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김 포기했지만 섣부른 위로는 사양합니다
서른살 김태균씨 혈액암 9년 분투기
얼굴을 덮친 혈액암이 코뼈를 앗아갔다. 여덟 차례 성형수술을 했다. 갑자기 닥친 거대한 불행에 삶을 원망하기도 했다. 마스크를 벗고 인터뷰 자리에 나올 용기를 냈다. 잘생김은 포기했다는 그는 앞으로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 중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이 글의 목적은 위로가 아니다. 9년 차 암환자 김태균(30)은 희망이나 감사 같은 단어로 치장한 낭만적 인터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찰뿐더러 섣부른 위로는 하고 싶지도, 받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불행은 남보다 조금 일찍 찾아왔다. 스물둘이던 2009년, 군 복무 중 머리와 목 주변에 혈액암이 진행되고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투병과 재발의 반복 와중에 3개월 시한부 진단이 내려졌다. 얼굴을 덮친 암 때문에 코뼈를 잘라내고 여덟 번 성형 수술을 했다.
눈앞에서 피부가 가위질당하고 사과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듯 얼굴 일부가 잘려나갈 때, 그는 차라리 마취가 풀려 아픔이라도 느끼기를 바랐다. 다시는 행복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분하기도 억울하기도 했다. 길 한가운데서 얼굴이 부풀어오를 만큼 펑펑 울었다.
매일 피를 뽑고 약을 먹고 토했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일 눈을 뜰 수 있을까'란 생각에 잠을 못 이룬 적도 있다. 사는 게 아니라 버틴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글쓰기는 일종의 피난처였다. 언제 재발할지 언제 죽음을 맞을지 모르는 불확실한 삶. 글은 그가 시작과 끝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누가 내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픔은 고독이란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내 안의 것들을 토해낸다는 생각으로 적었다."
책의 제목은 '잘생김은 이번 생에 과감히 포기한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위트와 희망을 느꼈다지만, 그 위트와 희망을 표현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잘생김을 포기한 남자. 수원 장안구의 한 독서실에서 그를 만났다. 자신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공간이라고 했다. 얼굴을 넓게 가린 검정 마스크. 말할 때마다 호흡에 따라 마스크가 앞뒤로 펄럭였다. 벗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암환자 9년의 분투기
군 복무 중인 스물두 살 때 혈액암 판정을 받았다. 그전엔 학교 앞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구들과 술 마시기 좋아하는 보통 청년이었다. / 김태균씨 제공 |
거울을 보는 것이 어색한가.
"항암치료를 받은 두 달 후 대머리가 됐다. 암이 코에 발병한 탓에 코가 쪼그라들었다. 항암제가 암세포를 죽이면서 주변의 지방세포까지 잡아먹었으니까. 영화 속 볼드모트 같은 악당의 얼굴이 됐다. 지금은 머리도 자라고 호전된 상태니까 조금 덜 어색하다."
김태균은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 마스크를 벗어야 할 상황이 오면 "'제가 많이 아파 얼굴이 상했는데 벗어도 괜찮을까요'라고 양해를 구한다"고 했다.
책 제목은 재밌지만, 자포자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심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방법이 그렇게 표현된 것 같다. 애초에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쓴 글이 아니다. 어설픈 위로를 받고 싶지도 않다. 이왕 그렇게 된 것 어찌하겠느냐는 자포자기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의 위로에서 위선을 보나.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아픔은 고독이라고 썼다. 비극도 반복되면 남자의 군대 이야기처럼 지루해진다. 모든 위로가 위선이란 뜻은 아니다. 각자의 아픔은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내 환경과 상황을 누가 대신 감내해 줄 수는 없다."
누구나 관심과 온정이 필요할 때가 있다.
"걱정이 고맙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걱정 때문에 지칠 때가 있다. 사람들은 걱정을 건네면서 상대방의 이런 반응을 예상한다. '괜찮다, 감사하다, 힘낼게요' 등등. 나는 내가 감내해야 할 아픔과 감정을 추스르기도 벅차다. 그냥 아프기 전처럼 대해주는 게 좋다. 암환자라는 것,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삶이 원망스러운가.
"원망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병원에서 폐가 쪼그라들어 갈비뼈 사이로 중지 굵기의 호스를 넣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너무 고통스러워 3일을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었다. 그랬더니 나중엔 발이 띵띵 부어 슬리퍼가 들어가지 않더라.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절망했다."
아프지 않았다면 절망을 몰랐을까.
"글쎄, 지금은 내 모든 감정과 반응에 날이 서 있다. 타인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는 입장이다. 사랑, 우정 같은 타인에 대한 감정은 때로 사치 같다. 절망은 때로 그런 간극에서 나온다."
나는 왜 이겨내야 할까
김태균은 평범한 학생이었다. 적어도 암이 찾아오기 전까진 그랬다. 의류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대학에선 무역학을 전공했다. 여느 또래처럼 MT도 갔고 학교 앞 PC방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수업이 끝난 저녁이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 좋아하는 외향적 성격이었다. 좋아하는 여성에게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먼저 전화번호를 묻는 여성과 2년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일상은 갑자기 무너졌다. 시작은 냄새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코에서 냄새가 난다는 소리를 했다. 군대 선·후임들은 이를 잘 닦지 않는 것 아니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비염이 있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으면 가족들도 헛구역질할 정도로 악취가 심해졌다. 내심 덜컹했지만 그래도 큰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육체적인 고통은 참을 수 있었다. 외로움은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아픔이란 철저히 혼자가 된다는 뜻이다. 김태균씨는 “그것 역시 자신이 참고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말한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
그때를 기억한다. 2009년 12월 동네 이비인후과에 갔을 때, 그리고 며칠 뒤 혈액암 2기 판정을 받은 크리스마스 이브. "몰래 카메라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암이라니." 의사는 코뼈가 암으로 썩어 그 냄새가 코를 통해 나오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이후는 치료와 고통만 남은 삶이었다. 독서실 뒤편을 응시하던 그가 보라색 벽지를 가리켰다. '아픔의 색'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혹독한 치료를 받을 때마다 주먹을 꼭 쥐는 버릇이 생겼다. 얼마나 세게 쥐었던지 손톱은 보라색 초승달을 손바닥에 새겼다." 보라색 초승달을 볼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왜 이겨내야 하나. 남들이 괜찮다고 다독일 때마다 넌덜머리가 났다. 왜 이겨내야 하는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대답이 나오지 않자, 사는 것이 못 견디게 지겹고 힘들어졌다.
세상은 그럴 때 희망을 이야기한다.
"환자들에게 가장 잔인한 단어가 희망이다. 암 재발 징후가 보여 입원했을 때 불안해하던 내게 한 젊은 인턴이 말했다. 확진이 난 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 말라고. 희망을 가지라고. 난 그 말을 굳게 믿었다."
암이 재발했을 때, 그를 원망했나.
"희망은 쉽게 써선 안 된다. 특히 권위가 있는 사람일수록 조심했으면 한다. 어설픈 희망이 내게 준 절망감은 물리적 아픔 이상이었다."
희망이란 말 속에 무책임이 담겨 있나.
"아픈 사람들이 큰 위기를 극복한 경우를 영화나 TV에서 본다. 예외적이고 특수한 경우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잡지에 나오는 강인한 사람, 위기를 극복한 위인들 같이 대단하고 의연한 사람이 아니다."
주위의 힘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기다려주는 게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사람마다 차이야 있겠지만, 너의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단정 짓는 위로를 건네지 말라는 뜻이다. 위로를 건네면서 자기 자신의 상황에 대해 안도하는 사람이 많다. 모를 것 같지만 다 느껴진다."
2011년 말 다섯 번째 항암치료를 마쳤을 때 그는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기로 했다. 오랜 항암 치료에 몸은 망가지고 마음도 지쳤다. 무작정 담당의를 찾아가 '못하겠다, 안 할 거다'라고 말했다. 의사도 딱히 설득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았다고 그를 보냈다. 4개월 후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을 다시 찾았을 때 의사는 그에게 3개월의 수명이 남았다고 말해줬다.
환자는 뭐 그렇게 감사해야 하나
그때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뭐라도 남기자는 생각에 피난처처럼 찾은 게 글쓰기였다. 쓸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에 대한 이야기. 솔직하게 적었다. 희망 대신 절망의 기록, 위로 대신 무관심이 반가운 9년 차 암환자의 생존기를 썼다. 쓰면 쓸수록 수면 위에 비친 자신이 보였다.
"위로받기 위해 쓴 글은 아니었지만, 글을 쓰고 여러 얘기를 들으며 알게 됐다. 다들 비슷한 슬픔을 가지고 산다는 걸. 뭔가 해보려 해도 잘 안 되는 상황들. 누군들 희망적이고 긍정적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이야기에 공감했다.
"많은 이들이 메일도 보내주고 소셜 미디어에 답글을 달았다. 투병 중인 이들도 많았다. 나이대가 비슷한 사람들의 연락도 있었다. 그런 날은 힘들었다. 얼마나 힘들지 어떤 상황일지 예상이 가니까. 그런 날은 멍하게 보냈다."
하늘과 자연을 얘기한 까닭은.
"하늘을 자세히 보면 원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지구가 편평한 게 아니라 둥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 커다란 지구에 비하면 정말 작은 존재이고, 나의 아픔도 큰일이 아니다라며 다독일 수 있었다."
책에선 아픔보다 힘든 것이 외로움이라고 썼다.
"육체적인 고통은 어느 정도 지나면 버티는 수준이 된다. 그러나 외로움은 도저히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아픔은 누가 알아줄 수도 대신해 줄 수도 없다. 철저히 혼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 지내다가도 갑작스러운 외로움에 몸을 부르르 떨고서 끝없이 우울해지곤 한다. 아직도 치료법을 잘 모르겠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글쓰기를 시작한 2012년 그는 의사의 제안으로 임상시험을 막 끝낸 신약을 처방받았다. 기적적으로 그 약이 들어맞았다. 의사도 놀랄 정도였다.
희망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기적이 왔다.
"신을 믿지만, 신이 운명에 개입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무언가를 이뤄준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운명은 우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아픈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라는 얘기다. 단지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을 뿐이다. 암은 보통 5년간 추적 검사 끝에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 판정을 받는다. 5년간 암이 다시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이럴 땐 감사를 생각해야 하지 않나.
"다들 그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 같다. 물론 기쁠 때야 기쁘지만 힘들 때는 한없이 안 좋은 생각을 한다. 그게 솔직한 생각이다."
희망과 위로가 아니다. 그런데 글을 쓰고 출판까지 한 이유는 뭔가.
"희망을 적대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여기에 목을 매 희망이 절망이 되거나 절망이 희망이 됐을 때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최근 대입을 위해 다시 수능 시험을 봤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기 위해 교대에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남보다 많이 늦은 출발, 생활인으로서 미래를 걱정해야 할 때다. 암은 재발과 전이가 많아 평생 환자로서의 관리가 필요하다. 보통 회사에 다니는 직업은 많이 힘들 것 같다. 선생님이 아니라면 가구 디자인 일을 해보고 싶다."
갑각류인 홍게는 탈피 과정을 거쳐야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과정이 만만치 않아서 껍데기를 벗는 도중에 힘을 다 소모하고 죽는 홍게도 있다. 그들에게 성장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 김태균이 자신의 책 마지막에 적은 홍게의 에피소드다. 그 문장을 읽으며, 그 문장을 쓴 주인공을 떠올린다.
김태균을 만난 후 환자 앞에서 상투적으로 하는 위로를 머릿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대신 온 힘을 다해 껍데기를 벗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홍게들을 떠올렸다. 잘생김은 이번 생에 과감히 포기했다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미디어에 공개한다는 김태균의 환한 미소가 진심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김아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