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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인생은 왕복티켓… 잘 왔으니 잘 가야죠”

[아무튼, 주말] 60대 신혼기 낸 한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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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7년 11월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올린 결혼식. /한비야 제공

2018년 1월 한비야(62)의 결혼 소식이 뒤늦게 언론에 알려졌다. 상대는 국제구호개발 NGO ‘월드비전’ 동료였던 네덜란드인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69).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후 복구 사업에서 만나 상사에서 친구로,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밝혔다. 공개된 결혼식 사진엔 흰 웨딩드레스 차림 한비야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사파리 복장으로 오지 누비던 센 언니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낯선 광경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한비야가 남편과 같이 쓴 신간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로 돌아왔다. 오지 탐험도, 긴급 구호 얘기도 아니다. 60대 신혼기란다. 대체 뭐가 변한 걸까. 북한산이 환히 보이는 그의 불광동 아파트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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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가 숲 이미지 벽지를 붙인 자택 거실 벽을 배경으로 앉았다. 옆에 둔 액자 안엔 지금은 네덜란드에 있는 남편 안톤과 함께 진짜 숲을 걷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바람의 딸, 신혼에 빠지다


“이제 한여름 태양 같은 열기는 그만하려고요. 한겨울 아침 햇살처럼 온기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 늙었나 봐, 호호호.” 빨간 가죽 재킷을 입은 한비야가 하이톤을 뿜어댔다. 보통 사람 말을 2배속으로 돌린 듯했다. 열기보다 온기에 가까워지겠노라 했지만 여전히 뜨거운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다.


“여기가 안톤(남편 호칭)! 음, 지금은 자고 있겠네.” 벽에 걸린 결혼식 사진 속 남편을 가리켰다. 집 군데군데 네덜란드 장식품이 놓여 있을 뿐 정작 남편은 안 보였다.


—남편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은 네덜란드에 있어요. 2017년 11월 결혼하면서 ‘336 법칙'을 세웠어요. 일 년에 3개월은 서울에서 (한)비야 식으로, 3개월은 네덜란드에서 안톤 식으로, 6개월은 각자 집에서 지내기로요. 자발적 장거리 부부죠.” 네덜란드 신혼집은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2시간 떨어진 인구 4000명 소도시 레인더에 있다. 무엇이든 50대50으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부부가 반씩 부담해 구입했다.


—독특한 결혼 생활이네요.


“저는 5년 걸려 지난해 겨우 박사(이화여대 국제학)를 땄어요. 막 ‘햇박사’ 됐는데 네덜란드 가서 ‘서울댁’으론만 못 살죠. 안톤은 인생 절반을 외국에서 보내다가 얼마 전 은퇴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서울에서 ‘안 서방’으로만 살 순 없고요. 우리 부부에게 최적의 방식을 택한 거랍니다. ‘시월드’ 없고, 육아도 안 하는 제 결혼 생활이 일반적이진 않죠. 여건 맞춰 행복하게 사는 다양한 방법이 있단 걸 보여주고 싶어요.”


오후 3시면 ‘스카이프’에서 ‘딩동’ 소리가 울린다. 네덜란드 시각으로 오전 7시 기상한 안톤이 보낸 문자. 한국 시각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수시로 문자를 주고받는다. 영상 통화는 일주일에 딱 두 번만 한다.


—너무 안 보는 것 아닌가요?


“노노! 따로 또 같이. 둘 다 독립적으로 오래 살아와서 각자 시간과 공간이 필요해요. ‘혼자 모드’와 ‘같이 모드’가 왔다 갔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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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3개월 동안 '비야식'으로 지내는 기간, 눈 덮인 소백산으로 여행간 부부. /한비야 제공

—한비야를 ‘결혼’이란 이슈로 인터뷰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제가 비혼 대표 주자였죠. ‘하고 싶은 일 찾아 신나게 돌아다니던 언니가 웬 결혼?’ 했을 거예요. 저도 육십에 결혼하리라곤 상상 못했는데 사람들은 오죽할까.”


—굳이 결혼한 이유가 뭔가요.


“‘저 결혼 이벤트 아니냐'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같이 살 거 아닌데 왜 결혼했느냐는 사람도 많아요. 가톨릭 신자로서 혼배성사하고 정식으로 하느님 앞에서 짝이 됐음을 서약하고 싶었어요. 저, 진지해요. 지금 제가 가진 땔감을 모두 쏟아부어 성공적으로 지피고 싶은 게 결혼이라니까요.”


—59년 비혼 생활 청산하기가 쉽던가요.


“그간 비혼 상태였지 비혼주의자는 아니었어요. 요즘 젊은 친구 중 비혼이 많은데 존중해요. 자기가 행복을 느끼는 삶의 방식에 비혼이 적당하면 비혼을 선택하는 거죠. 다만 ‘비혼주의자’로 자신을 단정하면 선택 폭이 좁아지는 거 아닌가 싶어요. 천천히 최적의 옵션을 찾아가면 된다고 봐요.”


—최적의 옵션을 예순에 찾은 거군요.


“예전부터 아이 낳고 싶다는 생각은 했어요. 마흔다섯이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는데 정신없이 살다 보니 그 나이를 훌쩍 넘겼어요. 아이를 포기하니 여유가 생겼어요. 급하게 결혼할 필요가 없어졌죠. 천천히 최고 중 최고랑 하겠다 생각했지요. 결국 제 결혼 적령기는 60대였어요. 50대까지는 굉장히 목표지향적이었어요. 연애하면서 상대가 내 시간 뺏어가는 게 싫었어요. 안톤하고 그래요. 우리가 20~30대에 만났다면 분명 사달 났을 거라고.”


한비야는 “우리 사회 일반적 틀로 보면 난 매번 늦깎이”라고 했다. “30대에 회사 관두고 오지 여행을 했고, 40대에 구호 활동에 도전했어요. 50대에 국제기구(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에 들어가고, 60 넘어 학부 최고령으로 박사를 땄어요. 각자에게 맞는 적령기는 따로 있다고 봐요.”


—막상 결혼해 보니 어떤가요.


“결혼하면 나답게 살지 못할까 봐 두려웠는데, 그 어느 때보다 나답게 살아요.”


—어떤 의미인가요.


“‘과일 칵테일 식 결혼 생활'이라고 해요. 잘 만든 과일 칵테일은 여러 과일이 제 맛을 지닌 채 조화를 이뤄 더 맛있어져요. 섞여 있기에 각자 존재감이 더 또렷해지는 거죠. 저는 뜨거운 불, 안톤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 전혀 다른 맛 과일이에요. 섞이면서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또렷이 알게 됐어요. 결혼은 불완전한 반쪽 두 개가 만나 하나의 완전체가 되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달라요. 혼자로 이미 완성돼 있어야 함께도 잘살 수 있다고 봐요. ‘혼자 있는 힘’이 있어야 ‘함께 있을 수 있는 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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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엔 오지 여행가, 40대엔 긴급 구호 활동으로 뜨겁게 살았던 한비야가 60에 느닷없이 결혼을 했다. "이젠 한여름 태양 같은 열기보다는 한겨울 아침 햇살 같은 온기를 주고 싶다"고 했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중심에서 잘 멀어지기


한비야는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7년간 오지 여행을 기록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전 4권)으로 단숨에 인기 저자가 됐다.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2005년)는 105만부, ‘그건, 사랑이었네!’(2007년)는 70만부나 팔렸다. 이번 책은 출간 한 달이 지난 현재 1만여 권 팔렸다.


—반응이 예전만큼 뜨겁진 않습니다.


“예전처럼 모든 사람이 귀 쫑긋 세우고 내 얘기에 귀 기울이진 않는구나 싶어요. 그러면 어떤가요. 내 스타일이 안 먹히면 안 먹히는 대로, 중심에서 멀어졌으면 멀어진 대로 받아들여야지요.”


—중심에서 멀어졌다고 인정하는가요?


“뜨거운 여름날은 지났죠. 여름 지나고 가을 왔는데 여름옷 입고 다시 여름으로 가려고 발버둥친다고 되나요? 가을이 왔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죠. 우리 또래가 그런 것 같아요. 퇴직하고 외부 밧줄이 끊어져 위축되는 경우가 많아요. 중심에서 잘 빠져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어떤 식으로 중심과 작별할 계획인가요.


“내년이 제 마음속 ‘은퇴 준비 대학 1학년’이에요. 우선 10년 동안 맡은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직을 내려놓고 차분히 준비할 겁니다. 은퇴 대학 4학년을 마무리하는 2024년 칼로 무 자르듯 일을 딱 관두고 안톤과 함께 ‘안 바쁜 한비야’에 도전할 거예요. 제가 제일 못하는 거죠. 안 바쁘게 살기!”


—인터넷에 한비야라고 치면 연관 검색어로 ‘거짓말’이 뜨더군요. ‘안티’가 왜 이렇게 많은가요.


내내 쾌활했던 그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휴우. 괴롭기 짝이 없어요. 2009년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부터 같아요. 방송 녹화하고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인도적 지원학 전공)로 유학을 떠났는데 주변 사람들이 악플을 보여주더라고요. 방송에서 말한 이틀에 한 번 잔다는 게 말이 되느냐, 책 내용이 거짓투성이라는 둥 온갖 악플이 달렸더군요. 위기관리 전문가를 만나 조언을 구했는데 무대응 아니면 일일이 모두 대응하는 법,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어요. 그때 무대응을 택했죠. 이후 일이 너무 커져 버렸어요.” 한번은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자 수녀님이 말했단다. “유명세라 생각해요. 그것도 세율 높은 유명세.”


—과거 책 내용 중 육로로 국경 통과가 금지된 국가에 들어가 놓고 엄연한 범법 행위를 미화했다는 등 비판이 많더군요.


“불법을 저지른 건 명백한 잘못입니다. 60대 한비야라면 안 저질렀을 잘못을 30대 치기 어린 한비야가 저질렀어요. 육로로 가서 성공한 사람이 있다고 듣고 저도 시도했던 것 같아요. 무모한 행동이었죠.”


그는 “오지 여행은 지난 세기(1993~1999년) 일인데 아직도 그때 일로 악플이 지속되는 건 속상하다”면서도 “앞으로 언행일치, 표리동동(表裏同同) 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전거 바퀴에 묻은 진흙은 자전거가 계속 굴러가면서 털어지는 것처럼 열심히 살면 아픈 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얼마 전 최인아 책방에서 연 북 토크엔 그의 책을 읽고 자란 30~40대 ‘한비야 키즈’가 여럿 왔다. “제 자식은 안 낳았지만 저의 사회적 유전자를 받은 자식들 같아 뭉클했어요. 아이 키우랴, 일하랴 정말 치열하게 살더군요. 화살기도라도 해서 제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주고 싶었어요. 그들에게 진심으로 외칩니다. 파이팅!”


죽어서도 지킬 원칙, 50대50


—책에 유언장을 썼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인간은 모두 왕복 티켓을 갖고 이 세상에 왔다고 생각해요. 티켓에 돌아갈 날이 안 찍혀 있을 뿐, 누구나 돌아가야 하는 건 명백한 사실이에요. 유언장 쓰고 죽음을 기다린다는 게 아니에요. 한정된 삶을 어떻게 의미 있게 살 건지 진지하게 생각하자는 거예요. 결혼 전엔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나도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남편과 천수 누리고픈 욕심이 생겼어요. 죽음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딱 10년 전, 영성수련회에 가서 처음 유서를 써봤다. “위험한 데를 많이 다니니 남들보다 죽음이 묵직하게 다가왔어요. 정신 멀쩡할 때 미리 유서 써놓는 게 남은 가족을 위한 확실한 애프터서비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10년간 주기적으로 수정, 보완하고 공증까지 받았다.


최신 버전엔 중증 치매 등에 걸리면 안톤과 가족에게 맡기지 말고 요양병원에 보내달라, 장례식은 장례미사로 대신해달라, 화장할 때 일기장을 태워달라 등 매우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한비야 ‘플래닝 닷컴’의 일환”이라고 했다.


—플래닝 닷컴요?


“안톤이 저더러 빈틈없이 계획 세워 꿀벌처럼 바지런히 산다고 붙여준 별명이에요.”


—마무리를 잘하기 위해 부부가 결심한 게 있을까요.


“품위 있게 늙기. 한자를 보면 품위(品位)의 물건 품(品)은 입 구(口) 세 개, 자리 위(位)는 사람 인(人) 옆에 설 립(立)이 있어요. 품위란 결국 모든 말을 때와 장소에 맞게 하는 것 아닐까 해요. 그래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어요. 첫째, 아는 척하거나 말 길게 하지 않기. 둘째,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끼어들지 않기. 우리가 말하는 지식은 어차피 스마트폰에 다 있어요. 스마트폰에 없는 게 삶의 지혜죠. 우리는 지식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나누는 사람으로 무르익자고 했어요.”


한비야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둔 묘비명이 있다고 했다. “‘몽땅 쓰고 가다.’ 재능도, 사랑도, 에너지도, 장점도, 단점도 몽땅!” 단, 결혼 후 변한 게 있다. “전엔 화장한 유골을 산에 반, 형제들 납골당에 반 넣는다고 했어요. 이젠 형제들 납골당과 네덜란드 안톤네 가족 묘에 반반씩 넣는 걸로 바뀌었어요. 안톤도 똑같이 하고. 죽어서도 우리 부부 대원칙은 꼭 지킬 거예요. 50대50!” 죽음을 얘기하며 한비야가 웃었다. 단단한 웃음이었다.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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