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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혜경궁 홍씨가 남편을 궁지에 빠트린 女人이라고?

유석재 기자의 돌발史전

"남편의 약점을 정적(政敵)인 친정에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지 않았는가?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그녀도 책임이 있다." "아들이 외가를 공격하자 변명하기 위해 죽은 남편을 미친 사람으로 몬 책이 '한중록(閑中錄)' 아닌가?"

한때 '한(恨)의 여인'에서 '악녀'로 평가가 곤두박질쳤던 인물이 있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헌경왕후·1735~1815)다. 세상이 부러워한 세자빈이었으나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는 끔찍한 사건을 겪었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의 와중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란 정치적 해석이 대두하면서 '노론의 딸'인 혜경궁 홍씨도 의혹의 대상이 됐다. 여기에도 최근 반론이 제기된다. 정병설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살인까지 저지른 사도세자의 광증은 '한중록'뿐 아니라 '영조실록' 등 공식 문헌에도 기록된 사실이며 ▲'한중록'의 주요 부분은 친정을 핍박한 아들 정조가 아니라 손자인 순조 때 쓴 것이므로 정치적 변명으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혜경궁 홍씨가 남편을 궁지에 빠트린

영화 ‘사도’에서 남편이 뒤주에 갇히는 변고를 맞은 혜경궁 홍씨(문근영)가 세손을 끌어안는 장면. /쇼박스

팔십 평생 혜경궁이 겪은 고초는 대하드라마급이다. 첫아들 의소세손은 두 돌도 되기 전에 잃었다. 폭력과 외도를 일삼은 남편 때문에 결혼 생활이 파탄 났는데, 그가 학질에 걸리자 "차라리 그 병으로 죽었으면…"이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이번엔 친정이 쑥대밭이 됐으며, 그 아들마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자신보다 열 살 어린 시어머니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자 동생 홍낙임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됐다. 이때 혜경궁은 정순왕후에게 항변한다. "너무 이리 마소서!" 일생의 한을 농축한 피맺힌 토로였다.


하지만 혜경궁은 '오래 살아남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임을 증명하는 인물이 된다. 1805년(순조 5년) 정순왕후가 죽자 궁중 최고 어른 자리에 올라 생애 마지막 10년을 비로소 숨 편히 쉬며 지낼 수 있었다. 분명한 건, 혜경궁이 굴곡진 삶 속에서도 아들을 왕다운 왕으로 키워낸 어머니였고, 품격 높은 문체로 조선시대 회고 문학의 걸작을 쓴 예술가였다는 사실이다. 며칠 새 '혜경궁'이란 이름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뉴스에 숱하게 등장하는 걸 무덤 속 그녀가 본다면 매우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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