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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희소병 딛고 다시 뛴 이봉주, 그 뒤엔 또다른 이봉주들 있었네

완주할 때 110명이 뒤에서 격려

희소병 앓던 사람들 많아

젊은 팬도, 친구 아들도 함께 해

이봉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돼. 잊지 않겠다”

근육 긴장 이상증을 앓고 있는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씨가 2021년 11월 28일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이봉주 쾌유 기원 마라톤'에 참가해 페이스메이커들과 결승선을 향해 달리고 있다. 이봉주씨는 마지막 1.2㎞ 구간을 뛰어 결승선을 통과했다./이덕훈 기자

“이봉주 선수를 응원하러 왔는데, 도리어 위로를 받고 가네요.”


28일 오전 9시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이봉주쾌유기원마라톤’. 지난해 1월부터 원인 모를 병으로 허리를 똑바로 펴지 못하는 희소병을 앓고 있는 이봉주가 약 23개월 만에 1.2km를 뛰는 데에 성공했다. 10분1초라는 기록은 현역 시절에 비하면 너무 길었지만, 이봉주는 여느 대회보다 밝게 웃었다. 처음에는 혼자 뛰던 이봉주가 결승선을 통과할 때는 그의 등 뒤로 110명이 같이 뛰면서 ‘이봉주 파이팅!’이라고 계속 외쳐 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110명이 ‘이봉주 쾌유 기원 마라톤’에 참가하러 이날 부천종합운동장을 찾았다. 110명이 1⋅2조로 나뉘어 4㎞씩 뛰고, 이봉주가 마지막 1.2㎞를 뛰었다.


희소병을 앓고 있거나, 앓았던 이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대회 전날 밤에 전남 무안에서 올라왔다는 카페 사장 오영복(40)씨는 6년 전부터 척추소뇌변성증을 투병 중이다. 소뇌가 쪼그라들면서 걷고, 달리고, 균형을 잡는 모든 일이 힘들어지는 병이다. 아직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 아내 장미(41)씨와 최근 카페를 개업한 오씨는 커피를 만들 때도 잔뜩 땀을 흘리고 컵에 담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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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완주한 오영복(40)씨를 끌어안으며 격려하는 이봉주. /연합뉴스

오씨는 이봉주의 이야기를 듣고 아픔을 나누기 위해 상경했다. 그는 “병을 앓으면 마음도 상처를 많이 받는다”며 “그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이날 이봉주는 굽은 허리로 결승점에서 오씨를 기다렸다. 오씨가 1조 맨 마지막으로 들어오자 그의 두손을 꼭 붙잡았다. 오씨는 “이봉주 선수가 손을 잡자마자 ‘잘 뛰었다’ ‘고맙다’라고 하더라”며 “투병 중에 정말 안 좋은 생각도 수차례 들었는데, 응원하러 와서 오히려 힘을 받고 간다”고 했다.


2조 맨 마지막으로 완주에 성공한 장경문(65)씨는 척추 협착 질환, 심장병, 패혈증 등으로 수년간 걷지 못했다. 낙담하지 않고 꾸준히 재활한 끝에 지금은 10km를 뛸 수 있을 정도로 몸을 다시 끌어올렸다. 장씨는 “보통 사람인 나도 해냈다는 걸 보여주러 왔다. 이런 병을 앓다 보면 언젠가 몸이 희망의 목소리를 보낼 때가 온다. 의지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이봉주씨니까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지면 곧 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 영등포에서 온 이상철(30)씨는 어릴 적 이봉주의 ‘봉달이’라는 별명에 친근감을 느껴서 지금까지 팬으로 지냈다. 그러던 중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도울 길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대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 그는 운동장에 1시간 일찍 도착해 얼어 있는 손으로 이봉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A4지 한장 가득 썼다. ‘오랜 시간 팬이었습니다’ ‘뭉쳐야 찬다’에서 유쾌한 모습도 너무 좋았습니다’ 등 애정이 어린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봉주가 23개월만에 다시 뛸 때 양 옆에서 함께한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 임춘애(52)씨의 두 쌍둥이 아들. /이덕훈 기자

달리던 이봉주의 옆에는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52)의 두 아들 이지우, 이현우(21)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달리던 중 쌍둥이 형제가 “세계적인 선수와 뛰어서 영광”이라고 하자 이봉주가 “너희 어머니가 더 훌륭한 선수”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지친 이봉주가 잠시 걸을 때는 두 형제가 몸을 받쳐 줬다. 어릴 적부터 이봉주가 많이 예뻐하던 형제라고 한다. 이지우씨는 “어릴 때부터 봉주 아저씨랑은 많이 놀았다”며 “금방 나아서 다시 그때처럼 재밌는 이야기 주고받길 바란다”고 했다. 이봉주가 달리던 중 ‘천천히 가!’ ‘뛰지마!’를 수차례 외친 임춘애씨는 “봉주 몸 상태가 아직 안 올라온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한 것 아닌가 걱정”이라며 “의지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고 했다.


이봉주가 완주를 마친 뒤 의자에 앉아 있던 송은주(51)씨는 “너무 많이 울었다”며 “마음이 아픈데, 봉주가 너무 자랑스럽다”라고 했다. 이봉주의 실업팀이었던 코오롱에서 수영 선수를 지냈던 송씨는 지난 세월 동안 이봉주와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이봉주는 완주를 마치고 “오늘은 정말 이봉주가 다시 태어난 날이 될 것 같다. 작년 초부터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뛴 적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걱정스럽고,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오늘 오신 여러분의 응원과 걱정이 앞으로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것 같다. 추운데 멀리 오셔서 건강을 기원해주신 여러분의 마음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이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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