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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by 조선일보

행복은 지명 순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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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드래프트에서 꼴찌로 지명된 브록 퍼디는 주전 쿼터백의 부상으로 선발을 꿰찬 다음 눈부신 활약으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고공 행진을 이끌며 신데렐라 스토리를 쓰고 있다. /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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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카타르월드컵이 리오넬 메시의 대관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전 세계 축구 팬들을 열광에 빠뜨린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인데요. 그동안 월드컵을 보느라 좀 소홀했던 미국 스포츠에 다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미국의 최고 인기 스포츠는 단연 NFL(미프로풋볼)입니다. 특히 요즘은 플레이오프 진출을 위한 레이스가 치열하게 펼쳐질 때라 더욱 열기가 뜨거운데요.


그 중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고 있는 선수가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루키 쿼터백 브록 퍼디(23)입니다.


올 시즌이 막을 올릴 때만 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퍼디는 어떻게 NFL에서 가장 핫한 쿼터백이 됐을까요? 무엇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는 점이 지금 퍼디에게 쏟아지는 관심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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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NFL 드래프트에서 맨 마지막 지명자를 발표하는 멜리사 살라타(왼쪽) 'Irrelevant week' CEO. / 트위터.

◇ 꼴찌를 위한 이벤트가 있다?

NFL엔 ‘Mr.Irrelevant’란 말이 있습니다. ‘미스터 무관심’ ‘논외의 사나이’ ‘상관없는 남자’ 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 텐데 NFL 드래프트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지명되는 선수를 뜻하는 말입니다.


드래프트는 미국 프로 스포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입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신인 선수들을 모아 구단이 순번대로 선수를 선택해 계약하는 시스템을 의미하죠.


미국 프로 스포츠에 영향을 받은 KBO리그와 KBL 등 한국의 대부분 리그가 드래프트 제도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반면 유럽에 기반을 둔 축구에선 드래프트를 찾아보기 어렵죠.


북미 4대 스포츠인 NFL과 MLB(미프로야구), NBA(미프로농구), NHL(북미아이스하키리그)는 드래프트를 성대하게 개최합니다. 리그 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이벤트입니다.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을 받은 선수는 그 영광이 커리어 내내 따라다닙니다. 선수 소개 시간에 그 부분이 강조되죠. 물론 1순위에 걸맞지 않은 실력으로 조기에 퇴출당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드래프트 데이’를 보면 드래프트에 대해 감을 잡기가 쉬울 겁니다. 좋은 루키를 차지하기 위한 구단 수뇌부들의 두뇌 싸움이 스포츠 본 게임 못지않게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1936년부터 열린 NFL 드래프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드래프트입니다. 매년 4월 말에 펼쳐지는데 미국 최고 인기 스포츠답게 사흘간 열리는 모든 과정이 TV로 생중계되죠.


NFL 드래프트는 32팀이 각각 한 라운드에 한 명씩 1~7라운드를 통해 선수를 지명합니다. 즉 224명이 지명되는데 드래프트 보상 등으로 편차가 발생합니다. 2022 NFL 드래프트의 경우 262명이 지명됐고요.


앞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올해 드래프트에선 262번째로 선택된 선수가 마지막 지명 선수가 됐고, 그에게 ‘Mr.Irrelevant’란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바로 아이오와 주립대를 나온 쿼터백 퍼디였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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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포트 비치에서 열린 'Mr.Irrelevant' 행사에 참석한 퍼디 가족. 262번째 선수란 의미로 유니폼에 '262'가 박혀 있다. / 유튜브 캡처

참고로 ‘Mr.Irrelevant’는 지명을 받는 행사가 따로 있습니다.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와이드리시버로 뛰었던 폴 살라타가 1976년부터 캘리포니아주 뉴포트 비치에서 NFL 마지막 지명자에게 ‘Mr.Irrelevant’란 타이틀을 붙여주고 이를 조명하는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2014년부터는 그의 딸인 멜리사가 지명자 발표 등 행사를 맡고 있죠.


‘Mr.Irrelevant’에겐 나름 혜택도 있습니다. 지명자와 그의 가족들은 캘리포니아주의 휴양지인 뉴포트 비치에서 1주일을 보낼 수 있는 초대장을 받습니다. 매년 바뀌긴 하지만 디즈니랜드 방문과 골프 토너먼트 참가 등의 특전이 주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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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우스먼 트로피. / 트위터

대학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되는 ‘하이스먼 트로피(Heisman Trophy)’를 본뜬 ‘로우스먼 트로피(Lowsman Trophy)’도 받습니다. 트로피 모양은 얄궂게도 선수가 공을 더듬거리며 놓치는 장면을 형상화했습니다. 참으로 유쾌합니다.


퍼디도 지난 6월 ‘Mr.Irrelevant’ 행사에 참석해 성대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비록 꼴찌로 지명을 받았지만, 서핑을 즐기는 등 이벤트를 만끽하며 “즐거운 시간”이라며 활짝 웃었습니다. 행사를 주관한 ‘Irrelevant Week’의 최고경영자 멜라니는 경매 행사 등으로 5만달러 이상을 모금했고, 이를 청소년 단체 등에 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Mr.Irrelevant’ 중엔 NFL에서 꽤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들이 제법 있습니다. 마티 무어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서 뛰며 1997년 ‘Mr.Irrelevant’로는 처음으로 수퍼볼에 진출했고, 2002년엔 첫 우승의 감격도 맛봤습니다.


NFL 무대에서 14시즌째 뛰는 정상급 키커 라이언 서컵도 2009년 드래프트에서 가장 마지막인 256번째에 지명된 선수입니다. 지난해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에서 톰 브래디와 함께 수퍼볼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 막차로 통과한 드래프트

다시 퍼디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미스터 무관심’ 퍼디는 대학 시절 꽤 잘한 쿼터백이었습니다.


근데 주전으로 도약한 데는 운이 좀 따랐습니다. 고교 1학년 때까진 야구를 하다가 2학년 때 미식축구로 주종목을 바꾼 그는 아이오와 주립대학 신입생 때 팀의 3번째 쿼터백으로 주로 벤치를 지키다가 주전 쿼터백이 다치고 두 번째 쿼터백마저 실력 부족으로 전력에서 제외되자 출전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선발를 꿰찬 퍼디는 4년 내내 주전 자리를 지키며 패싱 시도(1461개), 패싱 성공(993개), 터치다운 패스(81개) 등 각종 부문에서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기록을 세웠죠.


그는 2020년과 2021년 ‘Big-12′ 컨퍼런스에서 2년 연속 퍼스트팀에 선발됐기도 했습니다. ‘Big-12′는 텍사스 대학교와 오클라호마 대학교 등이 속해 있는 컨퍼런스로, 2010년대 들어 네브래스카와 텍사스 A&M 등이 다른 컨퍼런스로 이적하면서 위상이 조금 약해졌죠.


퍼디는 ‘Big-12′에선 제법 날렸던 쿼터백이었지만, 미 전역엔 잘하는 쿼터백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쿼터백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키(184cm)에 기복 있는 플레이도 약점으로 꼽혔고요. 전국구 스타와는 거리가 멀었던 퍼디는 결국 막차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지명을 받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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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황금기를 이끈 조 몬태나. / 트위터

◇ ‘명가’의 주전 기회를 잡은 풋내기

수퍼볼 통산 5회 우승을 자랑하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는 NFL에서 알아주는 ‘명가’입니다. 특히 수퍼볼 4회 정상(1982·1985·1989·1990·이하 수퍼볼 개최 연도 기준)에 빛나는 레전드 쿼터백 조 몬태나의 팀으로 유명하죠. 하지만 포티나이너스는 몬태나와 스티브 영(1995년 수퍼볼 우승) 이후엔 팀을 우승으로 이끈 쿼터백을 갖지 못했습니다.


2013년 포티나이너스는 쿼터백 콜린 캐퍼닉을 앞세워 수퍼볼 우승에 도전했지만, 볼티모어 레이븐스에 밀려 고배를 마시죠. 캐퍼닉은 2016년 경기를 앞두고 미국 국가 연주 때 “인종차별을 하는 나라를 위해 일어나고 싶지 않다”며 무릎을 꿇었는데 이 행위가 미국 내에서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 일으켰고, 논란의 주인공이 된 그는 결국 실력 저하와 함께 NFL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포티나이너스는 2020년 수퍼볼에서 다시 우승 사냥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포티나이너스의 쿼터백 지미 가로폴로가 패트릭 마홈스(캔자스시티 치프스)와의 쿼터백 대결에서 완패를 당하며 또 한 번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가로폴로는 올 시즌에도 포티나이너스의 주전 쿼터백으로 나설 예정이었습니다. 그동안 나쁘지 않은 성적을 올렸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팀을 정상에 끌어올릴 엘리트 쿼터백이란 평가는 받지 못했던 가로폴로는 어깨 부상으로 개막 선발 명단에 들지 못합니다.


포티나이너스는 2021년 드래프트 1라운드(전체 3순위)에서 뽑은 트레이 랜스를 주전 쿼터백으로 기용합니다. 첫 경기에서 터치다운 패스 2개로 나름 선전한 랜스는 시애틀 시호크스와 벌인 시즌 두 번째 경기에서 발목 골절로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포티나이너스는 어깨가 좋지 않은 가로폴로를 다시 주전으로 기용합니다. 다행히 가로폴로는 좋은 경기력으로 팀을 NFC(내셔널콘퍼런스) 서부지구 1위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부상의 악령은 또 포티나이너스를 찾아왔습니다. 가로폴로는 지난 5일 마이애미 돌핀스전에서 0-7로 뒤진 1쿼터 초반 심한 다리 부상을 당하며 경기장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제 팀에 남은 쿼터백은 ‘미스터 무관심’ 퍼디였죠.


퍼디 입장에선 팀 쿼터백들의 부상이 거듭되며 찾아온 절체절명의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마치 대학 시절처럼 기회는 생각지도 않던 순간 찾아왔습니다.


긴장할 법도 한데 그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1쿼터 4분여를 남기고 터치다운 패스로 승부를 10-7로 뒤집죠. 역대 ‘미스터 무관심’이 기록한 첫 터치다운 패스였습니다.


퍼디는 2쿼터 종료 4초 전에도 터치다운 패스를 추가하며 팀의 17-10 리드를 이끌었습니다. 결국 포티나이너스는 퍼디의 활약에 힘입어 33대17로 승리했습니다. 퍼디의 아버지 숀은 이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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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브래디는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서 6번의 수퍼볼 우승을 경험했다. / AP연합뉴스

◇ ‘미스터 무관심’, 전설을 만나다

돌핀스전 승리를 통해 깜짝 스타로 떠오른 퍼디는 지난 12일, 다음 경기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납니다. 톰 브래디. 네, NFL 역대 최고 선수인 GOAT(Greatest Of All Time), 그 톰 브래디입니다.


NFL을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 브래디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명실상부한 역대 최고 선수입니다. 무려 7개의 우승 반지를 끼었죠.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서 6번(2002·2004·2005·2015·2017·2019), 현 소속팀인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에서 1번(2021) 수퍼볼 정상에 올랐습니다. NFL 역대 최다 우승팀이 패트리어츠와 피츠버그 스틸러스(이상 6회)인데 브래디가 그보다 한 차례 더 많은 우승을 했으니 전설 중의 전설이라 불릴 만합니다.


브래디는 지난 시즌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가 이를 번복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최근엔 톱 모델 지젤 번천과 이혼하는 아픔을 겪었죠.


그런데 알고 보면 브래디도 대표적인 드래프트 하위 지명자입니다. 미시간 대학 출신인 그는 2000년 NFL 드래프트에서 6라운드 전체 199위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에 지명됐습니다.


NFL 무대에 도전하는 선수들은 드래프트이 열리기 전 일종의 면접인 ‘콤바인’을 거칩니다. 콤바인에선 여러 형태의 테스트를 통해 신체 능력을 점검받게 되는데 브래디는 40야드(약 36.6m) 달리기와 제자리 점프에서 거의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브래디의 40야드 달리기 기록(5.28초)은 이후 NFL에서 뛴 쿼터백을 통틀어 가장 느린 기록으로 남아 있죠.


브래디는 신체 능력의 약점을 ‘강심장’으로 극복했습니다. 드래프트 당시 로버트 크래프트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구단주에게 “저를 뽑으신 건 일생 최고의 선택”이라며 호언장담했던 그는 리그 2년차에 주전 쿼터백 드루 블레드소의 부상으로 선발 자리를 꿰찼고, 담대한 경기 운영을 선보이며 그 시즌에 수퍼볼 정상까지 움켜쥡니다.


승부처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이는 브래디가 가장 빛난 순간은 2017년 수퍼볼입니다. 애틀랜타 팰컨스에 3쿼터 중반까지 3-28로 일방적으로 끌려갔던 패트리어츠는 브래디의 미친 활약에 힘입어 연장 접전 끝에 대역전극을 펼치며 34대28로 승리합니다. 브래디는 다섯 번째 우승을 드라마틱하게 장식하면서 몬태나를 넘어 NFL의 GOAT로 등극하죠.


미식축구는 공격팀과 수비팀이 확실히 나뉘는 등 각자 포지션 역할이 확실한 만큼 쿼터백 혼자 뛰어나게 잘한다고 해서 우승하긴 어려운 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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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수퍼볼에서 우승한 톰 브래디. / USA투데이 연합뉴스

2020년 브래디는 스무 시즌을 뛰며 여섯 번 우승의 영광을 함께했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떠나 지난 12년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 만년 하위팀 버커니어스로 이적합니다. NFL 최고 전략가로 통하는 빌 벨리칙 감독과 여러 차례 우승을 함께 일궈낸 든든한 동료들을 떠나 마흔세 살의 나이에 ‘홀로 서기’에 나선 것이죠.


패트리어츠를 떠나서 잘할 수 있을 까란 의구심을 뒤로하고 브래디는 작년 수퍼볼에서 다시 정상에 섭니다. 그것도 디펜딩 챔피언인 막강 공격력의 캔자스시티 치프스를 꺾는 기염을 토하면서 말이죠. 다섯 번째 수퍼볼 MVP가 된 그는 양대 컨퍼런스에서 우승한 첫 쿼터백이 됐습니다. 그렇게 브래디의 ‘신화’는 ‘현재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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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경기가 끝난 뒤 두 손을 맞잡은 톰 브래디(왼쪽)과 브록 퍼디. / 트위터

◇ 전설을 누르고 승승장구

그런 브래디와 맞붙은 ‘미스터 무관심’ 퍼디는 어땠을까요?


위대한 명성에 위축될 법도 하지만, 퍼디에게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압도했죠.


7-0으로 앞선 2쿼터 시작과 함께 러싱 터치다운을 뽑아낸 퍼디는 이후 27야드, 32야드 터치다운 패스를 잇달아 성공했습니다. 퍼디의 활약에 힘입어 포티나이너스는 전반을 28-0으로 앞섰죠. 일찌감치 승부의 추가 기운 경기는 포티나이너스의 35대7 승리로 끝났습니다.


퍼디는 이날 185패싱야드에 터치다운 패스 2개를 성공하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죠. 그는 브래디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른 쿼터백 중 처음으로 승리를 따냈습니다.


253패싱야드를 던졌지만, 힘없이 패하고만 브래디는 경기가 끝나고 퍼디와 마주친 자리에서 그를 껴안으며 “잘했다. 정말 잘했다. 계속 그렇게 해달라”고 격려했습니다. 브래디가 NFL 드래프트에서 지명됐을 때 퍼디가 겨우 생후 4개월이었던 걸 생각하면 스포츠의 묘미가 또 이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포티나이너스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Mr.Irrelevant’ 퍼디를 ‘Mr. Relevant’(미스터 관심)이라 표현했습니다. 짜릿한 반전이 아닐 수 없었죠.


퍼디의 포티나이너스는 이후에도 거침이 없었습니다. 시애틀 시호크스와 워싱턴 커맨더스를 연이어 물리치며 8연승을 내달렸습니다. 퍼디는 커맨더스를 꺾으면서 데뷔 첫 선발 3경기에서 멀티 터치다운을 기록한 8번째 쿼터백이 됐죠.


그는 안정적인 기량을 유지하며 팀의 고공행진을 이끌고 있습니다. NFL에선 패스 시도와 성공 횟수, 터치다운 기록, 인터셉트를 당한 횟수 등 쿼터백의 종합적인 능력을 집계한 수치인 ‘패서 레이팅(passer rating)’이란 수치가 있는데요. 퍼디는 리그 정상급인 103.2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승4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한 포티나이너스는 1995년 이후 28년 만의 수퍼볼 우승에 도전합니다. 리그 최소 실점 팀일 만큼 막강한 수비력을 자랑하는 포티나이너스가 공격 쪽에서도 퍼디란 날개를 달아 팬들은 그 어느 때보다 기대가 큽니다.


동료들도 퍼디에 찬사를 보냅니다. 두 차례 프로볼(올스타)에 선정된 디펜시브엔드 닉 보사는 “퍼디의 내면 속엔 사나운 개가 있는 것 같다. 그는 정말 터프하다”며 “그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남자”라고 했습니다.


쿼터백을 보호하는 포지션인 레프트태클의 트렌트 윌리엄스는 “퍼디는 마치 15년간 NFL에서 뛴 것 같다”며 “그는 어찌할 바 모르는 루키가 아니다. 리시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당신은 퍼디가 그들에게 욕설을 내뱉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러닝백 크리스티안 맥카프리는 “NFL에서 6년을 뛰면서 느낀 것은 쿼터백은 정말 스마트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루키인 퍼디는 공격을 전개하는 과정도 놀라운데 여기에 그만의 열정을 더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카일 셰너헌 포티나이너스 감독은 “퍼디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여유 있게 플레이했다고 들었다”며 “그는 나와 함께한 쿼터백 중 가장 침착하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퍼디는 “나는 여전히 승리에 목마르다. ‘미스터 무관심’이란 수식어가 붙었지만, 난 항상 최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열정을 잃지 않겠다”고 각오를 밝혔죠.


만약 드래프트에서 꼴찌로 지명된 퍼디가 이번 수퍼볼 정상까지 오른다면, 미국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요? 스포츠를 좋아하는 팬이지만, NFL이 좀 생소한 분들이라면 퍼디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고 다가올 NFL 플레이오프를 즐기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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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드래프트에서 57번째로 지명됐지만, 아르헨티나의 농구 영웅으로 길이 남게 된 마누 지노빌리. / 트위터

◇ 57번째로 이름 불린 아르헨티나 농구 영웅

이쯤 해서 드는 궁금증. 다른 미국 프로 스포츠엔 어떤 신데렐라가 있었을까요?


NBA에선 마누 지노빌리(45)가 대표적인 하위 지명자의 ‘신화’로 꼽힙니다. 아르헨티나의 농구 영웅이죠.


지노빌리는 1999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57순위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지명됐습니다. NBA는 30팀이 두 번씩 선수를 지명하기 때문에 보통 60명으로 끝납니다.


더구나 1999년엔 29팀이라 58명이 지명됐죠. 즉, 지노빌리는 끝에서 두 번째 선수였던 겁니다.


지금이야 루카 돈치치(댈러스 매버릭스)처럼 유럽 무대를 주름잡고 NBA로 진출한 선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NBA가 유럽 리그를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노빌리는 구단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농구 변방으로 취급 받았던 아르헨티나 출신이라 더했죠.


지노빌리는 자신을 지명한 스퍼스와 곧바로 계약하지 않고 이탈리아에서 뛰며 2001·2002년 2년 연속 이탈리아 리그 MVP를 차지합니다. 2001년엔 이탈리아 리그와 컵, 유로리그 챔피언에 오르며 ‘트레블’을 달성하죠.


그 후 NBA 무대를 밟은 지노빌리는 57순위라는 숫자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스퍼스에서만 16시즌을 뛰며 평균 13.3점, 3.5리바운드, 3.8어시스트를 올렸으며 팀이 4차례(2003·2005·2007·2014년) 우승을 거머쥐는 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그의 등번호인 20번은 스퍼스의 영구 결번이 됐죠. 올해엔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도 누렸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빛나는 그의 업적은 2004 아테네올림픽 금메달이죠. NBA 선수들로 팀을 꾸려 ‘나오기만 하면 우승한다’는 미국을 준결승에서 꺾은 뒤 결승에서 이탈리아를 누르며 감격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유로스텝’이란 시그니처 무브로 NBA 무대에 한 획을 그었던 지노빌리는 수많은 남미 출신 농구 선수들의 롤 모델이 됐습니다. 겸양의 표현이긴 했지만, 메시가 ‘지노빌리가 농구의 메시가 아니라 내가 축구의 지노빌리’로 말할 만큼 아르헨티나인들에겐 영웅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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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으로 불렸던 아이제이아 토머스. / 트위터

이 분야에선 ‘작은 거인’으로 유명했던 아이제이아 토머스(33)도 유명합니다. 175cm의 작은 키에도 한때 공격형 포인트가드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2011년 드래프트에서 가장 마지막인 60번째로 지명됐습니다. 전성기는 짧았지만, 올스타에 2회(2016·2017) 뽑히고 2016-2017시즌엔 평균 28.9점 5.9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죠.


그 밖에도 드레이먼드 그린(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전체 35순위), 디안드레 조던(덴버 너기츠·35순위), 데니스 로드먼(이하 은퇴·27순위), 세드릭 세발로스(48순위), 마이클 레드(43순위), 클리포드 로빈슨(36순위) 등이 낮은 순위로 드래프트에 뽑혀 NBA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던 선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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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피아자는 드래프트에서 아주 낮은 순위로 지명됐지만, 리그를 대표하는 공격형 포수로 꽃을 피웠다. / 트위터

◇ ‘아빠 찬스’로 들어와 명예의 전당까지

MLB 드래프트는 다른 미국 프로 스포츠에 비해 규모가 굉장히 큽니다. 2019년까지는 40라운드라는 큰 규모로 진행되다가 작년부터 20라운드로 대폭 줄였습니다. 많은 선수를 필요로 하는 종목 특성과 워낙 깊은 선수층이 더해져 이런 대규모 드래프트가 가능해진 거죠.


그래서 다른 종목에 비해 유독 하위 라운드에 지명을 받고 MLB 무대에서 반전의 기적을 쓴 스타들이 많습니다. 올드 팬이라면 박찬호와 LA 다저스에서 배터리를 자주 이뤘던 마이크 피아자(54)를 기억하실 겁니다.


피아자는 자동차 판매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던 아버지의 바람으로 야구를 했지만, 실력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도저히 드래프트에 지명될 수준이 아니었는데 아버지가 LA 다저스 감독인 토미 라소다와의 친분을 통해 엄청나게 낮은 순위인 62라운드 지명으로 다저스에 겨우 밀어 넣었습니다. 지명 순위로는 무려 1390번째였죠.


그런데 피아자가 역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성장한 것입니다. LA 다저스와 뉴욕 메츠에서 주로 활약하며 12차례 올스타에 뽑혔고, 통산 427홈런에 1335타점을 올렸습니다.


통산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일반적인 보통 선수, 즉 대체 수준의 선수와 비교해 해당 선수가 얼마나 팀 승리에 기여 한지를 나타내는 데이터)은 59.6에 달하죠. 수비력에서 비판이 나오긴 했지만, 꾸준히 포수 마스크를 쓴 채 체력적인 부담을 견뎌내며 일궈낸 기록이라 더욱 찬사를 받습니다.


‘낙하산 지명자’라는 오명을 씻고 리그를 대표하는 공격형 포수로 이름을 남긴 그는 2016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그의 등번호 31번은 메츠에서 영구 결번이 됐고요.


피아자 외에도 MLB엔 낮은 순위로 지명을 받았지만, 보란 듯이 성공한 선수가 많습니다. 20시즌을 뛰며 219승을 올린 케니 로저스(58세·39라운드 816번)와 14년 연속 10승·200이닝을 기록한 마크 벌리(43세·38라운드 1139번)가 유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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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그리피 시니어(오른쪽)과 주니어 부자. 아버지는 낮은 순위에 지명돼 좋은 활약을 펼친 한편 아들은 1순위로 이름이 불린 뒤 기대대로 수퍼스타가 됐다. / 트위터

신시내티 레즈 시절 ‘빅 레드 머신’의 일원으로 활약한 켄 그리피 시니어(72)도 드래프트 때만 해도 29라운드 682번으로 지명 받을 정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반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들 켄 그리피 주니어(53)는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시애틀 매리너스의 유니폼을 입었고, 기대대로 수퍼스타로 성장했죠.


올 시즌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지휘봉을 잡고 73세에 지도자로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본 더스티 베이커도 1967년 드래프트에서 26라운드(504번)에 지명됐습니다. 감독으로 유명하지만, 선수 시절에도 올스타 2회, 실버슬러거 2회, 골드글러브 1회 등 준수한 활약을 펼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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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특급 선발 3인방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던 존 스몰츠. / 조선DB

그레그 매덕스(56), 톰 글래빈(56)과 함께 1990년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특급 선발 3인방으로 명성을 떨쳤던 존 스몰츠(55)도 22라운드 574번째로 지명됐습니다. 매덕스와 글래빈이 모두 2라운드에 뽑힌 걸 감안하면, 스몰츠의 드래프트 순위는 초라하죠. 하지만 스몰츠는 곧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리그를 호령했습니다. 통산 성적은 213승 155패 154세이브, WAR은 69.1에 달합니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유일하게 200승과 150세이브를 올린 선수이기도 합니다.


2014년 매덕스와 글래빈에 이어 스몰츠는 2015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습니다. 함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동기는 랜디 존슨과 페드로 마르티네스입니다. 무시무시한 2015년 멤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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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 골리 중 하나로 꼽히는 도미니크 하섹. / AP 연합뉴스

NHL에선 6차례 베지나 트로피를 수상한 도미니크 하섹(57·체코)이 하위 지명을 뚫은 대표적인 스타입니다. 베지나 트로피는 한 시즌 최고 골텐더(아이스하키에선 골문을 지키는 포지션을 골키퍼가 아니라 골텐더라 칭합니다)에게 수여되는 상입니다.


1983년 드래프트에서 10라운드 199번째로 지명된 하섹은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에서 2002년과 2008년, 두 차례 스탠리컵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선 체코 수문장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죠. 그는 지금도 리그 역대 최고 선방률(92.2%)을 기록한 골텐더로 남아 있습니다.


그 외 2009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브렛 헐(미국·6라운드 117번)과 뉴욕의 ‘왕’으로 불린 골리 헨릭 룬키스트(스웨덴·7라운드 205번),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영원한 ‘캡틴’ 헨릭 제터버그(스웨덴·7라운드 210번) 등도 낮은 지명 순위에도 리그를 주름잡는 스타가 됐던 대표적인 선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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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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