리블로 5명을 뚫어내며 반칙을 유도하는 등 번뜩이는 움직임을 선보였습니다. 우승은 승부차기로 결정하게 됐고, 호아킨은 2번 키커로 나섭니다.


호아킨의 킥은 상대 골키퍼의 손을 스쳤지만, 결국은 골문에 꽂힙니다. 베티스의 5-3승리. ‘캡틴’ 호아킨은 우승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그는 우승 소감을 말하며 2002 월드컵 얘기를 꺼냈습니다.

“승부차기를 하기 전 20년 전 한국전이 생각났어요. 공이 들어갔을 때 전 굉장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천하의 호아킨도 그 실축에 대한 아픈 기억은 영원히 잊히지 않나 봅니다.


당초 은퇴 의사를 밝혔던 호아킨은 결국 다음 시즌에도 뛰기로 했습니다. 그는 베티스와 1년 재계약을 맺으며 유럽 5대 1부 리그(잉글랜드·스페인·독일·이탈리아·프랑스)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선수가 됐습니다. 라 리가에서 597경기를 뛴 호아킨은 골키퍼였던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보유한 최다 출장 기록(621경기) 경신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호아킨은 2002년의 추억을 붙잡고 싶어하는 한국 팬들에겐 여전히 반가운 이름입니다. 당시 한국에 4강을 ‘선물’했던 선수가 변함없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이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네요. 네, 그래도 아직은 호아킨입니다.


[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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