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로 사라진 驛舍엔 홀씨 품은 민들레가… 50년 ‘비밀의 숲’ 엔 영산홍 만발했네
[아무튼, 주말] 스탬프 찍으며 떠나는
익산으로의 시간 여행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 철로마저 사라진 폐역사(驛舍)엔 홀씨 품은 민들레가 소복이 뒤덮었다. 텅 빈 역사 처마를 터전 삼아 비둘기 내외가 ‘구구’ 소리를 내며 힘겹게 둥지를 튼다. 주둥이로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주워 나르지만 떨어뜨린 잔나뭇가지들만 어지러이 흩어졌다. 이따금 역사 건너편 고속철도로 전라선 KTX가 지나갔다.
전북 익산의 남쪽 덕실리 춘포역(춘포역 폐역·등록문화재)은 높은 채도를 뽐내는 봄 풍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빛바랜 차림으로 108번째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봄개[春浦] 나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던 춘포의 춘포역은 올해 ‘익산 모바일 스탬프투어’(이하 익산 스탬프투어)에 추가된 11개 코스 중 하나. 춘포역을 시작으로 스탬프투어에 새로 이름 올린 숨은 명소들을 찾아다녀보기로 했다. 감춰져 있던 사연과 풍경이 마중 나왔다.
◇익산 근대 여행의 출발점, ‘춘포역’
“옛날에는 이 일대까지 만경강 바닷물이 들어와서 다 뻘밭이었대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제방공사를 해 농경지를 만들면서 이곳 마을이 형성된 것이지요. 여러 전라선 역사가 그렇듯 춘포역 역시 일본인들이 붙인 ‘오오바역(大場驛)’이라는 이름으로 개통해 당시 ‘이리’였던 익산과 전주를 연결하는 전라선 보통역으로 출발했습니다. 주요 목적은 쌀 수탈이었고, 일본은 이곳에서 수탈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거나 수탈을 위해 필요한 물자들을 이 춘포역을 통해 들여 왔어요. 역 이름은 대장역으로 불리다 1996년 춘포역(春浦驛)으로 개칭했습니다.” 춘포 토박이이자 춘포역의 관광안내를 담당하는 이상열(64)씨는 “춘포역 일대는 익산의 근대 이야기의 보고(寶庫)”라고 했다. 1914년에 지어진 춘포역은 켜켜이 쌓인 시간만큼 공간에 얽힌 사연이 깊다. 오래도록 ‘대장역’이라 불렸다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춘포역 주변은 드넓은 평야로 이뤄졌다. 남쪽으론 호남의 젖줄인 만경강 물줄기가 이어진다. 비옥한 땅은 벼농사 짓기에 최적이었고, 토지 조사를 마친 일본인들은 지금의 춘포면 일대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운영하며 그들만의 세상으로 삼았다. 수탈의 역사부터 춘포역을 통해 익산 섬유공장으로 통근하던 여공들이 많아 ‘딸촌’이라 불렸다던 이야기까지, 춘포역 이야기를 담은 자료들이 역사 안팎에 전시돼 있다. 슬레이트를 얹은 맞배지붕의 춘포역사는 일제강점기 소규모 철도역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등록문화재.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이기도 하다. 이씨는 “익산 소재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전주에서 대학을 나온 자신에게 춘포역은 통학 열차이기도 했다”며 “춘포역은 폐역이 되기 전까지 춘포면 주민들의 일상을 실어나르는 상징적 공간이었다”고 했다. 개방 시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6시. 매주 수·토·일요일엔 관광안내원이 상주해 춘포마을의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 가옥·도정공장··· ‘대장촌’ 이야기
춘포마을은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흔적과 해방 이후 근대 농촌 지역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산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어 골목 답사를 하기 좋다. 호소카와 농장 주임관사,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가옥(등록문화재·에토 가옥)과 춘포도정공장(구 대장도정공장, 구 호소카와 도정공장)은 100여년 전 이야기를 ‘소환’한다. 일본인 농장가옥 등은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 가문이 농장 운영을 위해 지은 곳이다. 2층 목조 건물은 1920년대 일식 가옥의 원형과 당시 쓰였던 자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골목 안쪽엔 108년 세월을 이고 지고 온 양철 지붕의 춘포도정공장이 있다. 이 역시 호소카와 모리다치가 세웠다. 지상 1층, 연면적 3852㎡의 큰 규모로 해방 직후 ‘신한공사’로 시작해 소유자만 몇 차례 바뀌었을 뿐 주로 정부양곡도정업을 해오다 1998년 문을 닫았다. 한동안 방치돼 있던 이곳은 몇 해 전 새 주인을 만나면서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세 곳 모두 사유지인 데다 시설 보존을 위해 전면 개방하지는 않지만, 춘포도정공장의 경우 전시나 문화 행사가 진행되는 기간에 한해 탐방이 가능하다. 춘포마을엔 1902년 첫 예배를 올린 ‘대장교회’를 비롯해 ‘대장미용실’ ‘대장촌 중국집’ 등 여전히 ‘대장’이라는 옛 지명을 사용한 간판들이 눈에 띈다.
익산의 근대 역사를 테마로 스탬프투어를 이어가고 싶다면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중앙동 익산근대역사관도 코스에 넣어볼 만하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사였던 삼산 김병수가 1922년 개원했던 ‘삼산의원’을 이전·복원한 공간에서 익산과 지금은 사라진 지명 ‘이리’라는 도시의 역사와 만난다. 1896년 대장촌의 ‘이마무라 농장’을 시작으로 1918년까지 이리에만 무려 13개의 농장이 세워진 이유와 도시 변천사가 자료 형태로 전시돼 있다.
◇반세기만에 열린 비밀의 숲
지금 익산으로 향하는 여행객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은 황등면 아가페정원이다. 지난해 9월, 50년 만에 일반인들에게 완전 개방한 ‘비밀의 숲’이다. 개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코로나 재확산으로 문을 닫았다가 지난 12일 전면 개방했다. 전라북도 공식 민간정원 4호로 지정된 이곳은 1970년 고 서정수 신부가 무료 노인복지시설인 아가페정양원을 설립하면서 시설 내 어르신들의 건강 관리와 노후, 시설 운영을 위해 나무를 심으며 시작됐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나 이익을 목적으로 가꾼 정원이 아닌 반세기에 걸쳐 노인들을 위해 정성으로 간직해온 숲은 그 자체로 잔잔한 감동을 준다. 개방 후 첫 단풍철이었던 작년 10~11월에만 주말 하루 평균 2500명이 다녀갔다. 개방 후 첫 봄을 맞이하는 올봄도 그에 못지않는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 최명옥 원장은 “신부님이 정원을 가꿀 당시 훗날 시민들이 찾아와 쉬어가는 곳이 되었으면 하셨는데, 그 뜻을 이룬 것 같다”고 했다.
개방 전에도 아가페정원은 아는 사람들만 찾는 비밀의 숲이었을 뿐 대문을 닫아두는 폐쇄적인 곳은 아니었다. 입구에 들어서 안내판이 있는 탐방로를 따라가면 ‘포멀가든’ ‘당단풍나무 쉼터’ ‘메타세쿼이아 산책길’ 등을 차례로 만난다. 10만㎡(3만 평)에 달하는 삼각 형태의 정원에는 메타세쿼이아, 섬잣나무, 공작단풍 등 수목 17종 1416주가 식재돼 있다. 거의 모든 나무는 50년 이하 수령이 없을 정도로 서정수 신부가 심었던 당시부터 함께해오고 있다.
유럽식 정원처럼 꾸며놓은 포멀가든은 개방을 계기로 새로 꾸민 공간이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앞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면 천국이 따로 없는 듯하다. 다시 산책로를 따라가면 거대한 메타세쿼이아 길과 만난다. 2열로 빽빽하게 줄 선 40m 높이의 메타세쿼이아 나무 사이에 서면 누구나 입이 떡 벌어진다. 지금 가면 ‘고려 영산홍 터널’을 거닐 수 있다. 휴관일인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까지 무료 개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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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정원과 함께 익산 스탬프투어 코스로 이름 올린 춘포면 달빛소리수목원은 ‘황순원의 소나기 나무’가 마스코트다. 500년이 넘는 마을 수호신 당산나무는 마치 조각이라도 한 듯 나무의 몸통이 동굴처럼 비어 있어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소설 ‘소나기’ 속 소년과 소녀가 비를 피해 들어간 수숫단처럼 소나기라도 만나면 ‘나무 동굴’ 안에 몸을 숨길 수 있다고 해 소나기 나무란 별칭을 얻었다. 이곳 대표가 전국 각지에서 20여 년간 수집한 희귀 고목들도 볼거리다. 수목원 내 2층 카페에선 수목원과 함께 일대 들판이 내려다보인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하며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어린이 2000원이다.
‘항아리 정원’도 이색적이다. 함열읍 고스락은 10만㎡(3만여 평) 대지에 4000여 개 항아리가 숨 쉬는 전통장 발효·숙성 테마 정원이다. 열 맞춰 놓인 항아리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든 된장, 간장 등이 익어간다. 사연이 있는 이색 항아리도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항아리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드라마 ‘더킹, 영원의 군주’ 촬영지로 알려지며 중년 주부, 젊은 연인도 많이 찾는다. 카페에서는 고스락정원에서 채취한 솔잎과모과로 만든 효소차 등 각종 발효액을 활용한 차와 에이드를 맛볼 수 있다. 테라스에 앉으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는 구수한 장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게 된다. 탐방객들의 화제도 기승전 ‘장맛’ 이야기로 넘쳐난다.
◇미륵사지에서 야경 감상
익산 스탬프투어의 출발을 춘포역 근대 이야기로 시작했어도 익산에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지나칠 순 없다. 백제의 도읍과 연관된 백제 후기의 유산으로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를 포함한 8개 문화유산이 있다. 백제 무왕대에 조성된 왕궁터였던 왕궁리 유적은 초록빛 가득한 지금이 가장 예쁠 시기다. 유적 중심부에 있는 왕궁리오층석탑(국보)은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보수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출토된 사리장엄 등 유물 이야기는 인근 국립익산박물관에 가면 만나볼 수 있다.
박물관 옆 미륵사지는 석탑 절터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힌다. 연못 가까이 있는 포토존에 서면 연못에 비친 나무와 탑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사진동호인들이 즐겨 찾는다. 익산의 일몰 명소로는 웅포곰개나루가 유명하지만 일몰과 야경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다면 미륵사지에서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 것도 괜찮다. 13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신비롭고 고즈넉한 백제의 밤과 조우할 수 있다.
스탬프투어는 숨은 그림 찾기 하듯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여행법이다. 익산 스탬프투어의 경우 스마트폰에서 ‘익산시 스마트 관광 전자지도’ 홈페이지에 접속·로그인 해 스탬프투어 코스를 방문하면 위치 기반 시스템에 의해 자동 스탬프를 획득한다. 총 23곳 중 5곳 이상만 스탬프를 획득해도 완주인증서를 신청·발급받을 수 있다. 이민경(37) 익산시 문화관광산업과 주무관은 “완주 선착순 이벤트 선물로 커피 기프티콘이나 수건을 주는데 어렵지않게 도전해 수건을 받아가는 어르신들도 있더라”고 했다.
[ 가을 전어도 울고 간다는 봄 우어회 한 접시 ]
익산 스탬프투어 코스 근처 맛집
봄에 익산, 그중에서도 금강 근처에 간다면 맛봐야 할 것이 있다. ‘우어(웅어)회’다. 본명은 웅어지만 우어라 불린다. 웅어는 뼈째 먹는 생선으로 무기질과 비타민이 풍부한 청어목 멸칫과의 바닷물고기다. 웅어는 맛이 좋아 조선시대 임금님에게 진상하던 귀한 물고기로 알려졌다.
익산 웅포곰개나루 부근엔 우어회를 하는 식당들이 몇 곳 있다. 그중 원조 우어회는 1대 송양선씨가 처음 우어회를 선보이기 시작해 지금은 딸 윤성숙(65)씨와 윤씨 아들 노상원(38)씨 모자가 3대에 걸쳐 60여 년째 운영하는 곳. 햇우어회를 썰어 초장에 찍어 먹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채소와 고추장 양념에 회를 버무려 내는 ‘우어회 무침’을 찾는다. 뼈째 먹어 식감이 독특한 데다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 주인 윤성숙씨는 “봄에 더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살이 오르는 산란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어회(소 4만원, 대 6만원)와 돌솥밥이 곁들여 나오는 우어회정식(1인 2만원)이 인기다.
웅포식당은 익산시 향토음식점으로 선정된 곳이다. 양념에 무쳐 내는 우어회(4만·6만원)는 담백한 맛이 난다. 우어회와 함께 밥을 주문하면 비벼 먹을 수 있는 커다란 대접을 준다. 우어회를 어느 정도 먹다가 밥에 넣어 쓱쓱 비벼 먹으면 맛있다. 두루치기(1만2000원)와 한우육회비빔밥(1만원) 등 메뉴가 다양하다.
함열읍 ‘고스락’ 내 이화동산에선 깔끔한 한정식을 맛볼 수 있다. 수제 떡갈비와 계절 반찬이 나오는 한상(1인 1만5000원), 솥밥을 곁들이는 솥밥한상(1만8000원), 보리굴비 한상(2만2000원), 고스락 한상(3만원) 등 가격대에 따라 상차림이 달라진다. 고스락에서 만든 유기농 장류로 맛을 낸 반찬과 찌개는 자극적이지 않고 깊은 맛이 난다.
춘포역 부근 싱그랭이는 현지인들이 편안하게 즐겨 찾는 우리 밀 칼국수집이다. 버섯칼국수(1인 7000원)를 주문하면 냄비에 전골처럼 나온다. ‘샤브샤브쇠고기 추가’(5000원)는 선택 사항이다. 건더기를 건져 먹은 후 다진 채소와 밥을 넣어 볶아 먹는 게 코스다. 단골로 보이는 한 손님은 “국물이 많으면 짱게(짜니까) 좀 덜어내고 볶아야 맛있다”고 조언했다.
[익산=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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