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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전가한다고 문제 해결 안돼, 고통 뚫고 나가야" 기시미 이치로

‘미움받을 용기' 저자 기시미 이치로


60살에 한국어 배워, 한국 독자를 위한 철학책 써

"고통은 인생의 기본값, 타인에게 따져도 소용없어"

"청년 극단적 선택 말라, ‘살아있음’이 곧 사회 공헌"

"일본도 코로나 불안… 아베, 올림픽 연기 고려해야"

조선일보

아들러 심리학의 대가 기시미 이치로. 밀리언셀러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로 최근 신간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를 출간했다./사진=기시미 이치로 제공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가 2014년 국내에 출간한 ‘미움받을 용기'는 한국 독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들러 심리학을 바탕으로 ‘지금 여기의 자립'을 촉구한 이 책은 20대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간 비문학 도서 1위로 꼽힌다. 알라딘에서 20년간 가장 많이 팔린 책 2위, 윌라 오디오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 1위에도 올랐다. 현재까지 160만 부가 팔렸다.


이치로는 한국인에 대한 감사함과 호기심으로, 나이 육십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한국 독자들만을 위한 책을 썼다. 23명의 한국 영화 주인공이 철학자를 찾아와 삶의 고민을 토로하는 형식이다. 이름하여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이를테면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한석규),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 ‘버닝'의 종수(유아인)가 기시미 이치로에게 묻는다. 사랑과 죽음은 무엇이고, 행복과 성공은 무엇인지. 영화 ‘마더'의 혜자(김혜자)와 ‘시'의 미자(윤정희)는 자립과 양심의 문제를 들고 이치로의 상담실을 노크한다.


파란만장한 각 개인의 고민을 여는 철학자의 마스터키는 역시 아들러다.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라는 책 제목과는 달리 세상에 나쁜 기억이란 없다는 것이, 이치로의 생각이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기억을 판단할 뿐. 그러니 책은 나쁜 기억을 지운다기보다 ‘나빴던’ 과거를 재해석하며 힘을 키워가는 이야기다.


기시미 이치로는 1956년 교토에서 태어나 지금도 고향에서 살고 있다. 손녀를 돌보는 게 가장 즐거운 노년의 철학자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책의 기획자이자 번역자인 이환미 씨가 현지에서 통역을 담당해주었다.


"질문과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삶에 힌트를 주는 친구예요." 겸손과 다정이 실린 목소리가 교토에서 서울까지, 차분하게 흘러 들어왔다. 수화기 너머 이쪽 공기까지 평온해지는 말투였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코로나에 관한 안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조는 시종일관 부드러웠지만, 인터뷰 곳곳에서 아베 총리의 독단과 책임 회피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충격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느끼고 있나요?


"혼란스럽지요. 한국과는 달리 정보 공개가 투명하지 않아 불안감이 누적되고 있어요. 정치가들이 보건 전문가에게 묻지 않고 정치적 판단을 내려서 불만이 더 커졌죠. 다른 쪽에선 외부의 눈을 의식해서 ‘조용히 하라'고 훈수를 둡니다."


선생 같은 철학자는 여기서 어떤 목소리를 냅니까?


"불확실성의 시대엔 ‘누구든지 틀릴 수’ 있어요. 그게 기본 전제죠. 하지만 재난 상황에선 전문가들을 존중해야 해요. 동시에 논리적으로 대응해야죠. 일단은 진정하고 겸허하게 사태를 받아들인 후, 협력해야 합니다."


협력은 공포에 대응하는 가장 인간적인 대응이지요. 해외 의학 저널에서는 ‘앞으로 세계인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를 앓고 지나갈 것'이라는 의견도 있더군요. 박멸이 불가하니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라는 거죠.


"코로나는 이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코로나의 행동반경은 이미 국가의 틀을 벗어나 있죠. 정치권이 자국의 위기와 재난으로만 문제를 좁히면 사태가 더 심각해집니다. 국제적인 협력과 합의가 필요해요. 아들러가 말한 대로, 틀을 벗어난 큰 개념의 공동체를 생각할 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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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인터뷰 이후에 한일 양국 사이에서 국경 폐쇄에 가까운 긴장 상황이 벌어졌다.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고 확인할수록 타인은 점점 미스터리가 된다고 얘기하는 기시미 이치로.

이번에 선생은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어 한국인을 위한 오리지널 콘텐츠를 내셨더군요. 이유가 있습니까?


"한국의 독자들, 특히 청년들이 ‘미움받을 용기'에 실천적으로 반응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한국인들에게 감동했어요. 한국이 변화하는 속도는 경이롭습니다."


그에 비하면 일본 청년들은 결단력이 부족하다며 안타까워했다. 변화무쌍하고 용기 있는 한국 독자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생각해 낸 매개체가 한국 영화였다. 그의 한국어 선생이자 영화 전공자였던 이환미 씨의 도움으로 영화를 골랐다.


한국어 읽기 실력이 상당한가 봅니다. 소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한글로 읽었다고 해서 놀랐어요. 한국 청년들은 하루키를 많이 읽었습니다만.


"하하. 서로 다른 맛이죠. ‘청춘의 문장들'엔 착한 노스탤지어가 있어요. 부모 세대는 가난했지만, 거기서 누린 행복의 감수성이 있죠.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인생을 진지하게 살되 심각해 지진 말자.' 책을 보면 김연수 작가도 저와 같은 생각이더군요(웃음). 저는 젊을 때 방황을 했고, 여러 실수를 반복했지만 진지함을 놓지 않았어요. 그렇게 보낸 청춘이 현재 내 용기의 밑거름이 됐지요."

영화 ‘봄날은 간다'부터 ‘동주'까지 19편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 23인과 나눈 기시미 이치로의 흥미로운 상담일지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신작인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는 영화의 등장인물이 고민을 안고 철학자를 찾아오는 형식입니다. 특별히 더 애틋한 캐릭터가 있습니까?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다림(심은하)이요. 책에서는 정원(한석규)을 다뤘지만, 마음을 주었던 남자가 죽은 후 다림이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상상을 해봐요. ‘버닝'의 청년 종수도 애틋합니다. 저는 종수를 통해 제 삶을 돌아봤어요. 유아인 씨의 연기가 좋더군요(웃음). 그는 작가 지망생이었고 사회 부조리 앞에서 방관자로 머물지 않고, ‘어떤 선택’을 했어요. 대단한 용기죠. 종수의 방황에 저 자신의 방황을 겹쳐보면서 다시 묻게 되더군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선생은 구체적으로 어떤 청춘을 살았습니까?


"인생의 의미에 대해 줄곧 질문을 던졌어요.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될 줄 예감했죠(웃음). 돈은 단념했지만, 명예욕은 있었어요. 그런데 25살에 쓰러진 어머니의 병간호를 맡아야 했죠. 한창 나이에 명예욕도 내려놓고, 의식 없이 누워있는 육친을 돌봐야 했습니다. 인간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어요."


괴테의 말이 큰 위로가 되더라고 했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방황하는 존재다'

우문이지만 나이 오십인 제가 방황하는 것도, 노력하기 때문일까요(웃음)?


"그렇습니다. 방황은 나이 들어도 계속 이어지죠(웃음)."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절대 아닙니다. 그건 내가 인생을 진지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지요. 철학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엔 정답이 없어요. 고민하는 건 여전히 청춘이기 때문입니다."


미성숙해서가 아니고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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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 이치로는 정원(한석규)과 함께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고통의 현존을 강조하는 이유는 뭐지요?


"사는 게 고통이라는 건 벗어날 수 없는 진리예요. 새는 진공 상태에서 날 수 없습니다.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선 공기 저항이 필요하죠. 인간도 고통이라는 저항을 통과해야 앞으로 나갑니다. 고통을 ‘바람’이라고 생각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고통이 인생의 기본값이라면, 타인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까?


"네. 책임을 전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아요. 우리는 그저 고통을 뚫고 나아가야 해요. 부모에게 사랑을 못 받아서 내가 이렇게 망가졌다고 원망해봤자, 과거는 바꿀 수 없어요. 과거를 해결하기 위해선 해석을 달리하는 방법뿐입니다. 부모가 나를 고의로 잘못 키운 게 아니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잘 몰랐을 뿐이라고요."


많은 성인이 부모와의 어긋난 관계로 고통받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식이 먼저 나이 드신 부모를 사랑해야 한다’지만, 그또한 쉽지 않다. 이치로는 사랑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존경'이라고 조언한다.


나이 든 부모와 함께하려면 사랑에 앞서 ‘존경하라’는 말에 뜨끔했습니다.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의 유일무이함을 아는 능력이라고요.


"맞아요. 존경은 나의 발견이고 결심입니다. 상대에 대한 능력 평가가 아니죠. 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를 오랫동안 간호했어요. 그전에 아버지가 제게 전화해서 1:1로 대면했습니다. 일종의 카운슬링인데, 아버지는 아버지의 타이틀을, 저는 자식의 타이틀을 떼고 만났어요. 개인 대 개인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던 경험은 이후 아버지를 돌보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일대일 대면 후, 늙으신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됐나요?


"내가 알던 젊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지요. 알츠하이머가 진행된 후, 가끔 안개 속에서 머리가 개인 날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얘야, 잊어버린 기억은 어쩔 수 없단다."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이 있어요. 예전엔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론 집착하지 않게 됐어요.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아졌죠."


그는 아버지의 유일무이함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타인을, 그리고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라는 말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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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 이치로는 두번째 책을 낸다면 ‘기생충'을 꼭 포함시키고 싶다고 했다.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에 등장하는 19편의 한국 영화에서 나는 광기 어린 부모와 성공의 딜레마에 빠진 많은 청년을 만났다. 보통의 우리처럼 그들은 현실의 진짜 문제를 회피했고, 왜곡된 관계의 피해자로 머물렀다. 그러다 더는 뒷걸음질 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초인적인 용기를 냈다. 어떤 용기는 충동적이고 파괴적이었고, 어떤 용기는 한계를 뛰어넘었다. ‘미움받을 용기'란 과연 무엇을 선택하는 용기일까.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를 언급하면서 많은 부모가 자식의 자립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자기 불안으로 자식의 성장 동력을 마비시키는 부모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요.


"많은 부모가 망각합니다. 육아의 목표는 자립이라는 걸. 어린아이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아이는 부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빨리 성장합니다. 되도록 아이에게 문제 해결의 기회를 줘야 해요. 사사건건 개입하고픈 욕구를 누르고 최종적으로 협력하는 관계로 가야죠. 잘 협력하려면 누구의 과제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해도 되는 유일한 말은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예요. 아이가 "없다"고 하면 멈춰야 해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거지요?


"맞아요. 끈적거리는 관계는 좋지 않아요. 너무 차가울까 걱정도 마세요. 시원한 관계가 좋습니다."


영화 ‘마더’의 혜자(김혜자)와 영화 ‘시'의 미자(윤정희)는 자식과 손자의 범죄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합니다. 도준이 엄마는 아들의 범죄를 더 약자에게 뒤집어씌우고, 미자는 가슴 아프지만, 손자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죠. 어찌 보면 가족을 바라보는 두 감독(봉준호와 이창동)의 영화적 온도 차이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도준이 엄마의 행동을 이해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저도 그랬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그게 누구의 과제인가 분별해야 합니다. 본인이 수치스럽더라도 책임지는 법을 가르쳐야죠. 미자는 그걸 했어요.


요즘 세상엔 애정 결핍보다 애정 과다가 문제예요. 부모 입장에선 애정 과다인데, 아이는 애정 기아라고 느끼죠. 왜냐? 부모가 아이를 신뢰하지 않아서예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기다려줄 때, 아이는 부모의 진짜 사랑과 힘을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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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2차 대전 때 개인을 버리고 국가를 위해 투신하라고 했어요. 그 폐해를 충분히 겪었습니다. 아들러가 말한 공동체 감각은 그런 ‘국수주의'와는 달라요. 자신이 소중하기에 타자도 소중하다는 연결감이죠.”

공헌감에 대해서 얘기해 보죠.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발견했나요?


"저는 오십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죽음 근처까지 갔어요. 침대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니 절망감만 깊어졌지요. 그때 문득 ‘쓰러진 사람이 내가 아닌 내 가족, 내 친구였다면’하는 가정을 해봤어요. ‘위급상황이라도 살아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깨달았어요. 살아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는 걸.


아버지가 누워계실 때도 "제가 할 일이 없으니 안 와도 되겠지요?"했더니 "아니다. 네가 있어서 안심하고 누워있다"고 하셨죠. 분주하게 일하지 않아도 옆에 있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는 거죠. 제 경험처럼 효능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공헌인 겁니다."


사실, 저는 오늘 점심 식당에서 밥과 국그릇을 깨끗이 비우며 공헌감을 느꼈어요. 서빙하시는 분들은 맛있게 먹는 저를 보며 공헌감이 들었겠죠. 그렇게 보니 인류공동체는 크고 작은 공헌감을 주고받으며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죠.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어요. 공동체를 이야기했지만, 가장 작은 공동체가 ‘너와 나’입니다. 큰 공동체만큼이나 작은 공동체의 공헌감은 소중해요. 공헌감은 ‘내가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이에요. 그래서 ‘소확행'과 연결돼 있습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김태리)은 취업에 실패하고 고향의 친구 곁에서 힘을 얻지만 불안해하잖아요. ‘다시 서울에 못 갈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저는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봐요.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에요. 행복하기 위해 일하는 거죠.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다면 일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경중에 상관없이 일을 하면 누구나 공헌감을 주고받아요. ‘행복을 팔고 있다'는 느낌이 들죠. 저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일하는 한 청년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그가 밝게 사는 모습에 저도 행복해져요. 고마움이 절로 들죠.


반면 제 아내는 ‘고맙다'는 표현을 잘 안 했어요(웃음). 그 사람은 자기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거죠. 생각을 바꿔야 해요. ‘감사'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잠깐이지만 교류의 기쁨을 표현하는 거죠.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란 건 사람들이 ‘고맙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는 거였어요. 일본인은 ‘아리가또'에 인색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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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를 재우며 원고 작업을 하고 있는 이치로. 그는 고대 플라톤 철학을 전공했지만, 1989년부터 아들러 심리학을 연구해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요즘엔 ‘고난을 고상하게 견디라'고 한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는 아우슈비츠에서도 깨진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했다고 ‘마지막 수용소'에서 썼지요. 선생은 고통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며, 고통과 어떻게 마주하는가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했어요. 무슨 뜻입니까?


"대부분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가거나 희생양을 찾죠. 고통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선(善)입니다. 사실 고상하게 견디는 건 덜 중요해요(웃음). 가령 죽음 앞에서 가족에게 ‘고마웠다'고 의연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아도 돼요. ‘슬프고 힘들다'고 표현하는 것도 용기지요. 사람마다 견디는 수준이 다릅니다."


선생은 고난을 고상하게 견뎠습니까?


"글쎄요. 허허. 저는 7년 반 동안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가고 오면서 육아를 했어요. 상황이 그렇다 보니 정규직을 가질 수 없었죠. 아버지 병간호 3년, 어머니 수발도 1년간 들었어요. 당시엔 하루빨리 제대로 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어요.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가장 큰 고난이었죠. 육아라니, 간호라니… 그러나 내가 깨달은 건 현실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그래서 ‘이왕 할 거면 즐겁게 하자’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도 얘기했지만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해요. 눈앞의 아이들, 눈앞의 아버지! 사회 공헌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가 정말 감사해요. ‘아이들 어릴 때 시간을 보내서 참 행복했어. 아버지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하다니 정말 행운이야.’ 하하."


타고난 인생 철학자시군요!


"하하. 철학자는 ‘그레이트 헝거’예요. 고통을 맛보고 좌절을 경험하면서 그레이트 헝거가 되지요(웃음). 보통 사람은 ‘리틀 헝거'에서 멈춥니다."


어느 쪽이든 굶주림을 피할 수는 없군요.


"인간은 늘 배가 고프죠. 어떤 굶주림이든 완전히 채울 수는 없어요. 다행히 욕망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그레이트 헝거'는 굶주림 덕분에 인생이 풍요해지죠."


‘헝거'에서 ‘그레이트 헝거'로 가는 게 진정한 문명화의 과정이 아닌가,라고 되물었더니 노철학자는 크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고통’과 ‘공헌감' ‘존경’과 ‘자립'에 관해 대화를 나눈 후, 나는 이 자상한 철학자와 진짜 나누고 싶었던 실제적 이야기를 꺼냈다. 현대인이 골머리를 앓는 결정장애에 관해. 삶은 결국 내가 한 선택의 누적분인데, 왜 우리는 이다지도 선택을 두려워하는가.


이치로는 이번 책에서도 가장 첫 영화로 ‘봄날은 간다'를 다루며 주인공 상우(유지태)가 매사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상대에게 결정을 미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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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의 한 장면.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는 각자의 고민을 안고 철학자를 찾아온다.

현대인들은 왜 이다지도 결정내리는 게 힘든 걸까요? 망설임의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결정을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결정하기 싫은 겁니다(웃음).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죠. 상대방이 결정하도록 유도하면,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거든요. 안타까운 건 당사자들은 자신이 무책임하다는 걸 모른다는 겁니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아베는 코로나 사태로 전국 초중교에 휴교를 요청하면서, 그 결정을 교육부와 학교장에게 맡겼어요. 책임을 전가한 거죠. 문제는 이렇게 결정을 미루면서도 자신은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거예요."


방법은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는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결정이 편하다고 했다.


"역설적으로 이걸 택하면 후회하겠지,싶은 걸 택하는 게 심리적으로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걸 선택하든 후회할 테니까요. 덧붙여 한번 내린 결정을 반드시 고수할 필요는 없어요. 번복하는 걸 주저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일본도 올림픽을 해야 한다는 대전제 때문에 코로나 확진자 수를 줄이고 싶어 하죠. 제 생각엔 올림픽을 중지하는 것도 결단이에요. 일본은 과거 2차 대전 종전도 결단을 내리지 못해, 피해가 막심했어요. 교훈을 잊지 말고 어떤 상황이든 유연한 태도를 취해야 해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결정을 내린다는 건, 결국 ‘미움받을 것'을 감수하고 자기 삶의 핸들을 쥐겠다는 결심이군요.


"맞아요. 그걸 깨달아야 앞으로 나가는 존재가 됩니다. 하지만 선택이 너무 어려울 때는 믿을만한 사람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해야 해요."


지난 가을, ‘총균쇠'를 쓴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를 만났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위기 앞에서는 개인의 해법이나 국가의 해법은 다르지 않으니, 좋은 비교 대상을 선택해 적극적으로 배우라는 거죠.


"명심할 건,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내 인생을 ‘유보' 상태로 두면 안 됩니다. 결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세요. 주변에 나를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정도 미움은 자유롭게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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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사진을 찍는 취미가 생겼다는 기시미 이치로.

문득 궁금합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유독 한국에서 그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낸 이유가 뭘까요?


"슈베르트는 우물가에서 물긷는 아낙들의 노래를 듣고 감탄했어요. 그 민요를 바탕으로 좋은 곡을 많이 만들었죠. 완전히 새로운 걸 창조한 게 아니라 원래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을 정교하게 내놓은 거죠. ‘미움받을 용기'도 그래요(웃음). 한국인들이 느끼고 있었지만 ‘새로운 분명함'으로 다가온 거죠.


또 하나는 한국인들의 마음에서 ‘잃어버린 퍼즐’ 같은 게 아니었나 싶어요. ‘미움받을 용기'라는 조각을 끼워 넣으니 인생 전체의 그림이 제대로 보였던 거죠."


잃어버린 퍼즐이라…


"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인생을 걸어가야 한다는 거죠. 유대교에는 ‘내가 내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있어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전전긍긍하다가는 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더라도 자식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자기 인생을 살아야죠. ‘미움받도록 행동하라’가 아니에요(웃음). 미움받을까 봐 조마조마해 하며, 자기 인생을 버려두지 말라는 거죠."


결국은 용기의 문제일까요?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청년과 중년을 위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인생에서 조금만 변화의 용기를 내면 여러 변화가 연쇄적으로 일어납니다. 부디 각자 자기 삶을 살아주세요. 그게 전부에요. 청년에게 당부할 건 한가지예요. ‘사는 건 고통이지만 죽지는 말아달라.’ 부디 존재 그 자체로 가족과 이웃에 공헌하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한창 일하는 중년은 은퇴를 생각하면 고민이 많겠지요. 하지만 나이듦은 퇴화가 아니라 변화의 시작이에요. 저도 60살에 한국어를 배웠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됐어요. 생산성이 떨어져도 ‘내가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래요.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 춤이니까요."

조선일보

그는 일본 청년들이 극단적 선택을 많이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탓이 아니에요"라는 위로를 건네기보다 인생의 바탕은 고통이니,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찾으라고 조언한다.

‘일본에서 인터스텔라를 늘 기대하고 있다'는 말로 3시간 가까운 대화가 끝이 났다.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미움받을 용기'에서 무게 중심은 ‘미움'이 아니라 ‘용기’였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선택할 용기, 후회를 감수하고라도 무언가를 결정할 용기, 그 무엇보다 미움에 지지 않고 나 자신에 진실해지려는 용기. 철학자는 고통을 외면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공기 저항을 밀어내고 새가 날듯, 오늘 여기의 고통을 통과할 용기를 내본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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