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는 취소돼도 풍경은 살아있네… 호밀밭·철쭉 꽃길을 한가로이 '전세 관람'
봄 축제 명소… 조용한 관광
코로나 사태로 아우성치는 사이 시나브로 황매산을 뒤덮은 철쭉. 지나가던 70대 관람객이 철쭉 군락을 보며 말했다. “딴 세상 같지 않소?”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계절의 여왕 5월은 잔치의 계절이었다. 꽃 잔치, 신록 잔치, 공연 잔치…. 5월이면 전국 방방곡곡 봄이라는 계절이 푸짐하게 차려낸 성찬을 맛보며 오감이 호강하는 잔치를 즐겼다. 올해는 얘기가 달라졌다. 잔치가 실종됐다. 우리의 일상을 뒤집어 놓은 지독한 바이러스에 떠밀려 광활한 청보리밭도, 향기로운 장미정원도 그저 숨죽이고 있다.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전환하며 각자의 숨구멍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 때, 잃어버린 축제를 찾아 나섰다. 축제는 잠시 쉬어 가도 계절의 스케줄에 맞춰 온 힘을 다해 5월의 자태를 뽐내는 봄 축제 명소로 가봤다. 코로나 사태 속 잃어버린 축제 보고서.
홀로 걷는 호밀밭, 청보리밭 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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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곡성 세계장미축제’로 유명한 전남 곡성 섬진강기차마을 내 봄꽃들이 장미보다 먼저 피어 반기고 있다. 2 5월 11일 전남 곡성 섬진강기차마을을 찾은 관람객 황혁씨 가족이 포토존에서 여유롭게 기념 촬영하고 있다. 3 경남 합천 황매산군립공원에 새롭게 선보인 관광 휴게 시설 ‘철쭉과 억새 사이’ 내 카페 ‘인 얼스’ 창 밖으로 ‘황매정원’이 보인다. 4 5월 8일 무성하게 자란 호밀이 군락을 이루는 경기도 안성 ‘농협안성팜랜드’ 호밀밭 사이로 관람객이 걷고 있다. 5 갈아엎은 유채밭(우측)과 초록의 호밀밭이 나란히 있는 경기도 안성 ‘농협안성팜랜드’를 드론 촬영한 사진. / 이신영·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벚꽃놀이도 차에 탄 채 드라이브 스루로 즐기더니 매년 봄이면 노란빛으로 물들이던 유채꽃밭은 아예 올봄 풍경에서 '일부 삭제'됐다. 경기도 안성의 테마파크 농협안성팜랜드도 매년 이맘때면 축구장 면적 9배가 넘는 6만여㎡(2만평) 규모의 구릉 초지에 샛노란 유채꽃 물결이 장관을 이루었던 곳. 올해는 유채꽃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을 펼치던 지난 4월 과감하게 전부 파쇄해 한동안 황폐해진 벌거숭이 상태로 있었다. 유채꽃 축제도 자동 취소됐다. 예년 같으면 떠들썩할 시기지만 주말을 앞둔 지난 8일 농협안성팜랜드는 한산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거리 두기' 여행이 가능할 정도였다.
실제 코로나 사태 후 전년 대비 방문객이 절반 정도로 감소했다. 박소정(41) 농협안성팜랜드 총괄은 "어린이날 기준 전년도 하루 관람객이 1만5000명이었지만 올해는 6000명 수준이어서 크게 붐비지 않았다"고 했다. 유채꽃밭을 볼 수 없다고 씁쓸해하긴 이르다. 유채꽃밭과 오솔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만여㎡(3만평) 초록의 호밀밭이 기다린다. 봄은 기어이 왔다는 듯 키를 키운 무성한 호밀들이 봄바람에 맞춰 느린 춤을 춘다. 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걸으면 백색소음마저 느껴진다. 걷다 보니 외롭기까지 했다. 덕분에 사색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다.
관람객 반응도 마찬가지다. 8일 친정어머니와 함께 방문한 관람객 김은영(38·경기도 평택시)씨는 "매년 이 시기 주말에 왔다가 인파가 붐비는 것을 경험하곤 올핸 덜 붐빌 것 같은 시기를 공략했다. 이렇게 한가한 적은 처음인 것 같다"며 좋아했다. 김씨 일행은 초지 둘레 길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는 이색 자전거(대여료 2~3인 1만3000원, 4~6인 2만원)를 타며 느긋하게 호밀밭 소풍을 즐겼다.
5월 말쯤엔 유채꽃밭 자리에 '새 식구'인 해바라기와 노랑·연분홍 코스모스가 개화해 관람객을 맞을 예정이다. 주말과 공휴일엔 초지 부근에 푸드 트럭 3대를 운영한다. 이곳 호밀밭에서 수확한 호밀을 넣은 추러스, 핫도그 등을 맛볼 수 있다. 코로나 감염증 예방을 위해 당분간 셔틀버스는 운영하지 않는다. 입장료는 대인 1만2000원, 소인 1만원이며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
매년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전북 고창 학원농장 일대에서 펼쳐지는 '고창 청보리밭 축제'도 올핸 조용히 지나갔다. 5월 중순이 지나자 푸름을 자랑했던 청보리도 어느새 희끗희끗 노랑 물이 들기 시작했다. 5월 말이면 청보리밭은 황금 보리밭으로 바뀐다. 올봄에도 대지에 펼쳐진 청보리밭 풍경을 놓칠세라 남몰래 다녀간 탐방객만 어림잡아 10만명. 매년 축제 기간에 50만명이 다녀간 것에 비하면 5분의 1 수준이지만 공식적으로 '청보리 시즌' 끝물인 요즘도 매 주말 가족 단위 탐방객이나 커플, 사진 동호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오는 사람 막지 못하고 가는 사람 잡지 못한다'는 게 축제위원회 측 입장이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위원회 위원장인 진영호(71) 학원농장 대표는 "지난해까지 16년째 축제를 개최해오다 올해 쉬어가니 좀 쓸쓸했지만, 탐방객들은 그 어느 해보다도 여유롭게 청보리밭을 마음껏 즐기는 분위기"라고 했다. 축제 때마다 붐벼 문제가 됐던 주차장뿐 아니라 화장실 등도 비교적 여유로웠다. 코로나 사태 예방 차원에서 한 곳의 주차장만 개방해 자연스럽게 입장 제한을 유지한 덕분이었다. 축제 분위기를 돋우던 먹을거리나 농특산물 판매장은 아예 들어서지도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올해 보리농사는 진 대표가 귀농한 이래 사상 최대 풍작이란다. 황금 보리밭 풍경은 6월 5일쯤 수확을 끝으로 사라진다. 이어 8월이면 해바라기가, 가을엔 드라마 '도깨비' 속 하얀 메밀밭 풍경이 기다린다. 진 대표는 "코로나 사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몰라도 해바라기와 메밀꽃만이라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고창 청보리밭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자유롭게 무료 탐방 가능하다.
황매산 철쭉 만개, 축제 대신 피크닉
매년 철쭉제가 열리던 경남 합천군 황매산군립공원은 코로나 사태로 정상부까지 올라가는 차량을 통제해오다 지난 9일부터 차량 출입을 다시 허용했다. 철쭉 군락지가 있는 정상부 부근 황매산오토캠핑 제1주차장까지 차량을 이용할 수 있어 매년 철쭉제 기간엔 주차장으로 향하는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다. 11일 화창한 날씨에도 황매산군립공원 정상부로 향하는 차들은 평일이라 그런지 막힘 없었다. 일찌감치 만차였을 주차장도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었다. 주말에는 상황이 좀 다르다. 그래도 예년 축제 기간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주차 후 황매정원을 곁에 두고 잘 닦인 길을 따라 10분 정도 오르니 연분홍 철쭉 군락이 눈앞에 펼쳐졌다. 황매산(1108m) 북서쪽 능선 정상부 해발 800~900m 지점의 광활한 구릉지인 황매평전에선 코로나로 아우성치는 발아래 세상 이야기를 싹 잊을 만큼 비현실적인 평온함이 펼쳐진다. 조금 촌스러운 꽃이라 여겼던 철쭉인데 군락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로맨틱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아쉽게도 철쭉은 개화 기간이 짧다. 14일 현재 1·2군락지 모두 만개했다. 황매산군립공원 측은 이주 주말쯤이면 철쭉 풍경은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황매산은 철쭉 명산 중 하나로 꼽힌다. 주차장이 정상부에 있어 접근성이 좋다. 남녀노소 가벼운 차림으로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철쭉제는 다음 해를 기약해도 탐방객들은 아쉽지 않다는 분위기다. 평원 풍경만으로도 코로나 블루가 해소되는 기분이다. 등산객들 사이에선 이 시기와 가을 억새 철 합천 8경 중 하나인 황매산 모산재 코스가 인기다. 황매산오토캠핑장에서 출발해 모산재, 황매산 정상, 무학굴 등을 거쳐 정상 주차장으로 돌아온다. 전체 거리는 7.3㎞ 정도로 서너 시간 정도 소요된다. 올봄 황매산군립공원 내 관광 휴게소인 '철쭉과 억새 사이'가 새로 추가됐다. 완만한 곡선형 철근콘크리트 구조 1층 건물로 카페 '인 얼스'를 비롯해 식당, 로컬푸드 판매점이 들어섰다. 주차료도 기존 정액 요금을 내는 방식의 선불제에서 시간별 가산되는 후불제로 변경했다. 4시간 기준 중·소형 3000원, 대형 4000원이며 이후 1시간당 1000원의 요금이 가산된다.
봄꽃 '황제 감상'
6 조용히 봄꽃 축제를 열고 있는 경기도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7 전북 고창 청보리밭 축제는 올해 쉬어 가도 탐방객의 발길은 이어지고 있다. / 이신영·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아침고요수목원 |
입장료가 있는 곳,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은 곳은 '전세 관람' '황제 관람'이 가능하다. 매년 봄꽃 축제를 열어온 경기도 가평 아침고요수목원도 봄꽃 만발한 요즘이 '대목'이지만 관람객이 줄면서 '코로나 속 전세 관람 명소'로 꼽히고 있다. 수목원 측에 따르면 올봄 하루 평균 관람객은 2500명이다. 지난해 대비 50% 수준으로 평일엔 관람객이 더 적다. 이곳 홍보 담당 조성만(34)씨는 "매년 이맘때면 나들이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나 20% 이상 차지하던 외국인 관광객들과 단체 관광객 수요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가족·커플 등 개별 관광객들의 만족도는 높아졌다"고 했다. 현재 아침고요수목원은 봄 최대 축제 '봄나들이 봄꽃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시끌벅적한 행사와 프로그램은 진행하지 않는다. 대신 아름다운 정원에 200여 종의 봄꽃과 100여종의 목본성 식물이 펼쳐지는 장관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대표정원인 하경정원은 신록이 더해져 지금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을 자랑한다. 올봄부터는 선착순 예약제로 '토요투어'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입장료는 성인 9500원·청소년 7000원·어린이 6000원.
봄 대표 꽃축제 중 하나인 장미축제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5월 '곡성 세계장미축제' 개최지인 전남 곡성 섬진강기차마을의 장미는 축제 개최 여부와 상관없이 개화를 시작했다. 장미에 앞서 디기탈리스, 알리움, 금어초, 델피니움 등이 만개해 장미보다 먼저 마중 나왔다. 곡성 세계장미축제위원회 관계자는 "올해는 봄이 빨라 5월 셋째, 넷째 주에 접어들면 어느 정도 개화할 것"이라고 했다. 섬진강기차마을 역시 아직은 조금 썰렁한 분위기다. 세 살 아들을 데리고 나들이 온 황혁(32)씨는 "사람이 없으니 전세 관람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면서도 "활기차던 분위기가 그립기도 하다"고 했다. 입장료 성인 5000원, 소인과 경로 4500원을 내면 지역 관광 상품권 2000원권을 준다.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운영.
기지개 켰던 축제 다시 줄취소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전환하면서 슬슬 기지개를 켜나 싶었던 축제는 다시 줄줄이 연기나 취소 소식을 알리고 있다. 곡성 세계장미축제는 최근까지 개최 여부를 논의해오다 '이태원 클럽발' 코로나 감염증 재확산 방지를 위해 13일 최종 취소 결정을 내렸다. 오는 29일부터 다음 달 14일까지 경기도 가평 자라섬 남도에서 개최하려던 '자라섬 남도 꽃 축제'도 10월로 잠정 연기했다. 각 지자체 축제 담당자들은 "현재 정부 권고에 따라 지자체가 주관하거나 관여, 후원하는 축제들은 90% 이상 취소나 연기된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10%도 개최 여부를 두고 고심 중인 것으로 안다"고 했다.
계절과 관계있는 경관, 제철 음식 축제는 연기가 어려워 아예 취소하는 곳이 많다. 침체한 관광 수요를 회복하고자 대안을 제시하는 움직임도 있다. 경기도와 경기관광공사는 경기도 내 79곳의 대표 여행지와 함께 '착한여행 캠페인'을 추진한다. 24일까지 e커머스 기업인 '티몬'에서 도내 관광지 입장권을 할인가격에 판매한다. 1차 티켓 오픈한 11일 하루 만에 79개 중 32개 상품이 매진돼 13일 2차 판매를 시작했다. 봄 축제 명소인 곳도 다수 포함돼 있다. 예상치 못한 폭발적인 반응에 경기관광공사 코로나19대응TF팀은 "캠페인을 통해 축제에 대한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고 지역 관광 활성화에 도움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축제 개최와 각종 행사 진행 여부는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구석구석' 홈페이지 '코로나 바이러스-19 여행정보 변동사항'에서 확인.
합천·곡성·안성=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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