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유성 "노후대비는 돈 아닌 일... 후배들 판 깔아주고 삥 뜯지 말아라"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삼십대부터, 노후대책은 돈이 아닌 일로 해야"
"후배에게 판 깔아주는 건 선배의 도리"
"나는 새가슴에 잔머리꾼… 시집 읽고 애처럼 공상"
"청도에서 했던 문화콘텐츠, 남원에선 안할 것"
"땅부자? 지리산 기슭에 50만원 월세 살아"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은 현역 개그맨 전유성(70세). 개그맨인 동시에 문화기획자이자 여러 권의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사진=이태경 기자 |
유튜브에서 전유성이 마흔 살에 했던 스탠드업 코미디 ‘위기의 남자'를 봤다. 폭소와 미소의 경계에서 진지하게 노니는 그에게 지나가던 사람이 훈수를 뒀다.
"쯧쯧. 자네도 이제 돈 벌어서 노후대책을 해야 되지 않나?"
"그래? 자네는 계속 돈을 벌며 노후를 대비하게. 나는 일을 하면서 노년을 맞을 테니. 내 노후 대책은 돈이 아니라 일이야."
순간 정수리가 깨지는 듯한 충격이 왔다. 돈의 구속과 일의 행복, 노후의 괴로움과 노년의 즐거움을 분리하는 저 지혜를 전유성은 40대 때 이미 알았구나.
‘내 노후 대책은 돈이 아니라 일'이라는 전유성의 말장난 같은 선언은 ‘돈 되는 일’보다’ 재미난 일’을 좇는 그의 다양한 행적으로 이어졌다. 일찍이 개그맨에서 문화기획자로 일의 범위를 넓힌 전유성은 인적이 드문 지방 소도시에 코미디 극장을 세우고, 흥미로운 문화행사를 열어 사람을 불러모았다. ‘돈과 일과 노후'에 대한 삼단논법에서 보듯 그에게 고정관념이란 없어보였다. 한물간 ‘야인’인가 하면, 어느새 주류보다 한발 앞에 가있는 전유성.
문득 90년대 인사동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전유성의 카페 ‘학교 종이 땡땡땡’이 떠오른다. 그가 칠판에 써놓은 교훈은 ‘공부해서 남 주자’다. ‘공유’가 최우선 가치인 21세기 시민 사회를 뚫고본듯, 예지력 있는 유머가 아니던가. 전 MBC PD였던 주철환은 이런 전유성을 일컬어 ‘괴짜의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했다.
올해로 70살이 된 그는 ‘일이 노후대책'이라는 걸 증명하듯 서울, 전주, 제주를 돌며 데뷔 50주년 기념 쇼를 치르고 있었다. ‘전유성의 쇼쇼쇼-사실은 떨려요'는 상식을 뒤집는 공연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건 2시간 짜리 쇼에 정작 주인공이 11분만 나오는 경우는 처음 봤다. 조혜련이 골룸 분장을 하고 좌석을 안내하고 클래식 연주자들이 ‘함부로' 공연을 저지당하는, 이 본격적인 ‘주객전도 쇼’의 배후엔 멀대처럼 키 큰 노신사, 전유성이 있다.
‘코미디'와 ‘예능’ 사이의 어디쯤 ‘개그'라는 신조어를 이식한, 놀라우리만치 쇼맨십이 없는 예측불허의 쇼맨을 만났다. 그가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쓴 단어는 ‘후배들이'었다. 그 후배들에게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너는 잘될 거야'와 ‘나라고 어떻게 다 아니?’다. ‘후배들에게 판 깔아주고 덕담해주는 건 선배의 기본'이라고 했다.
곱씹어 볼수록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는 예지력 있는 언어를 쓰는 전유성. 그는 코미디언이 아닌 방송 작가로 데뷔했다./사진=이태경 기자 |
전유성 단독쇼를 기대하고 갔다가 ‘번호표' 들고 줄서듯 대기 중인 초호화 출연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사실 그동안 살면서 내가 남들보다 못 웃겼어요. 후배들이 대놓고 그러잖아. "지가 웃겼나? 후배들이 웃겼지." 그런데 난 항상 정사보다 야사에 남기를 바랬어요. 이번에 ‘50주년 기념 쇼쇼쇼'도 후배들이 작당해서 만들어놔서 나는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죠. 2시간 중 내가 못해도 50분은 스탠딩 코미디를 해야잖아. 그런데 이영자, 이문세, 옹알스, 심형래, 임하룡… 출연진이 막 밀려들다 보니, 나중엔 나한테 앓는 소리를 해요. "형님, 시간이 없으니 형님은 한 7분만 하시죠(웃음).""
‘전유성 쇼쇼쇼'에서 전유성이 무대에 나오는 횟수는 2번, 시간은 도합 11분 정도다. 코메디쇼, 노래쇼, 마술쇼로 구성된 이 쇼는 전유성과 그의 우산 아래서 자란 후배들이 펼치는 버라이어티한 칠순잔치다. 막전극, 막간극, 막후극까지… ‘인해전술’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무대로 쏟아져나오는 역대급 출연진에, ‘전유성쇼’의 게스트는 전유성으로 보인다.
마술사 최현우부터 배우 박중훈까지, 각자 겪은 전유성과의 일화만으로 쇼를 만들어도 재밌겠다 싶었어요.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결국 오지 못하는 전유성을 기다리며(웃음).
"(손을 휘저으며)말도 마세요. 이 친구들이 나를 얼마나 디스하고 씹어대는지(웃음). 다들 세밀한 일들을 잘도 기억하고 있더구먼. 임미숙이는 김학래와 결혼할 때 내가 두 사람 이름 들어간 문패를 만들어 선물했다던데, 나는 기억도 못 해요."
후배들에게 사랑받는 비결이 뭡니까?
"삥만 안 뜯으면 됩니다. 일 연결해 주고 소개료라고 돈만 떼먹지 않으면 돼요."
사심이 없으시군요.
"선배가 후배 사랑하는 건 당연하지. 길 열어주는 건 기본이에요. 다들 바빠서 못했을 거야. 난 다른 일 할 게 없으니까 했죠."
요즘은 각자도생이라 제 욕심만 채우기도 바쁩니다만.
"(눈을 크게 뜨며)나도 욕심 많아요. 운동을 잘했으면 좋겠어. 마술도 좀더 잘 하고 싶고. 그런데 마술은 내 사위가 더 잘하더구만. 개인지도를 좀 해줬더니. 그 덕에 내 딸(전제비)이 딴따라 아버지를 좋아하게 됐어요."
청도에서 남원으로 간 지 1년 정도 됐지요? 어떻게 지내세요?
"쉬고 있어요. 누워서 뒹굴뒹굴 해요."
평화롭군요.
"평화롭지. 근심할 일이 있나."
지금은 초록이 한창이겠습니다.
"연두빛이 온통 초록이 됐죠. 시골 살면 좋은 게 뭔지 알아요? 보기 싫은 사람이 온다고 할 때 도망갈 핑계가 있어. ‘어쩌냐? 나 마침 서울 가는데(웃음).’"
웃기보다 찡그리기를 잘하는 인상파 개그맨 전유성./사진=이태경 기자 |
문득 궁금합니다. 개그맨은 언제 어디서든 웃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나요?
"본능적으로 그래요. 중요한 얘기 하다 웃긴 이야기로 빠지면, 웃긴 이야기가 더 중요해져요. 오죽하면 이용식하고 코미디 클럽 상의하려고 만났는데, 농담 따먹기만 하다 끝났어. 집에 가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내가 웃긴 얘기 하려고 서울까지 왔던가...’ 그런데 그렇게 서로 실없이 웃기다가 아이디어가 나오거든요."
쇼의 부제가 ‘사실은 떨려요’인데, 어찌 보면 50년 내내 한결같이 어눌하게 긴장한 모습입니다.
"항상 어색해요. 잘못하니까 떨리고 조심스러운 거죠."
새가슴인가요?
"천성적으로 새가슴이죠. 난 농담할 때도 남한테 상처 주는 말은 안 했어요. 대개 "농담인데 데 왜 화를 내?" 그러는데, 상대가 불쾌하면 그거 유머 아니에요. 농담의 기본은 쌍방향. 그래서 외모나 신체를 비웃는 건, 조심해야 해. 실수하면 바로 사과해야죠."
기분 좋게 웃겨야 한다?
"가능하면 정직하게.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못 하는 게 정말 많아요. 길도 잘 몰라 길치, 방향치예요. 어느 날 가만 생각해보니 나를 제대로 정의하는 말은 ‘삼치'더라고."
삼치라니요?
"삶치. 삶이 뭔지, 내가 잘살아왔는지, 모르겠다는 뜻으로 ‘삶치'예요."
물 만난 고기처럼 주변에 사람이 모이던데요. 삶을 잘 살았다는 증거 아닌가요?
"그렇지도 않아요. 50주년 기념 공연한다니 다들 좋은 얘기만 하는 거죠. 모이는 게 별 건가? 먼저 연락하면 되는 거예요. 어떤 선배들 보면 후배한테 "늬들, 왜 연락을 안하니?"그러는데, 그거 이상한 거야. 궁금하면 자기가 먼저 연락하면 되거든. 서수남 씨도, 김도향 씨도 선배인데 "어떻게 지내니?" "아프니?"하며 먼저 연락들을 하세요."
전유성의 스승이었던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 구봉서와 콤비로 인기를 끌었다. |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의 원고를 써주다가 개그맨이 되셨어요. ‘개그계의 단군’에게도 좋은 스승, 선배가 있었다는 게 놀랍더군요.
"어릴 때 친구들이 날더러 ‘후라이보이 2세'라는 별명을 붙여줬는데, 그게 각인이 됐던가봐요. 성인 돼서 코메디언이 되고 싶은데 막상 찾아갈 사람이 없었죠. 그때 방송국에 몰래 들어가서 화장실 가는 곽규석 선생을 붙잡고 막무가내로 내가 대본을 써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시작했어요."
스승의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의 유전자 중 가장 좋은 뿌리를 찾은 것처럼, 자랑하고 싶어 말이 빨라졌다.
"후라이보이 선생은 검소하고 인자하신 분이었어요. 큰돈을 저한테 맡기셨는데 중간에 한 번도 ‘얼마 남았냐'고 안 물어보셨어요. 사람 만날 땐 찻값 아깝다고 식당에서 만나고, 정동에서 남산 KBS까지 걸어 다니셨지. 그런데도 선생님 기사는 다른 기사보다 자기 월급이 가장 많다고 자랑을 했거든."
언제 내가 스승을 닮았다고 느끼세요?
"나도 약속하면 찻집에서 안 해요. 교보문고에서 하죠. 그 덕에 경상도 전라도 각 지역 교보 문고는 어딨는지 다 알아도, 시내 딴 곳은 아는 데가 없네. 사실 곽규석 선생님은 ‘코미디는 이런 거야' 가르쳐준 적은 없어요. 그분은 고급코미디 할 때나 극장 쇼 할 때나 다 맞춤으로 하셨어요. 노래도 외국어도 원맨쇼도 다 되신 분이야. 안타깝게도 나는 그게 다 안됐어요."
전유성은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색다른 스타일의 현대적 삼국지 ‘전유성의 구라 삼국지’ 10권을 펴내기도 했다. |
스승과 비교하면 좌절이 컸겠습니다.
"나는 그랬죠. 반면 후배들을 보면 그 재능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신이 나서)안 시켜줘서 못하지 시켜만 주면 다들 날고 기었죠."
이영자, 이문세, 신봉선, 안상태 등등… 수많은 후배를 데뷔시켜준 거로 압니다.
"그냥 내가 먼저 발견했을 뿐이에요. 나 아니라 누구한테 발견됐어도 잘 됐을 친구들이에요."
방송사 공채에서 8번 낙방한 이영자가 2천만원 싸들고 방송 출연시켜 달라고 전유성을 찾아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에게 훈련받은 이영자는 4개월 후 MBC 특채로 들어갔다. ‘그때 그 돈, 받을 걸 그랬다'고 전유성은 종종 농담을 한다.
주변에선 ‘현자’라고 부르는데 본인은 정작 ‘잔머리꾼'이라고 생각한다지요?
"맞아요. 잔머리꾼. 잔머리를 굴려서 세상을 좀 다르게 보는 거죠. 20대 때도 다들 청춘물 주인공 하려고 할 때도 나는 아저씨, 노인 역을 공략해서 오래 갔어요. 내 화법도 알고보면 잔머리야. 난 평소에 시집을 많이 읽어요. 값도 싸고 몇번씩 봐도 다른 게 보이거든. ‘소금은 바다의 사리다' 이런 표현 정말 근사하지 않아?"
김용택, 안도현, 이정록… 서정 시인들의 시를 주로 읽는다고 했다. 코미디의 감수성을 시의 감수성에서 수혈받는다는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요즘엔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20년 만에 다시 읽으니 새롭더라고.
복날에 열린 ‘개나 소나 콘서트'. 전국 각지의 애견인들이 청도로 몰려들었다. |
어떻게 하면 세상을,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습니까?
"난 애들처럼 생각해요. 루브르 박물관 가면 다들 그림만 보잖아. 난 액자만 보거나, 앉아서 그리는 어린 애들만 보고 오는 식이에요. 남들 안 하는 생각을 하면 즐거워. 학창시절에도 교장 선생 훈화할 때 벌이 날아들면 다 움츠리는데, 난 그순간 벌이 교장 선생님 대머리를 쏘면 어떨까, 공상을 했어요."
더불어 세상만사에 ‘왜?’라는 질문을 수시로 던진다. 32만명의 관광객을 지방 도시 청도로 불러모았던 ‘개나 소나 콘서트'도 바로 그 ‘왜?’에서 탄생한 프로젝트다. "반려동물 때문에 여름 휴가를 못 간다고? 왜?"라는 질문으로 ‘개와 고양이를 데리고 함께 즐기는 콘서트’를 만들었다. 사람도 동물도 다 기뻐 아우성이었다. 20명 이상만 ‘코미디'를 주문하면 밤 11시에도 공연을 해주는 심야극장도 그런 발상의 전환이 만들어낸 결과물.
공상을 즐겨한다는 전유성. 키184cm로 탤런트 시험에 4번 떨어진 후 개그맨이 됐다./사진=이태경 기자 |
꼰대 기질은 없습니까?
"나는 내가 꼰대라는 걸 부정 안 해요. 그건 마치 늙는 걸 부정하는 것 같거든. 다만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건 인정해요. 후배들이 심각한 걸 물어보면 내 대답은 "나라고 어떻게 다 아니?"에요. 결혼식 주례사할 때도 마찬가지야. 지금 하는 온갖 좋은 말은 기억도 못할테니, 문제 생기면 찾아오라는 거죠. 적어도 내가 같이 고민해줄 수는 있으니까.
그걸 개그맨 뽑아놓고 교육시킬 때 깨달았다고 했다.
"어느날 둘러보니, 나혼자 떠들고 있더라고. 말도 안되는 거지. 그 즉시 나는 입 다물고 후배들 시켰어요. 말 터지니, 신봉선이고 김대범이고 안상태고 그 친구들이 진짜 웃기더구먼."
잘 웃지 않고 인상 쓰는 모습을 보면 일본의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기타노 다케시가 떠오릅니다.
"에이, 기타노 다케시와 난 비교가 안 되죠. 오히려 남희석이나 박준형이 잘 훈련하면 그 정도는 될 거야. 연기도 아이디어도 되는 친구들이니까. 나? 난 연기를 못해요. 받쳐주는 역할을 주로 했죠. 아이디어를 잘 살리는 건 최양락, 연기력은 임하룡이 뛰어나요. 장동민, 유세윤은 유상무가 받쳐줘서 살았고, 졸탄도 옆에서 리시브를 해주니까 한현민이 스트라이커가 돼요. 꽁트도 인생도 다 그런 조화가 있어요."
생각해보면 특출한 쇼맨십도 없는 분이 어떻게 은퇴 없이 50년을 이어왔을까요? 불가사의입니다(웃음).
"하하하. 그러니까 내가 희망을 주는 거죠. 저렇게 연기 못해도 버티니까 되는구나. 후배들은 계속 나오고, 나는 경쟁 상대가 안 돼요. 그 열정과 재능이 말도 못 하거든. 수천 명 중에 몇 명 뽑히는 애들은 운이 좋은 거예요. 떨어졌다고 못 하는 친구들이 아니야. 심지어 그 친구들은 떨어졌다고 겁도 안 먹어요. 계속할 거니까. 그렇게 들어온 애들은 가수고 배우고 개그맨이고, 언젠가는 돼요. 시간이 빠르냐 늦냐만 차이가 나죠."
그에게 던진 질문의 답은 늘 후배들로 그 주어가 바뀌어서 돌아왔다. 어쩌면 50년 장기근속의 비밀은 ‘나'로 시작하는 영광의 주어를 ‘후배'라는 주어로 대체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전유성이라는 이름은 잊을만하면 TV 프로그램 어디에선가 후배 방송인들의 일화에 호출되곤 했다.
그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자연의 이치이자 동시에 ‘선의의 영향력'으로 호명되는 영리한 ‘회춘’이기도 했다.
후배들이 그렇게 좋으세요?
"그건 좋고 말고가 아니예요. 나는 선배니까 방송국에서 애들 만나면 "넌 언젠가 잘 될거야!" 수시로 얘기해줘요. 그 한마디에 많이들 힘을 얻나봐. 그런데 다들 저한테만 한 줄 알고 "전유성 선배님이 용기를 줬어요" 그러는데, 아니야. 다 해줬어요(웃음). 난 선배니까. 자리 깔아주고 덕담해주는 건 당연한 거죠."
최근엔 넌버벌 코미디 팀 ‘옹알스'의 비행깃값도 대주셨다면고요?
"(단호하게)와전된 거예요! 옹알스가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수상자로 초청을 받았는데, 거기 갈 비행깃값이 없어서 못간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얼만지 묻고 천만원을 내가 빌려줬지. 그런 어려움은 겪어봐서 아니까. 암튼 차인표가 그 고생담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찍어서 전주영화제에 올렸는데, 화면이 거칠면서 아주 생생하더라고. 그런데 그 친구들, 이미 돈 다 갚았어요. 내가 쾌척한 게 절대로 아닙니다."
가슴이 참 넓으시군요!
"무슨 말이에요? 새가슴이라니까!"
영화 ‘옹알스'의 한 장면. 전유성은 직계 후배는 아니지만 그들의 활약이 대단하다고 추켜세웠다. |
새가슴이 오지랖 넓게 사는 이유는 또 뭔지요?
"그거 말고 할 일이 없다니까(웃음). 그게 즐겁지 않아요? 걔네가 잘돼야 내가 야사에 남지."
개그맨이라는 직업에 애환은 없으세요?
"연예인한테도 연예인은 따로 있어요. 언젠가 대운동장에서 연예인들을 소개하는데 ‘코미디언입니다! 가수입니다! 영화배우입니다!’ 했더니 우뢰처럼 박수가 쏟아지는 사람은 죄다 배우들이야. 폼 나잖아요. 과거엔 ‘코미디언 이주일이 납세 1위다' 하면 대단해 보이기도 했죠.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원래 웃음의 본질이 빠르고 직설적이에요. ‘핵노잼', 이러면 끝이거든."
학창시절엔 어떤 아이였습니까?
"이쪽 계통 사람 중 유일하게 오락부장을 안 했던 아이였어요. 중2 때 구봉서 곽규석 흉내 내서 콩트를 한 적은 있죠. 대체로 조용하고 남들과 잘 안 어울렸던 것 같아. 따져보면 성격도 자주 변했지. 변하지 않으면 변비가 생겼으니까(웃음)."
개그계의 아버지, 은인, 천재 중 어떤 표현이 가장 듣기 민망한가요?
"천재죠. 내가 보기엔 ‘마빡이' ‘우비소녀' ‘무를 주세요~’ 이런 거 했던 후배들이 천재야. 요즘엔 송중근이가 천재적으로 웃기더구만."
6살 딸 제비에게 "그럼 내가 술 사올테니, 니가 마셔"했다거나 교과서에서 ‘사도세자'를 보고 사도를 두자가 아니라 세자라했으니 맞춤법이 틀렸다거나… 후배들이 전하는 선생의 일화를 들으면 ‘모든 일상에 다 웃음이 배어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개 학교 선생님 흉내 내면서 코메디를 시작하잖아요. 그 친구들이 더 많은 어른을 만났으면 다른 일화도 많았을 텐데... 방송국에서 만난 웃긴 어른이 나밖에 없으니까, 맨날 내 얘기만 하는 거지(웃음). 순도 100% 실화예요. 난 진지한데 다들 웃기게 듣더라고."
돈이 아니라 일에서 노후대비를 찾겠다는 그의 바램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사진=이태경 기자 |
‘이걸 하면 웃길까 안 웃길까’ 초조해질 땐 ‘어차피 평생 할 거다'는 생각으로 불안을 무마했다고요. 글을 쓰는 제게도 유익한 조언입니다.
"그런 불안은 늘 와요. 가수나 배우는 작업 결과를 보통 3~6개월 후에야 보잖아요. 그런데 개그맨들은 그날 7시 뉴스에 나온 걸 소재로 8시에 코미디를 해요. 자기들이 재밌다고 생각했던 입담이 반응이 안 오면 풀이 죽죠. 그럴 땐 ‘한번 하고 끝날 게 아니라 평생 일이다' 생각하면 좀 괜찮아져요."
‘노후대책은 돈이 아니라 일’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으신가요?
"그 생각을 30대 때부터 했어요. 지금 내 나이 친구들 만나면 일하는 애들이 없어요. 난 돈은 없어도 일을 하잖아(웃음).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져요. 단, 아예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일은 안 해요. 방향 감각은 제로라서 운전을 안 하잖아."
시골 생활은 만족스러운가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돈 벌어서 고향 가야지’ 하는데, 시골 가면 오히려 돈 벌 일이 더 많아요. 도시는 심심하니까 영화관, 술집, 카페를 전전하고, 집에 가면 아파트 층수만 올려다보죠. 시골엔 만나는 사람, 보는 자연이 다 아는 척을 해요."
전유성은 남원에서 1000만원 보증금에 50만원 월세를 주고 산다. 동행한 후배들은 그를 ‘영원한 월세 주의자'라고 불렀다. 최근엔 땅 부자라는 헛소문이 돌았다. 어느날 사위가 달려와 "아버님, 이 일대 땅 다 아버지가 샀다고 소문났어요" 해서 "그래? 그게 어디냐? 내가 산 땅 나도 구경 한번 해보자"며 나설 뻔 했다고.
경북 청도에서 전라도 남원으로 온 지 1년 여. 32만명의 관광객을 불러모았던 전유성의 문화 콘텐츠는 그가 떠난 후 쇠락해졌고, 그는 한 매체에 ‘청바지도 입기 싫다’고 심경을 전했다.
남원에서도 은근히 청도에서 했던 프로젝트를 기대하진 않습니까?
"(심드렁하게)10년 전에 했던 걸 여기서 왜 또 해요?"
그럼, 여기선 뭘 하시려고요?
"(눈을 빛내며)어느 날 우연히 젓갈 집엘 갔어요. 그런데 거기 소금이 걸작이야. 오미자 소금, 와사비 소금 이런 질 좋은 기능성 소금을 만들고 있어요. 그뿐인가. 그 젓갈 집 사장이 ‘소스 연구소'라고 간판을 바꾸고 일본에서 계란이랑 비벼 먹는 ‘어간장 소스’라는 걸 계발했는데, 기가 막혀요. 얼마나 기특한지 내가 무료로 종신 광고 모델 해주기로 했어. 난 사실 비싼 사람도 아닌데, 다들 제안할 생각을 왜 못할까 몰라(웃음)."
청도군이 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 축제의 조직위원장인 그를 배제하고 다른 기획사에 일을 맡기면서 그는 2017년 청도를 떠나 남원으로 왔다./사진=이태경 기자 |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시겠다는 거죠?
"지역에 좋은 제품이 있는데 못 팔고 있으면, 내가 나서서 마케팅을 돕고 싶어요. 그 ‘어간장 소스'도 일명 대박이 났어요. 그런데 그 이웃이 돈 욕심에 눈이 멀었느냐면, 아니냐. 여기저기서 체인점 내자고 와도 자기는 소스 연구해야 한다며 내 사위를 찾아와서 ‘니가 체인 해라' 그래. 재밌잖아요. 그렇게 사는 게."
어른이 욕심을 안내니 그 순한 마음이 퍼지는 거죠. 혹시 스무 살로 돌아가도 지금처럼 살고 싶은가요?
"안 돌아갈 거예요, 스무 살로. 언제나 지금이 최고예요. 아니라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관계가 틀어져서 화가 날 땐 어떻게 합니까?
"화가 날 땐 안 만나요. 오해는 세월이 풀어주는 게 있고 사람이 풀어주는 게 있어요. 상한 감정은 세월이 푸는 거예요. 당장 바로잡으려해도 소용없어. 요즘 나이드신 분들이 자꾸 세대 간의 벽을 허물어야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안 될 말이야. 세대 간의 벽은 안 허물어져요. 오히려 차이가 있어야 각 세대가 유지가 되거든."
무슨 말이지요?
"젊은 애들한테 "니들도 애 낳아보면 알아" 그러잖아요. 당장 애도 안낳았는데, 그 감정을 왜 강요를 해. 때가 되면 다 알아요. 그 전엔 남의 말을 절대 안들어. 인간은 신과 달라서 완벽하지 않아요. 그래도 다 다른 상태로 완벽하다고 느끼거든."
정작 선생은 애나 어른이나, 개나 소나… 다 잘 통하는 ‘소통 천재’였잖습니까?
"아니야. 불통도 많았어요."
나이 칠십에 지리산 기슭에 월세로 둥지를 틀고 사는 남자. 만년 새가슴으로 오지랖은 태평양인 전유성./사진=이태경 기자 |
그래도 통할 땐 말할 수 없이 기쁘지요?
"그럼요. 나는 남 따라 하는 걸 제일 경계했어요. 남들은 나더러 폐교나 간이역 개조해서 문화공간을 만들어보라고 많이 부추겼어요. 그런데 그건 다른 데서 이미 잘하고 있더라고. 그럴 땐 나까지 그 판에 끼어들면 안 돼요. 반칙이고 뒷다마죠. 난 남이 안 한 일을 할 때 기뻐요. (청도의) 심야극장도 내가 안 했으면 1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뭘 했겠어요. 빈 교회 개조해서 카페 안 만들었으면, 스님들이 교회 와서 피자 먹는 풍경을 어디서 봤겠냐고. 허허."
그 생경한 기쁨이 억만금 돈 버는 기쁨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고, 전유성이 해맑게 웃었다. 나이 칠십에 지리산 기슭에 월세로 둥지를 틀고 사는 남자. 만년 새가슴으로 오지랖은 태평양인 그가 휘적거리며 여의도 광장을 걸어 나갔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