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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천만 흥행과 1%시청률, 극과 극 오간 이병헌 감독 "내 병맛의 비밀은..."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일단 모든 걸 지루하게 본 후 비튼다, 뻔뻔하게!"

‘극한직업'은 강박없이 찍어...‘멜로가 체질'은 4년 전 준비

"‘힘내세요 병헌 씨’로 데뷔'... 내 돈으로 뭐든 찍자"

"창작의 원동력? 하고 싶은 걸 포기 않고 해왔을 뿐"

"PPL도 이병헌스럽게…‘멜로가 체질' 대본집 나와"

조선일보

경계 없는 ‘병맛'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병헌 감독. 3번째 상업 영화 연출작인 ‘극한직업’으로 단번에 천만 감독이 됐다.

화제의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 1% 대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저조한 시청률은 실화였다. 드라마 밖에서도, 드라마 안에서도. 극 중 방송국 PD 역할을 맡은 안재홍은 드라마 시청률이 1% 로 바닥을 기자 똥줄이 타서, 실없이 명랑한 동료 PD를 쥐잡듯이 잡는다.


"감 잃었니?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지금까지 이런 드라마는 없었다. 브라운관 앞에서 대놓고 자학하는 감독이라니!


대체 이 심각한 직업적 ‘전전긍긍'조차 웃고 즐기는 데 희생 제물로 내놓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닭 튀기다 범인 잡는 걸 까먹었던 ‘극한 직업'의 류승룡도 막바지엔 빛나는 직업정신을 보여주었다. "모르나 본데, 우리 같은 소상공인들, 목숨 걸고 일해!"


나는 ‘멜로가 체질' 첫 회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드라마가 이렇게 스펙터클하게 웃기니 사람들이 영화 보러 극장엘 안 가지." 대본을 직접 쓰고 연출한 사람이 이병헌 감독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영화 ‘극한 직업’으로 1,600만 관객을 동원한 후, 쉴 사이 없이 드라마를 내놓은 이병헌 감독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이병헌 감독은 데뷔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자전적 페이크 다큐 ‘힘내세요, 병헌 씨'로 2013년 데뷔했다. 영화는 "충무로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힘내세요! 병헌 씨"라는 비꼬는듯한 경쾌한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6년 뒤, 그 병헌 씨가 충무로를 발칵 뒤집어 놓을 줄도 모르고!


세상에 없던 그 코믹한 저예산 영화엔 데뷔도 못 한 게으른 감독 병헌 씨 말고, 데뷔도 못 한 친구 ‘범수PD’도 등장한다. 눈치챘겠지만, 그 캐릭터가 자라 ‘멜로가 체질' 속 남자주인공 범수PD(안재홍 분)가 되었다. 나는 끝없는 변주로 확대재생산을 거듭하는 ‘이병헌 유니버스'의 오리지널 콘텐츠는 이병헌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쉬지 않고 생산한다.


한 평론가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미켈란젤로처럼’ 하염없이 각본을 끄적이다 늙어가는 한국의 감독들에 비해, 6년간 1편의 독립 영화, 3편의 상업영화, 1편의 드라마를 만들어낸 놀라운 생산성이 이병헌의 성공 비결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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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컨셉으로 찍은 페이크 다큐 영화 ‘힘내세요, 벙헌 씨’의 한 장면. 극중 배우가 이병헌 감독 역을 맡아 게으른 모습을 열연하고 있다.

-당장은 배우 이병헌 보다 감독 이병헌이 더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배우 이병헌 씨가 힘을 내야 할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요? 자, 이병헌에게 배우 이병헌이란?


"이병헌 씨와는 스치듯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악마를 보았다' 촬영장에 놀러 갔을 때 잠깐 인사를 나눴죠. 저흰 아무런 에피소드도 없습니다. (건조하게)기회가 된다면 이병헌 씨와 함께 일해보고 싶습니다."


-이병헌 씨와의 작업은 매우 훌륭했던 거로 압니다. 영화감독 준비생 이병헌의 파란만장 분투기 ‘힘내세요, 병헌 씨'는 놀라운 페이크 다큐 영화였어요. 어떻게 스스로의 ‘찌질한' 상황을 ‘인간극장' 플롯으로 풍자할 생각을 했나요?


"당시엔 ‘내가 나를 풍자한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데뷔를 준비하는 비슷한 형편의 사람들을 보면서 일기 쓰듯 써 내려간 작품입니다. 저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고, 작가 시절부터 몇 번의 제작 무산을 겪어본 터라 투자사 반응에 대한 눈치가 100단이었어요. 투자 결정에 미적지근하게 시간을 끄는 모양새가 왠지 안 될 것 같았죠."


-많은 감독이 그런 기다림 속에서 부쩍부쩍 늙어가죠.


"‘하면 된다’ ‘나를 믿자’ 이런 말들을 많이 해봤지만, 안 될 거 같으면 그냥 안 됩니다. 그때 무너지지 않고 일주일 만에 ‘힘내세요 병헌씨’ 시나리오를 완성했어요. 내 돈으로라도 뭐라도 찍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생산성이 왕성하군요. 배우 문소리 씨도 캐스팅을 기다리다 스스로 자기를 풍자한 영화를 찍었었죠.


"아! 하지만 엄청나게 무모한 생각이었어요. 그 무모함이 수년간 가져다줄 경제적 시련도 만만찮았죠. 당시엔 가만있기보다는 로맨틱 코미디를 준비하던 제작사의 사무실이라도 공짜로 쓰자는 심산이었어요. 그래서 투자사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힘내세요, 병헌 씨' 시나리오를 썼어요. "한 달만 독립영화 작업을 하겠습니다. 사무실 좀 쓸게요"했죠."


예상대로 그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엎어졌지만 ‘사무실 빌려 쓴 게 어디냐’ 싶었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깨달음이 있다고 했다.


-어떤 깨달음이지요?


"빚지고 못 사는 거구나.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오! 걱정 말아요. 곧 ‘극한 직업'의 1,600만 관객이 기다리고 있잖아요(웃음). 아무튼, 저는 얼마 전 막을 내린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보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시청률 1%조차 기이한 축복처럼 느껴졌어요. 실례지만 시청률이 1%가 나오리라고 예상했나요?


"드라마 1부가 방송되기 전부터 그 신(Scene)의 대사가 그랬어요. 1%를 확인하고 쓴 대사는 아니죠."


-여하튼 드라마에서 PD역으로 나오는 안재홍이 작가인 천우희에게 "1%라고 쫄지 마요"라고 겁에 질려 말하는 걸 보고 ‘자기 패러디’의 무궁함에 감동했습니다.


"원래 대사는 2%였어요. 우리 상황에 맞춰 1%로 바꿨죠. 높은 시청률을 기대하고 기획한 작품은 아니어서 겸손하게 2%는 나오겠지 하고 썼던 대사예요. 사실 더 솔직히는 3%는 나오겠지만 겸손하게 2%로 쓴 건데... 현실은 겸손의 더 아래 치를 찍었어요. 재밌고, 극을 흩트리지 않겠다 싶으면 모든 것이 다 제물이죠. 작가란 그런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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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환호에 적응 못하고 몹시 수줍어하는 이병헌 감독. 올해 부산영화제서는 ‘극한직업' 오픈 토크와 ‘힘내세요, 병헌 씨' 상영이 동시에 있었다. 6년간 한 감독의 비약적 성장사가 놀랍다.

-물론이죠. 슬픔도 기쁨도, 계속 비틀어서 농담하는 감각이 놀라울 뿐. ‘마블' 세계관이 확장되듯 이병헌의 오리지널 콘텐츠는 이병헌 자신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스스로를 제물로 던지니 갈수록 더 귀엽고 자학적인 ‘병맛' 캐릭터가 탄생하고 있어요. 여하튼 바로 직전 타이밍에 ‘극한 직업'으로 천만 흥행 감독이 됐는데, 그 극한의 영광을 더 오래 누리지 않고 바로 드라마로 간 이유가 뭔가요?


"원래 저는 영화보다 드라마를 더 많이 보고 자랐어요. ‘사람을 그대 품 안에' 같은 트렌디 드라마부터 김수현, 송지나 드라마까지. 멜로와 로맨틱 코미디를 특히 좋아했어요. 영화는 90년대 초반 기준으로 비디오 신 프로 대여료가 2,000원, 저에겐 금액 면에서 큰 장벽이었어요. 일주일에 한 편씩 볼 수 있는 영화가 좀 더 귀하게 느껴졌을 뿐, 영화와 드라마를 다 좋아합니다."


-천만 흥행을 찍고 그 자신감으로 드라마로 간 거로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아니요. 대본은 4년 전부터 준비했어요. ‘극한직업’과는 별개죠. 그저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수다를 떨어보고 싶었달까요. 영화는 2시간 안에 모든 걸 함축해야 해요. 영화만의 리듬이 있죠. ‘바람 바람 바람' 등 제 전작 영화들을 보면 대사가 많긴 해도 나름의 선을 지켰어요. 대사보다 플로팅과 리듬에 더 신경을 썼죠. 사실, 저로서는 어떤 플랫폼이든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흥미로운가요?


"내 주변에 있는 소소한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 크게 자극적이지 않은 보통의 이야기. 자극적인 설정이 있다면 그 설정에 인물을 맞추면 되지만 내가 그리고자 한 이야기는 그 반대예요."


-특별히 사랑했던 인생 영화나 드라마가 있습니까?


"처음 영화에 빠져들게 했던 ‘영웅본색’. 지금 봐도 정말 엄청나게 재밌는 ‘모래시계’, 내가 나를 돌아봤더니 하나도 행복하지 않아 깜짝 놀랐을 때 행복하게 해준 드라마 ‘나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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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멜로가 체질'에서 좋은 호흡을 보여준 안재홍과 천우희. 원래 제목은 ‘긍정이 체질'이었다고.

-멜로가 체질'은 서른 살 된 세 여자의 이야기예요. 몇 년 전 강하늘, 김우빈 등이 주연한 영화 ‘스물'이 개봉됐을 때, 사람들은 당신이 ‘서른' ‘마흔'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얘기했죠. 어찌 보면 자기 예언적 길을 가고 있군요.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 보니 비슷한 맥락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방송작가 진주(천우희 분)와 드라마 감독 범수(안재홍 분)를 메인 커플로 드라마 제작과정을 보여준 건 건 신의 한 수였어요. 이병헌에게 천우희, 안재홍이란?


"말이 필요 없는 사람들. 천우희 씨는 ‘써니' 때부터 좋았고요. 안재홍 씨는 단편 영화 ‘술술' 때부터 보고 정말 좋아했어요. ‘족구왕'에서도 대단했죠. ‘스물'에 잠깐 출연시켰는데, 제가 쓰는 대사 톤과 너무 잘 맞았어요. 다들 자유롭고 똑똑한 분들이라 내버려 둘수록 잘해요."


-어차피 해야 할 PPL을 자연스럽게 ‘드라마 메이킹’으로 녹여내더군요. 손발이 오그라들 땐, 대놓고 뻔뻔해지는 것도 좋은 전략이다 싶었어요.


"그게 코미디의 멋진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비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재미. 그 아이디어를 짜내는 고통마저 재밌어요. 코미디 장르를 할 때의 쾌감이죠. PPL은 제작 여건상 무조건 고집부리고 거부하기 미안했고, 그렇다고 다 받아주기엔 작품이 훼손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왕 할 거 ‘우리스럽게 풀어보자’ 싶었죠. 7회 초반에 몰아치기 PPL을 했고 14회에는 대놓고 안마의자와 음료수를 등장시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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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을 초월해버린 PPL의 클라이맥스. 안마의자 장면. 무엇을 보여줘도 말이 된다는 게 이병헌표 코미디의 장점.

-재밌는 건 극 중에 코믹한 판타지로 처리되는 안마의자 PPL을 저는 PPL인지 몰랐다는 거예요(웃음).


"사실 광고법에 애매하게 우려되는 지점이 있어 난상토론을 벌였어요. 저를 지지해준 채널과 결과물에 엄지를 들어준 우리 뜨거운 1% 분들께 감사할 뿐이죠."


-수다 블록버스터에 걸맞게 주옥같은 대사가 많습니다. 저는 유독 ‘바쁜 데, 심심해'와 ‘당신 눈동자에 건배를'이 좋았어요. 가슴에 남는 대사는 뭐죠?


"‘나 힘들어. 안아줘’."


-"안아줄까요? 안으면... 포근해" 이 대사도 좋더군요.


"어쩌면 저는 그 말이 하고 싶어서 이 드라마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말인데, 하고 살기 힘들었어요. "


-죽은 애인과 대화하며 늘 뚱한 얼굴로 살던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에게 유독 마음이 갔어요. 은정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냉정하게 보면 가장 공감이 안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고 그의 환영이 눈에 보이고, 그에게 위안받으며 치유하고 성장한다... 뭔가 굉장히 드라마적이에요. 그런데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은정이 같은 사연이 아니라 그 아픔의 크기에 대해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은정이처럼 살고 싶다는 건, 결국 행복해지고 싶다는 거죠."


-당신도, 행복해지고 싶죠?


"네. 하지만 저는 사실 행복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울감이 많은 편이죠."


-실례지만 잘 웃는 편인가요?


"아니요. 일상에서는 웃지 못해요. 심하게 낯을 가립니다. 말도 거의 없어요."


-어쨌든 ‘써니' ‘과속스캔들' 등 강형철 감독의 코미디 각본을 쓰면서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이병헌에게 강형철이란?


"스승의 날 안 챙겨도 진심으로 신경 안 쓰는 선생님."


-이병헌에게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이란?


"그분들도 이젠 저를 알겠죠? 전 그것만 알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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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에서도 거의 말이 없다는 이병헌 감독.

-이병헌에게 ‘극한 직업'이란?


"아! 어려워요. 극한 직업은… 제게 부와 명예를 주었어요. 영화적인 비평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찍었는데, 그게 어필된 작품이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혼란의 지점도 있었고요.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 작품이에요."


-이병헌에게 갈비맛 통닭이란?


"전 양념 된 고기를 싫어해요. 모든 분야에서 단맛이 가미된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정통 프라이드파 라고나 할까요."


-이병헌에게 ‘병맛'이란? ‘병맛’을 탄생시키는 영업 비밀을 조금만 공개해 주시지요.


"모든 상황을 지루하게 여기는 게 우선이에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예요. 당연히 평범한 상황들, 평범한 대사들이 필요하죠. 일단은 보편적인 것을 지루하게 여긴 다음 그걸 이렇게 저렇게 비틀어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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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을 잡을 것인가, 범인을 잡을 것인가. 결국 두 마리를 다 잡은 영화 ‘극한직업'. 영화 속에 나온 수원왕갈비 통닭은 대히트를 쳤다.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도 좋은 사례지만, 저는 영화 ’스물'에서 "왜 노래방에서 득음을 하고 지랄이야?"를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터져요. 이 모든 ‘구강 코미디’가 일상을 지루하게 보는 데서 나왔다는 거지요?


"그렇죠. 지루하게 봐야 비틀 수 있으니까요. 한편으론 전형적인 것, 클리셰를 무서워하지 않아요. 재밌으니까 많이들 쓰는 거 아닐까요? 남들 썼다고 안 쓰면 아까우니, 그걸 비틀고 또 비틀어요. 그러면 마치 양면 잠바처럼, 새로 산 건 아니지만 익숙한 듯 다른 게 나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또 잘 모르겠어요.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A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모두 제가 B를 하는 걸로 알아요. 그냥 제가 그렇게 생겨먹은 걸지도 모르죠."


-B급 유머를 A급 스타일로 하고 있는 거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대담하게.


"뻔뻔하죠. 용기도 필요하고요.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조마조마합니다. 코미디라서 더 마음이 쫄리고요. 코미디는 극장에서도 즉각적인 반응이 오지만, 드라마는 반응이 실시간이에요. ‘ㅋㅋㅋ’이 얼마나 나오나를 기다리며 순간순간 노심초사합니다."


-‘극한 직업’의 쾌감과 ‘멜로가 체질'의 공감 사이엔 대체 뭐가 있었을까요?


"친척들이 우르르 모인 자리에 끼어 앉아 있으면 알게 되죠. ‘극한직업’이 흥한 이유도 ‘멜로가 체질’이 1%가 된 이유도. ‘극한 직업'은 웃음과 페이소스, 두 가지가 전 국민이 이해되는 선 안에서 착실히 전달됐죠. 반면 ‘멜로가 체질’을 온전히 이해하고 재밌게 보는 사람은 친척 중에 단 두 사람이었어요. 저와 제 누나."


-유년 시절, 학창 시절의 이병헌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모험심이 없고 그에 어울리게 정적인 아이였어요. 창밖을 보며 멍때리거나 책상에 엎드려 자다가 선생님께 매일 맞고. 집에선 그나마 안전한 곳이라 여겼는지 누나한테 개기는 모험을 일삼았죠. 성적은 신기하리만치 중간에서 요지부동 움직이지 않고,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데 잘 보면 특별히 못 하는 것도 없고, 결국 특별히 잘하는 게 없으면 특별히 못 하는 게 없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일찍 깨달은 아이였어요."


-아! 네. 상당히 복잡미묘한 아이였군요.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서 정말이지 아무 꿈도 없이 애들이랑 놀러 다니기나 하다가 부모님 속만 썩였는데 사실 또 생각해보면 학원비랄지 옷이랄지 장난감이랄지 취미나 운동이랄지 뭐든 하는 게 별거 없어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비용이 아주 적게 들어간... 그 정도 양심은 지킨...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 네. 상당히 양심적이고 가성비도 좋은 자녀였어요. 그런데 국제통상학과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중소기업을 물려받을 생각으로 취직을 안 했다는 게 사실인가요? 설마 백수 시절에 처음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렇게 재밌는 대본이 줄줄 나왔다고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시골에 작은 납품업체였어요. 아무튼 그럭저럭 땀 흘리면 그럭저럭 벌어 먹고살 수 있는 정도의 일을 물려받아 시골 공기나 마시며 살려고 했어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고 공부도 못 했죠. 유일한 취미가 영화 보기 정도였어요. 취미 이상으로 좋아한다고 할 만한 것도 영화가 유일했어요. 글쓰기는 사실 지금도 크게 자신이 없습니다. 깨작깨작 시나리오를 썼고, 엉터리로라도 완성해서 공모전에 냈어요. 7전 8기로 붙었어요. 정말 그 정도 수준이었어요. 계속 쓰니 좋아졌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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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 미남임에도 낯을 심하게 가리는 이병헌과의 인터뷰는 이메일, 문자, 전화 통화… 세 개의 앵글로 완성되었다.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냅니까?


"수년째 쉬지 않고 일했어요. 요즘은 시간이 생겨서, 시간이 없어요. 이를테면 체력을 회복해야 하고 서재 정리를 해야 하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하고 채울 것을 채워야 하고 가족을 만나야 하고 그 와중에 다음 작품 각색도 해야 하죠. ‘멜로가 체질’ 대본집도 나올 예정이에요. 늘 하루가 모자랍니다."


-당신의 창작의 원동력은 부지런함인가요?


"하고 싶은 걸 포기하지 않고 해왔어요. 그뿐이에요."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것 3가지는 무엇인가요?


"태어난 것에 불만 품지 않기로 한 것. 그 불만의 유무와 관계없이 스스로 죽지 않기로 한 것. 그 다짐을 잘 지키기로 한 것."


-앞으로 이병헌 감독은 어떻게 될까요? 그는 행복할까요? 우울할까요?


"딱 10년 전에 단편 영화 촬영을 마치고 현장에 드러누워 계획을 세웠어요. 지키지 못할 거 같은데 지켜보자, 해내자, 절대 쉬지 말자, 10년 안에 감독이 되자, 데뷔하자. 그게 내 계획의 끝이었죠. 이미 초과 달성했고 드라마까지 찍었어요. ‘쉬지 말자’라는 내 생각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다짐도 지켜냈어요.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 과정에서 제가 나이 먹는다는 걸 계산하지 못했어요. 체력적으로 큰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무기력해졌고, 허무해졌죠."


-아… 그래서요?


"누군가는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멋진 은퇴를 목표로 두고 있어요. 이번 작품 다음에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되고 싶달까요. 살아보니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는 짧게 보고 당장의 나를 조금이라도 더 챙겨보려고요. 그래야 남은 시간이나마 행복해질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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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더라고요.” 앞으로는 자신의 현재를 챙기겠다는 이병헌.

수다 블록버스터라는 컨셉으로 야심 차게 시작한 ‘멜로가 체질'은 숱한 화제와는 달리 언급했듯이 1%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해 이상하게 웃기고 애틋하게 다정한 ‘친구들’과 우정을 맺었다. 벌써부터 밤이 되면 맥주 한 캔 들고 소파 주위로 두런두런 모여들던 그들이 그리워진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떡볶이를 요리할 때면 파를 많이 넣는다는 범수PD가 생각나 냉장고를 열겠지. 다른 드라마를 보다가도 문득 양념치킨과 청소기를 들고 PPL 촬영장을 뛰어다니던 한주가 생각나 웃음 짓겠지. 유독 단정한 파자마를 입고 놀던 진주와 내내 슬퍼 보였던 ‘욕쟁이 할머니’ 은정이도 이젠 모두, 안녕. 그리고 앞으로도 ‘힘내세요, 병헌 씨’.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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