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료만 3조원...EPL은 어떻게 세계 최고의 리그가 됐나
더 치열한 경쟁을 위한 균등 분배
출범 30년 만에 세계 최고 리그 된 EPL
토트넘 훗스퍼의 손흥민이 활약 중인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가 올해로 출범 30주년을 맞았다. 한 때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세계 최고 리그 자리를 내줬지만, 현재 EPL은 단연 독보적인 최고 리그의 위상을 뽐내고 있다. 이제는 전 세계 축구 팬들이 가장 열광하는 ‘최고의 스포츠 상품’이라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EPL의 거대한 이적료 지출을 보도한 영국 BBC의 보도/ BBC 홈페이지 캡처 |
EPL의 독보적 위상은 당장 이번 여름 이적시장의 지출 규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영국 BBC에 따르면 EPL 20개 구단이 이번 여름 이적시장에서 선수 영입을 위해 지급한 이적료는 약 19억 파운드. 무려 3조원이 넘는 액수다. 이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독일 분데스리가의 모든 구단들이 쓴 이적료를 합한 액수보다도 많고, 두 번째로 많은 이적료를 쓴 세리에A 전체 이적료의 약 3배에 달하는 액수다.
이렇듯 EPL은 해가 갈수록 전 세계를 대상으로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여 유럽과 남미 등 세계 각 국에서 활약하는 최고 수준의 선수와 유망주들을 마구 끌어오고 있다. 축구 전문가들은 “지금 추세라면 EPL의 위상은 더욱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치열한 경쟁을 위한 균등 배분
1992년 출범한 EPL이 30년만에 세계 최고 리그로 거듭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가장 핵심적 요인으로 “치열한 경쟁을 위한 균등한 배분”을 꼽는다. 무슨 얘기일까. 가장 최근까지 EPL과 세계 최고 자리를 다퉜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와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현재 세계 축구 클럽들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TV 중계료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스트리밍 시장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유럽 축구 리그를 생중계로 보려는 수요가 전 세계적으로 폭증했고, 덕분에 EPL과 유럽 유명 리그들은 TV 중계권과 스트리밍 중계권으로 막대한 수입을 거둬 구단 운영과 유명 선수 영입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
주목할 것은, 두 리그의 중계권 수익 배분 방식이다. EPL은 출범 초기부터 중계권료를 모든 팀에 균등하게 배분하는데 중점을 뒀다. 현재 EPL 20개 구단들은 영국 내 TV 중계권 수익의 50%를 성적에 관계없이 똑같이 배분받는다. 50% 중 25%는 ‘운영비’라는 이름으로 생중계된 경기를 주관한 홈 팀이 중계 횟수만큼 일정 금액을 받는다. 순위에 따른 차등 지급은 영국 내 중계권 수익의 25%에 불과하고, 이 역시도 1위 팀이 20위 팀보다 20배 많은 수준으로 제한된다.
영국 매체 '더 선'이 '더 타임즈'를 인용해 공개한 20-21 시즌 EPL 클럽의 중계권 수익 배분. 리그 순위에 따른 차등 배분(오른쪽 테이블)은 순위별로 200만 파운드 정도에 불과하다. /더 선 홈페이지 캡처 |
최근 급증하는 해외 중계권 수익과 스폰서 수익은 EPL에 참가하는 모든 구단에 동등하게 배분된다. 그 결과 20-21시즌 EPL 우승팀인 맨체스터 시티가 중계권 및 스폰서 수익으로 약 1억6000만 파운드(약 2543억원)을 받았는데, 꼴찌를 한 셰필드 유나이티드는 중계권 수익료로 1억2000만 파운드(약 1907억원)을 받았다. 우승팀과 꼴찌팀의 차이가 약 600억원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는 큰 차이일 수 있지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비하면 현저하게 균등한 배분이다. 같은 시즌 프리메라리가 우승팀 바르셀로나가 중계권료로 약 1억6000만 유로(약 2200억원)를 받았는데, 리그 꼴찌였던 레알 바야돌리드는 4700만 유로(648억원)를 받는데 그쳤다. 1위와 꼴찌팀 간 격차가 1500억원이 넘는다. 흥미로운 건 이 시즌 프리메라리가 3위 팀의 중계권 수익이 1억2000만유로( 약 1600억원)인데, 이는 EPL 꼴찌팀의 중계권 수익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그만큼 EPL의 규모가 월등하게 크고 수익 배분 방식도 훨씬 균등한 셈이다.
이렇다보니 일부 축구 매니아들 사이에선 “EPL의 배분 방식은 사실상 공산주의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최근 EPL 최상위권 클럽에서는 “해외 중계권 수익도 성적에 따른 차등 분배를 해야하는 게 아니냐”며 현행 수익료 배분 방식은 역차별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균등한 배분 방식은 EPL 하위권 팀들의 재정력을 향상시켰고, 그 결과 EPL 하위권팀들이 다른 상위 리그의 상위권 팀 선수까지 영입할 수 있게 해줬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이 수십년간 반복된 결과 EPL 최상위권팀과 하위권팀 간의 전력 격차가 점점 줄어들었고, 그 결과 리그 우승과 유럽 챔피언스리그 진출 경쟁, 심지어 강등권 탈출 경쟁까지 해마다 더 치열해지고 있다. 리그가 끝날 때까지 축구 팬들이 EPL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빅클럽 감독들 사이에서는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보다 EPL 우승이 더 어렵다”는 말까지 나온다.
일각에선 “EPL 최상위권 팀들이 챔피언스리그와 유로파 리그에 진출해 별도의 중계권 수익을 벌어들이는 점을 감안하면 EPL 내 빅클럽과 기타 클럽 간의 수익 격차가 이미 존재하는 만큼 EPL 내 균등한 배분 방식이 도리어 클럽 간 재정 격차를 보정해주는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EPL에서 굳이 차등 배분을 강화하지 않더라도 이미 빅클럽과 기타 클럽 간의 격차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이적시장 막판 그리스 명문 클럽 올림피아코스에 합류한 황의조. 황의조는 EPL에 승격한 노팅엄 포레스트에 입단한 직후 임대로 올림피아코스에 합류했다. /올림피아코스 배포 |
결과적으로 EPL 클럽들은 순위와 상관없이 중계권 수입을 근거로 막대한 자본을 앞세워 매년 이적 시장에서 수준 높은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24년 만에 EPL에 승격한 노팅엄포레스트가 승격팀임에도 불구하고 약 1억4900만 유로(약 2050억원)를 들여 20명이 넘는 선수를 영입했다. EPL 클럽이 등록할 수 있는 선수가 25명인 걸 감안하면 EPL에 승격하자마자 사실상 선수단 전체를 새로 갈아엎은 셈이다.
반면 프리메라리가는 오랜 기간 중계권 계약을 각 클럽에서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다. 그렇다보니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유명 클럽은 자신들의 위상과 인기를 내세워 막대한 중계권 수입을 거둔 반면, 인기가 없는 하위 팀들은 계속해서 낮은 중계권 수익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점점 최상위 클럽과 하위 클럽 간 격차가 벌어지면서 프리메라리그는 점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매번 우승 경쟁을 벌이는 식싱한 리그가 됐다.
결국 EPL의 거센 추격에 놓인 프리메라리가는 2015년부터 EPL처럼 보다 균등한 수익 배분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중계권 수익의 50%는 최근 5년 간 성적 등을 근거로 차등 분배하기 때문에 EPL에 비교하면 여전히 하위권과 상위권 간 격차가 현격한 상황이다. 결국 유럽 축구 연맹(UEFA)이 유럽 대항전 성적을 기준으로 산정하는 리그 랭킹인 UEFA 랭킹에서도 지난 2021년부터 EPL이 프리메라리가를 제치고 유럽 내 1위로 올라섰다.
축구 전문가들과 외신은 “EPL의 추구한 균등한 배분이 결국 리그 전체에 더 치열한 경쟁을 가져온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으론 결과에 따라 큰 차등을 두는 것이 더 공정한 배분이라고 볼 수 있지만, EPL과 같은 균등한 배분이 도리어 EPL 전체의 생태계 내의 경쟁을 활성화하고, 그 경쟁을 통해 리그 전체의 경쟁력을 발전시키는데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더 치열하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 균등한 배분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례가 바로 EPL인 셈이다.
◇비난에 굴하지 않는 외부에 대한 개방성
EPL의 거대한 성공을 받친 또다른 축은 바로 외국 선수와 지도자, 외국 거대 자본에 대한 개방성이다. 일각에선 “축구와 성공을 돈으로 사는 건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지만, EPL이 전 세계 축구 팬들이 열광하는 최고의 리그로 빠르게 성장하는 데 있어 외국 자본과 인적 자본에 대한 개방성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꼽힌다.
한 때 영국은 ‘축구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에 갇혀 외국인 선수와 외국인 지도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EPL이 출범하고 클럽 간 경쟁이 격화하자 오로지 실력을 중시하는 개방적 실용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현재 EPL 최상위 클럽의 감독을 보면 펩 과르디올라(맨시티), 위르겐 클롭(리버풀), 에릭 텐 하흐(맨유), 미켈 아르테타(스페인), 안토니오 콘테(토트넘) 등 잉글랜드 국적이 아닌 외국 지도자들이 대부분이다.
외국 거대 자본의 투자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다. 현재 EPL의 최상위클럽 대부분은 ‘슈퍼 리치’ 또는 거대 스포츠 자본들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 그 본격적인 출발점은 지난 2003년 러시아의 대표적 올리가르히(Oligarch)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첼시를 인수한 것이다. 이후 아랍에미리트(UAE) 셰이크 만수르가 맨체스터 시티를, 미국인 출신 사업가이자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주인 존 헨리는 리버풀을 인수했다. 작년에는 사우디 국부펀드가 뉴캐슬 유나이티드마저 인수하자 일각에선 “EPL이 슈퍼 리치들과 거대 자본들의 놀이터가 됐다” “돈으로 축구와 성공을 사려는 시도가 너무 빈발한다” 는 불평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슈퍼 리치’들과 거대 자본이 EPL에 들어와 특급 선수와 지도자, 감독을 영입하는데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면서 EPL 클럽들은 더 가파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특히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EPL은 맨유, 아스날, 리버풀, 첼시가 돌아가며 우승 경쟁을 했지만, 거대 자본들이 진출하면서 맨체스터 시티와 토트넘 등이 우승권 경쟁에 가세하게 됐다. 중상위권 경쟁도 해마다 오리무중이라 할 정도로 치열해진 상황이다.
“축구를 돈으로 사려 한다”는 비난이 무색하게 2016년에는 하위권과 2부 리그를 오가던 레스터 시티가 최상위권 팀들을 줄줄이 물리치고 EPL 우승을 차지하는 기적 같은 우승 스토리가 펼쳐지기도 했다. ‘EPL에서도 축구공은 여전히 둥글다’는 축구판의 진리가 다시금 입증된 것이다.
외국 자본과 지도자 외에 외국 선수에 대해 높은 개방성을 유지하는 것도 리그 수준이 빠르게 향상된 요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홈그로운(Home-grown) 제도다. 현재 EPL은 각 클럽 별로 25명의 선수 중 8명은 선수 국적과 상관 없이 21세가 되기 전 잉글랜드 또는 웨일스의 클럽에서 3년간 훈련 받은 선수를 의무적으로 등록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영국 출신 선수들의 성장과 기량 향상을 위한 배타적인 규정인데, 따져보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관대한 편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는 25인 로스터 중 EU(유럽연합) 출신이 아닌 선수는 최대 3명까지만 등록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코리안 리거들이 EPL보다 스페인에 진출하기 어려운 이유로 꼽히는 게 바로 이 EU 출신 규정 때문이다.
분데스리가는 EPL과 같은 홈그로운 규정에다 경기에 출전하는 11명 중 EU 출신이 아닌 선수는 3명까지만 출전시키도록 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포르투갈 출신 선수들을 선호하는 EPL의 울버햄튼의 경우 매 경기 11명의 선발 선수 중 포르투갈 출신이 8~9명을 차지하는 것을 생각하면 대조적인 규정이다. 이탈리아 세리에A 역시 EU 출신 선수는 3명까지 제한하고, 동시에 이적 시장에서 EU 출신이 아닌 선수는 1년에 단 2명만 영입하도록 하는 더 배타적인 용병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외국 선수들에게 관대한 규정을 적용하다보니 EU 출신이 아닌 선수에겐 EPL로 진출하는 것이 훨씬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대신 EPL은 소위 ‘불량품’을 줄이기 위해 취업 비자를 거름망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입하려는 외국인 선수의 국가 대표팀이 FIFA 랭킹 50위 안에 들고, 해당 선수가 대표팀에서 2년간 30~75%의 A매치에 출전해야만 취업 비자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선수에게만 취업 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개방성을 폭넓게 유지하면서도 리그 내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를 겸비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요인들의 단점이 없진 않다. 리그 내 경쟁이 과열되면서 선수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너무 심해진 탓에 도리어 과거보다 전반적인 경기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또 EPL이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게 되면서 EPL을 제외한 다른 유럽 리그들이 점점 고사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축구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EPL이 급속도로 세계 최고 리그로 성장한 요인들은 축구 뿐만 아니라 각 산업 생태계의 발전에 중요한 함의를 던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말한다. 경쟁이 과도하다면 건전한 경쟁을 추구해야지 경쟁 자체를 없애는 방식의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