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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조선일보

제가 과학자로 보이세요? 이 남자, 대학로를 삼키다

[김태형] 카이스트 자퇴하고 한예종으로…

뮤지컬·창극 등 맡는 작품마다 틀 깨뜨린 연출로 관객 몰고 다녀

신작 록 뮤지컬 '리지' 내일 개막

"여성·소수자·이민자 등 약자에게 용기를 줄 작품 많이 만들고파"


2일 서울 대학로에서 막 올리는 록 뮤지컬 '리지'는 "시원하게 남자들 때려주는 여자들 이야기"다. "오랜 가부장제와 케케묵은 제도를 도끼로 자르고 불태워 없애는" 신작이다. 이 무시무시한 작품 뒤에 연출자 김태형(42)이 있다. 헝클어진 머리, 아무렇게나 기른 수염이 영락없이 자유인이지만, 학창 시절 전교 1등을 도맡아 했고 로봇을 만들겠다며 과학고에 들어간 공학도다. 카이스트에 진학했지만 3년 만에 자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다시 들어가 끝내 대학로에 눌러앉은 괴짜. 맡는 작품마다 연극·뮤지컬의 기존 틀을 파괴해 대학로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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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잘 만든 여성 서사극'이란 호평 속에 막 내린 뮤지컬 '마리 퀴리'도 김태형 작품이다. 그는 "과학고 시절 가장 친했던 여학생이 카이스트 간다길래 나도 따라갔다. 여성·소수자·이민자 등 약자의 좌절과 용기를 다룬 작품을 많이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2년 전 국립창극단에서 선보인 '우주소리'는 페미니즘 SF 창극이었다. 뮤지컬 '오늘 만드는 뮤지컬'에서는 관객들이 즉석에서 선택한 주인공과 주제로 배우들이 그 자리에서 이야기와 노래를 만들게 했다. 연극 '모범생들' 땐 관객을 아예 분장실로 초대했다. "땀 흘린 배우들이 퇴장할 때 묻혀 오는 열기까지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지난주 충무아트센터에서 만난 김태형은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전·월세 계약에 따라 북가좌동, 신사동으로 이사 다니며 동네 여기저기를 섭렵한 게 연출의 밑바탕"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요, 사촌형들이 과학고·카이스트를 다녀서 자연스럽게 그런 세계를 알고 있었어요"라는 말도 밉지 않게 했다. "로봇을 만들어 그걸 타고 다니는 '김 박사'가 돼서 공상의 세계에서 살자는 게 어릴 적 꿈이었죠." 그러나 한성과학고에 진학한 뒤 '나보다 잘난 사람 엄청 많구나'를 절감하면서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연극반 활동이었다.


고2 때 학교 축제에서 윤대성 희곡 '신화 1900'의 연출을 맡았다. 공연 당일 관객들이 흥미로운 눈으로 무대에 집중하는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못 가본 길을 가본 거죠. '내가 남들한테 정서적인 울림을 줄 수 있구나' 깨달은 순간이 터닝포인트가 된 겁니다." 카이스트에 들어가서도 연극반 활동을 계속했다. 여전히 로봇을 만들겠다고 전기전자를 공부했지만 "인생을 걸고" 자퇴, 1999년 한예종에 들어갔다. 부모는 "방송사 PD처럼 또박또박 월급 나오는 일" 하라며 외아들을 눈물로 붙잡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론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열심히 만들어도 작품당 관객 1만명 모으는 게 진짜 어려운 거예요." 다만 연출을 거듭하면서 그를 겸손하게 바꾼 건 관객들 편지였다. "자기 삶에 이 공연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써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연극 '오펀스' 땐 한 집안 장녀인 분이 자신이 겪은 정신적 상처가 뭔지 확실히 알게 됐고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죠. 탭댄스가 테마인 뮤지컬 '로기수'가 끝나고선 오래 묵혔던 춤을 다시 추기로 마음먹고 학원에 등록했다는 손편지도 받았어요. 막연한 공상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열망을 제가 갖고 있는 역량 안에서 이룰 수 있었던 거죠."


김태형은 "여성·소수자·이민자 등 약자들의 좌절과 그들을 향한 차별, 그럼에도 다시 일어서는 용기를 다룬 작품을 만들고 싶다"며 "내게도 두려움은 있다. 프리랜서인 내가 다음 작품은 실패할 수 있고, 그래서 내 자리는 없어질 수도 있다는 공포"라고 했다. "그걸 컨트롤하는 게 힘든데 덕분에 정신 바짝 차리고 꾸역꾸역 일하게 되니까, 그 공포와 두려움이 다음 작품을 쓰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김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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