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영웅도 義人도 아녜요, 위급한 사람에게 손 뻗었을 뿐”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오송 지하차도에서 3명 구한
화물차 운전기사 유병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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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올 법한 대형 트럭이 천천히 후진하며 공장을 빠져나왔다. 궁둥이에 ‘충북80아XXXX’ 번호판부터 보였다. 적재함은 덮개를 날개처럼 여닫을 수 있었다. 그 14t 화물차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마침내 ‘오송 지하차도 의인(義人)’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달 30일 인천 북항 근처 화물차 전문 시공 업체에서 만난 유병조(44)씨는 수척해 보였다. 힘을 다 써버린 영웅처럼, 악수할 때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 허약한 손으로, 저 깡마른 몸으로 유리창을 깨고 트럭 위로 올라가 3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그 사건을 겪고 나서 잠을 잘 못 자요. 수면제를 처방받았습니다. 침수된 14t 트럭은 폐차했어요. 한 달 보름 동안 일을 못 했고 식욕도 잃었습니다. 체중요? 6~7㎏ 빠져 54㎏이에요. 그래도 저는 괜찮습니다.”
유병조씨에게 이날은 특별했다. 현대차가 지급한 새 화물차의 특장(特裝)과 인테리어 등이 모두 끝나고 처음으로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새 트럭은 430마력이었다. 부릉부릉–. 말 430마리가 일할 준비를 끝냈다는 우렁찬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유씨는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제가 주목받아 부담스럽다”며 “이제 일터로 돌아가 평소처럼 묵묵히 물건을 실어 나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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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오송 지하차도
지난 7월 13~15일 충북 청주에 비가 500㎜ 넘게 쏟아졌다. 15일 오전 8시 30분쯤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 근처에서 제방이 터졌고 미호강이 범람했다. 어마어마한 물이 2~3분 만에 지하차도로 들이닥쳤다. 약 10분 뒤 터널은 완전히 침수됐다.
-고통스럽겠지만 그날을 복기해주십시오.
“여느 때처럼 집에서 오전 7시에 나섰어요. 봉명동 공장에서 트럭을 점검하고 대기를 좀 하다 세종 물류창고로 출발했습니다. 세종에서 청주로 오는 형님이 ‘미호강이 범람할 것 같다. 50㎝밖에 안 남았다’고 전화로 알려줬어요. 8시 15~20분쯤일 거예요.”
-우회할 생각은 안 했습니까.
“5분 전에도 저희 화물차가 그 지하차도를 지나갔어요. 진입로를 차단하지 않았고 통제하는 사람도 없어 괜찮겠거니 했습니다. 저는 8시 30분쯤 들어갔어요.”
-그때 상황은 어땠나요.
“차들이 1차로에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3주 전 터널 안 화재로 2차로는 통제 중이었거든요. 고개를 빼고 앞을 보는데 출구 쪽에서 물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 승용차는 차를 돌려 역주행으로 나갔고 저는 트럭을 2차로로 빼 출발했습니다. 앞에 빨간 버스가 들어왔고요. 그때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 정도 물이야 충분히 밀고 나갈 수 있다고.”
-그런데요?
“짧은 시간에 수위가 높아졌어요. 바퀴가 절반 넘게 물에 잠기자 속도가 나질 않았습니다. 출구 가까이 갔을 때는 승용차들이 떠서 밀려오는 거예요. 버스도 저도 그걸 피해서 지그재그로 운전하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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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쪽 오르막에서 버스가 멈췄지요.
“네. 시동이 꺼진 것 같아 밀어 올리려고 뒤에서 박았는데 꼼짝도 안 했습니다. 후진했다가 버스를 서너 번 추돌하는 과정에서 제 계기판에도 배터리 등의 이상 신호가 계속 떴어요. 뒤로 뺐다가 다시 가려고 했는데 그만 시동이 꺼졌습니다. 트럭도 멈춰버린 거예요. 버스 기사가 (승객들 대피하라고) 유리창을 깨는 게 보였어요.”
-두렵지 않았나요.
“트럭은 운전석이 높아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으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앞에 있던 버스가 물에 뜨더니 제 트럭 뒤로 휩쓸려 들어가는 게 보였습니다. 그제야 ‘현타(현실 자각)’가 왔어요. 겁이 났습니다. 이대로 있다간 죽을 수도 있겠구나. 물을 피해 의자 위로 올라갔고 창문을 내리려고 했는데 움직이질 않았어요. 바닥에서 허겁지겁 공구를 찾아 조수석 유리창을 깨뜨렸습니다.”
-일단 지붕 위로 피신했군요.
“올라가 보니 20대 여성이 제 트럭 운전석 사이드 미러를 붙잡고 매달려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떠내려온 그분을 지붕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때 트럭 뒤쪽이 물에 뜨면서 점점 벽 쪽으로, 난간 쪽으로 붙더라고요.”
-그건 하늘이 도왔네요.
“뒤로 가서 보니 사람들이 물 위에 뜬 채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남자 두 분을 구했어요. 우리는 트럭 지붕을 이용해 난간으로 건너갔습니다. 소방차와 경찰관이 도착했지만 물살이 너무 셌어요. 30분쯤 기다려 로프와 배를 통해 구조됐습니다.”
-유병조씨 미담을 전한 기사에 달린 댓글이 인상적이었어요. ‘세 명을 구한 게 아니라 세 가족을 살린 것이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단 피하자는 생각으로 지붕에 올라갔다가 본능적으로 행동한 거예요. 사람이 보이면 아무 생각 없이 끌어올렸습니다. 누구라도 저처럼 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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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할 수 없는 일
그날 이 지하차도에 차량 17대가 고립됐다. 14명이 사망했고 16명은 구조되거나 자력으로 탈출했다. 유병조씨가 구출한 정영석(45)씨가 다시 ‘릴레이 구조’에 나섰다는 뉴스는 비극 속에 한 줄기 빛 같았다. LG복지재단은 얼굴도 모르는 이웃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몸을 던진 유씨에게 ‘LG의인상’을 수여했다.
-군 복무를 특전사나 해병대에서 했나요.
“병역특례를 받았습니다(웃음). 충북 제천에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산업체에서 5년간 근무했어요. 평소에 근력 운동도 안 합니다.”
-화물차 일은 얼마나 했습니까.
“대형 면허를 따고 처음부터 14t 화물 트럭을 몰았어요. 20대 중반에 시작했는데 벌이가 시원찮았죠. 그만두고 4년 동안 시외버스도 하고 통근버스도 몰았지요. 그러다 10년 전쯤 좋은 자리가 생겨 14t 트럭으로 돌아왔습니다. 운송 위탁 계약을 맺고 청주~세종을 왕복하며 짐을 실어 나른 지 5년쯤 되고요.”
-보통 어떤 물건을 옮기나요.
“LG생활건강이 생산하는 세제·치약·샴푸 등을 운송합니다. 사고 당일에는 물건을 실으러 가는 길이라 적재함이 텅 비어 있었어요. 만약 꽉 차 있었다면 그 무게로 버스를 밀어 올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릴레이 구조의 출발점이 된 ‘오송 지하차도 의인’으로 불리는데.
“어휴, 그런 호칭은 듣기 거북합니다. 서로 도와가면서 구조했어요. 저는 의인도 아니고 영웅도 아닙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타적인 행동을 했는데 왜 의인이 아닌가요?
“처음에는 저도 ‘사람을 구해야지’보다는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트럭 위로 피한 다음에는 사람이 보이니까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겁니다.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도 ‘저 상황이 닥치면 나도 할 수 있을까’ 의심하곤 했어요. 겸손이 아니라, 막상 겪어 보니 하게 되더라고요.”
-가족도 놀랐을 것 같습니다.
“저는 미혼이에요. 결혼한 누나가 둘 있고 어머니가 계십니다. 사고 당일에는 아무 얘기도 안 했어요. 이틀 후 알게 된 어머니는 ‘그 사람이 너였니? 큰일 안 당해 다행이다’ 하셨습니다.”
-그 일을 경험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그날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나요? 이 사건 전이나 후나 저는 똑같습니다.”
-인터뷰를 기피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동료 기사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침수 사고 사망자가 많은데 제가 부각되는 게 죄송하고 부담스러웠어요. 말주변도 없고요. 동료 기사들은 ‘살아 돌아와 고맙다’고 합니다. 저는 괜찮은데 우는 사람이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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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 높이 운전석에서 본 세상
‘오송 지하차도 의인’은 침수된 트럭을 폐차해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현대차가 신형 14t 엑시언트(1억8000만원 상당)를 지급했고 물류대행사 LX판토스, 전국화물자동차운송사업연합회 등 각계에서 후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유씨는 성금 일부를 “수해 피해 복구에 써달라”며 기부했다.
-당신에게 트럭이란 무엇입니까.
“생계 수단이죠. (좀 더 의미를 부여해달라고 하자) 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럭이 삶이라고요?
“이게 있어야 일을 할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트럭이 없으면 저는 실업자나 마찬가지예요.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매일 살피고 때로는 고쳐 주면서 오래 지내다 보면 트럭과도 애착이 생겨요. 고마운 존재죠. 장거리 뛰는 분들은 이 안에서 잠도 자요. 100만㎞ 넘게 동행한 녀석을 떠나보내야 해 마음이 안 좋았어요.”
-이렇게 멋진 새 트럭이 생겼잖아요.
“오늘 처음 몰아봤는데 백미러 보는 것부터 낯설더라고요. 새 차 냄새는 반갑고요(웃음). 정을 붙이며 ‘애마(愛馬)’로 만들어야죠.”
-14t짜리 애마도 있군요. 화물차 기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나요.
“처음에는 운전이 좋았어요. 화물차는 버스나 택시와 달리 남 신경 안 쓰고 내 할 일만 잘하면 되잖아요. 종종 끼니도 거르고 이동해야 하는 게 단점이지만 정년도 없고 마음이 편해요. 그게 좋아서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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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 화물차는 덩치도 크고 밀어붙이는 것 같아 겁이 납니다.
“저희는 승용차가 더 무서워요. 하하. 화물차는 정지 거리가 긴데 승용차가 끼어들어 갑자기 멈추면 당황할 수밖에 없어요. (승용차 운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하자) 화물차 앞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화물차와 나란히 주행하는 것도 피하세요. 사각지대가 있어 차로를 변경할 때 위험합니다.”
-오송 지하차도 의인도 운전대 잡으면 욕을 하나요.
“(겸연쩍게 웃으며) 하루에도 열두 번 욕이 나와요. 제가 담배를 석 달 끊었다가 다시 피웠어요. 운전하면서 담배까지 안 피우니 속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본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기사들을 읽은 기분이라면.
“처음에는 신문도 인터넷도 안 봤어요. 방송에 나왔다고 하길래 봤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을 중단하고 집에 혼자 멍하니 있었잖아요. 그날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저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자꾸 했어요.”
-반복해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처음 2주 정도는 눈을 뜨든 감든 그 사고 현장이 보였어요. 붙잡혀 있기 싫어서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써도 빨간 버스가 자꾸 떠올라요. 죄책감까지는 아니고 후회가 밀려오는 겁니다.”
-무엇을 후회합니까.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제가 더 빨리 침착하게 행동했더라면 버스 승객들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요. 트럭 앞유리나 버스 뒷유리나 같거든요. 제가 그것들을 다 깨고 승객들을 제 트럭 운전석 쪽으로 건너오게 한 뒤 지붕으로 피신시켰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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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잘 살아야겠다
오송 지하차도 참사는 공무원들의 부주의가 겹쳐진 인재(人災)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홍수특보 등 경고가 있었고 주민이 ‘위험하다’고 신고까지 했는데 막지 못했다. 유씨는 “제방을 제대로 관리했다면, 교통을 제때 통제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라고 했다.
-이런 참사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련자들에게 무겁게 책임을 물어야죠. 국가 재난 방지 시스템도 기본부터 바로 세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은 얼마나 애통하겠습니까. 그날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저도 죄송할 따름입니다.”
-20대 여성이 ‘이 손 놓으시라’ 했는데 끝까지 잡고 구출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축 늘어진 채로 포기하고 있더라고요. 이쪽이 끌어당기면 저쪽도 웬만하면 힘을 쓰기 마련인데, 물에 들어갔다가 간신히 매달려 있으니 정신도 없었고 기운도 없었겠지요. 팔을 잡고 당기다가 다시 허리춤을 잡고 있는 힘껏 끌어 올렸어요.”
-그분의 부모가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왔다면서요?
“네. 아버님이랑 저랑 멀리서 얼굴을 보자마자 서로 눈물부터 나더라고요. 어떤 말도 필요 없었어요. 따님이 큰 충격을 받았을 텐데 잘 회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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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로 유병조씨 인생도 달라졌나요.
“어머니가 ‘너는 7월 15일에 다시 태어났다’고 하셨어요. 죽을 뻔한 아들이 살아 돌아온 날이라는 거예요. 해마다 그날이 오면 기분이 복잡할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저를 그냥 똑같이 봐주시면 좋겠어요. 기대가 높아져 실망시킬까 봐 걱정이에요.”
-궁평2지하차도는 평소에 자주 지나던 곳이죠?
“지난 5년간 하루에도 서너 번까지 다니던 길이라 눈 감고도 훤해요. 내부 수리 등의 이유로 연말까지는 통제한다고 들었어요.”
-저 트럭을 몰고 그 지하차도를 통과해야 하는 날도 올 텐데.
“사고를 겪고 나서 비가 온 어느 날 승용차를 몰고 나온 적이 있어요. 작은 물웅덩이를 지나다 물이 좀 튀었을 뿐인데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다시 그 지하차도를 지날 땐 심호흡부터 크게 한 번 하고 들어갈 것 같아요. 계속 피하고만 살 수는 없잖아요. 정면 돌파하고 트라우마를 떨쳐내야죠.”
-소망이 있다면.
“생존자 모임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죽다 살아난 목숨이니 값있게 살자’는 말을 많이 해요. 하나 더 보태자면 이 일을 겪기 전 ‘작년의 유병조’처럼 묵묵히 짐을 실어 나르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주목받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유병조씨는 지난 7~8월을 빨리 잊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가 새 화물차 운전석에 앉았다. 부릉부릉–. 삶이 내는 엔진 소리처럼 들렸다. 유씨는 “부드럽고 힘이 좋다. 진짜 신세계다, 신세계”라며 웃었다. 한국 사회에 신세계(新世界)를 보여준 사람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 남자만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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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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