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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조선일보

한반도에서 베를린까지 기차여행… 손기정 다음으론 우리 가족이 처음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조선일보

일러스트=안병현

며칠 전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고속철을 탔다. 수서역에서 부산역까지 가는 데 2시간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북한에서 이 정도 거리를 열차로 여행하려면 최소 이틀은 걸린다. 열차 안을 살펴보니 전기 콘센트에 노트북을 연결해 일하는 이들, 독서하는 사람, 다정히 얘기하는 연인들이 보였다. 다들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가끔 열차가 흔들거려 스마트폰 지진계로 측정해 보니 어떨 때는 진도 4.7 규모 정도의 흔들림이 나왔다. 소음은 78데시벨 정도였다. 신기한 건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기차표를 검사하는 검표원이 없다는 점이었다. 가끔 표 검사를 하는데 걸리면 벌금이 상당하다는 얘기는 들었다. 열차를 타려면 기차표와 함께 보안소(경찰서)에서 발급한 통행증을 반드시 지녀야 하는 북한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비행기 여행보다 창밖 풍경을 볼 수 있는 철도 여행을 즐긴다. 2004년 런던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로 파견될 때 온 가족을 데리고 베이징, 모스크바, 바르샤바, 베를린, 파리를 거쳐 런던까지 기차로 여행했다. 아마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베를린까지 기차로 여행한 이후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한반도에서 유럽의 끝까지 기차로 여행하지 않았을까 싶다.


베이징에서 모스크바까지가 제일 오래 걸렸는데 5일이 걸렸다. 시베리아의 역에 정차할 때마다 그 지방 특산물을 맛보며 여행했던 추억을 잊을 수 없다. 저녁이면 승객이 다 모여 카드놀이를 했다. 이틀이 지나니 국적에 관계없이 한집안 식구처럼 어울렸다.


아마 김여정이 평창올림픽 때 와서 고속철을 타보고 내심 매우 부러워했을 것이다. 1945년 해방 당시엔 북한의 철도가 남한보다 1000㎞ 정도 길었고, 철도망도 더 조밀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의 철도 사정이 남한보다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유치원 때 혼자서 평양을 출발해 조부모님이 있던 함경북도 명천까지 기차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어린이가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열차에 올라 청진까지 가는 사람을 찾아 나를 그 전인 명천역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전보로 할머니에게 어느 차량 몇 번째 좌석에 앉아 있는 아무개한테 나를 맡겨 놓았다고 알려줘 할머니가 막내 삼촌을 역으로 보냈다. 그때는 북한 열차가 급행, 준급행, 완행으로 구분돼 있었는데 지금은 완행밖에 없다.


지금 북한 열차의 평균 속도는 20㎞ 안팎. 마라톤 선수가 달리는 속도 정도다. 평양~신의주 구간이 제일 좋은 노선인데 평균 시속이 50~60㎞밖에 안 된다. 대부분 전철인데 전기 사정이 열악해 계속 정전이 된다. 속도를 내고 싶어도 나무 침목이 다 삭았고 콘크리트 침목을 깔아놓은 구간도 자갈을 충분히 다져 놓지 않아 위험하다. 대부분 단선 철도라 열차가 만나면 마주 오는 열차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앞에서 느리게 가는 기차가 있어도 추월은 불가능. 앞 열차 속도에 맞춰 뒤쫓아 갈 수밖에 없다. 1차선 도로에서 운전하는 것을 상상하면 된다. 앞에 손수레나 자전거가 있어도 추월하지 못하고,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뒤로 후진해 좀 넓은 공간을 찾아 대기해야 하는 격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북한은 동북아의 물류 통로다.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는 중국은 고속철을 단둥과 훈춘까지 연결해 중국 철도를 북한 내부로 확장하는 계획을 완성해 현실화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북한은 중국과 손잡을까, 한국과 연결할까 고민하고 있다. 한국이 남북 철도 연결을 서둘러야 할 이유이다. 북한은 남북 철도가 연결되면 한국 열차는 북한을 통과할 수 있는데 북한 열차는 한국으로 내려올 일이 없어 결국 한국에 북한 내부만 열어준다고 편협하게 생각한다.


분단 전 서울역은 국제역이었고 도착지는 베이징, 단둥, 하얼빈이었다. 남북 철도가 연결돼 유럽으로 뻗어나간다면 적어도 서울, 광주, 부산 등 주요 역은 국제역이 되지 않을까. 섬처럼 고립된 대한민국이 유라시아 대륙과 철도로 어서 연결돼 온 가족이 런던까지 기차로 다시 여행할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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