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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축구도 삶도, 나는 이기적으로 헌신을 선택했다"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선량한 기회주의자 "공 패스하듯 받은 기회 흘려보내"

"양말 장사? 사회적 기업 ‘삭스 업'일으켜"

"기회 나누면 억울함 사라져… 받은 것 패스해야"

"나는 기버 아닌 테이커... 대가 없이 많이 받았다"

"은퇴 후 우울증… 행복, 성취가 아닌 일상에서 찾아"

조선일보

성실과 헌신의 아이콘 이영표. 그를 사회적 기업 ‘삭스 업'의 대표이자 컴패션 한국홍보 대사 자격으로 만났다./사진=장련성 기자

사회적 약자를 위한 스타트업이 줄기차게 모여드는 곳. 선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회 혁신가들의 성지, 성수동의 소셜 벤처 빌딩에서 이영표를 만났다. 스타트업 기업 ‘삭스 업(Socks up)'의 대표이자, 컴패션 한국 홍보대사로서의 만남이었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 임팩트스퀘어와 같이 하고 있어요. 함께 하는 멤버 5명은 좋은 회사에서 다니다 나와서 연봉도 깎고 동참했어요(웃음)." 좌우 균형이 반듯한, 특유의 미키마우스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가 말했다. 베이지색 점퍼를 입고 노트북을 켜놓은 모습이 영락없는 소셜 벤처 사업가였다.


대체 그가 말하는 사회적 가치라는 게 뭘까?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돌진하던 사나이는, 인정받던 KBS 축구 해설위원까지 그만두고, 왜 이 일에 매달리고 있는 걸까?


2002년 월드컵 이후 이영표는 PSV 에인트호번과 토트넘,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를 거쳐 밴쿠버 화이트캡스에 이르기까지 세계무대를 치열하게 누볐다. 2013년까지, 네덜란드, 영국, 독일, 중동, 캐나다... 거의 모든 빅리그를 뛴 그를, 사람들은 대체 불가능한 레전드로 기억한다.


그렇게 늘 한발 앞서 보내고자 하는 지점에 정확하게 공을 차듯, 해야 할 말도 정확한 지점에 풀어놓는 달변가 이영표. 축구는 그를 뛰게도 만들었지만, 생각하게도 만들었다.


14년 프로 생활 동안, 자신은 고통으로 단련된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를 이기적인 헌신주의자라고 했고, 나는 그를 선량한 기회주의자라고 불렀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지요?


"풋웨어를 만드는 스타트업이에요. 사회적 기업과 유사한 형태인데, 풋크림, 양말 등 발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해요."


문득 월드컵 4강 신화가 끝난 후 사진작가 조선희가 찍었던 그의 발 사진이 떠올랐다. 왼쪽 윙백을 누비며 골문 앞으로 정확하게 공을 배달해 주던 그 ‘헌신적인 발’은, 으깨진 채로 우뚝했다.


그런데 왜 하필 발인가요?


"시작은 발이 아니라 양말이었어요. 축구 하다 넘어지면 일어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양말을 잡아 올려요. 프리킥 찰 때도 양말부터 당기죠. 그걸 ‘삭스 업'이라고 해요. 도전에 앞서 자신을 추스르는 루틴 같은 것. 그런데 축구장에서만 그런가요? 우리 삶에서도 ‘삭스 업'이 필요하잖아요.


사실 저의 대전제는 하나였어요. ‘남을 돕자. 넘어진 사람들을 ‘삭스 업' 시키자’. 지속해서 도우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남의 돈 기부받아서 하는 건 지속성이 떨어지고, 그럼 사업을 하자, 어떤 사업?… ‘옳지, 양말!’ 이렇게 된 거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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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아티스트 코드쿤스트의 편지로 디자인 된 삭스업의 양말. 한 켤레 1만원, 소셜 펀딩 형식으로 판매된다.

본질을 파고들어 답을 구했네요. 양말 장사, 쉽지는 않을 텐데요(웃음).


"몸이 지닌 것을 헤아려 봐도 모자, 바지, 장갑, 속옷, 신발… 양말이 제일 싸요(웃음). 세상적인 기준으로 양말은 하찮은 물건이죠. ‘양말 쪼가리’라고 하잖아요. 양말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열등감 들겠어요. 그런데 우리도 알고 보면 다 바탕에 열등감 투성이잖아요.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 보면 한없이 작아지죠. 쓸모없고 부족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하찮아 보이는 이 양말에 의미를 넣기로 했어요."


‘초롱이'라는 별명처럼 안 그래도 반짝이던 이영표의 눈이, ‘양말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더 초롱초롱 환해졌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삭스 업 모먼트 프로젝트’는 셀리브리티를 인터뷰해서 그들의 메시지를 양말에 새겨넣는 작업. ‘웃음에 희망을 담아 날린다'는 송은이의 메시지는 천사 날개 양말로 나왔다.


이영표가 자랑스럽게 보여준 힙합 프로듀서 코드쿤스트의 양말은 깨알 같은 글씨가 양말목까지 빼곡했다.


그 양말은 정말 힙해보이네요. 노래 가사인가요?


"지금은 ‘쇼미더머니’ ‘고등 래퍼' 등으로 유명한 코드쿤스트의 편지예요. 무명일 때 그는 정말 간절했대요. 힘 있는 사람이 내 노래를 한 번만 들어줄 기회가 있다면… 그래서 애타는 마음으로 미국의 유명 래퍼인 조이 베데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당연히 안 열어보죠. 거기서 끝내지 않고 그의 운전기사,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주변 인물의 이메일로 계속 편지를 보낸 거예요.


어느 날 우연히 편지를 읽은 매니저가 그의 음악을 베데스에게 들려줬고, 베데스는 코드쿤스트를 당장 LA로 초청했어요. 기회가 열렸고, 코드쿤스트는 유명 아티스트 됐죠. 이 양말에 쓰인 글자가 바로 베데스에게 쓴 코드쿤스트의 편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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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밝게하는 모범적인 크리스천 이영표./사진=장련성 기자

"나한테 기회를 달라"는 메시지군요. 그 메시지는 양말을 타고 또 어디로 흘러갔나요?


"이 양말을 산 사람 중에서 힙합 프로듀서를 꿈꾸는 50명을 초청해서, 원데이 클래스를 열었어요. 코드쿤스트는 자기가 받은 기회를 그들에게 원없이 흘려보냈어요. 돈 없을 때 기계는 뭘 사면 좋은지, 영감이 막히면 어떻게 하는지, 실수는 어떻게 음악적 소스가 되는지… 세세한 음악적 노하우를 나눴죠."


기회는 청년들에게 더욱 간절해요. 저도 젊은 시절 저에게 기회를 준 분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맞아요. 여길 보세요. (노트북에서 한 소년을 보여주며)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130km 떨어진 곳에 사는 샤킬레 라는 17세 소년이에요. 새벽부터 밤까지 축구공을 끼고 살아요. 한국 축구팀에 테스트를 받아보는 게 이 아이 꿈이었죠. 저희 삭스 업이 작년에 이 친구를 초대해서 그 기회를 줬어요. 아쉽게도 불합격했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기회의 의미를 더 알게 됐다고 했다.


"되게 실망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너무 밝은 거예요. 나는 자격이 있는데 아프리카에 태어나서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대요. 매일 자기 삶을 저주하면서. 그런데 와서 겨뤄보니,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대요. 중요한 건 억울함이 사라진 거예요. 고맙다고, 자기도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건 남에게 기회를 주는 삶을 살겠다며 돌아갔어요. 그 친구도, 그 테스트 기회를 얻기 위해 남아공 학교 선교사님 통해서 제게 이메일을 한 100통은 보냈을 거예요(웃음)."


이영표는 2019년부터 컴패션 한국 홍보대사도 맡고 있다. 컴패션은 1952년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한국의 전쟁고아를 돕기 위해 시작한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 10만 명 이상 한국 어린이들이 도움을 받았다. 지금은 전 세계 180만 명이 각국 컴패션 후원자들의 일대일 후원(한달에 4만 5천원)으로 양육되고 있다.


그는 현재 브라질을 비롯한 빈곤국의 6가정을 후원 중이며 그의 세 딸도 각자의 명절 용돈을 모아 또래 아이들 3명을 후원하고 있다.


기버(giver)와 테이커(taker)라는 말이 있어요. 늘 퍼주는 사람과 영악하게 받기만 하는 사람을 일컬어요. 애덤 그랜트가 쓴 ‘기브 앤 테이크'를 보면, 신기하게도 성공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결국 기버더군요. 선수 시절, 당신은 왼쪽 윙백에서 항상 결정적인 골을 차도록 공을 ‘주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골문 옆에 선 ‘기버'의 운명이 때론 억울하게 느껴진 적은 없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부터 축구를 했어요. 공을 차면서 제가 발견한 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제 욕심이었어요. 기회가 오면 내가 골을 넣고 싶다! 팬들은 골 넣는 선수를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감독들은 달라요. 감독은 팀에 헌신하는 선수를 좋아해요. 11명이 경기할 때 결정적 역할은 2~3명이면 충분해요.


나머지 8명은 헌신해야죠. 능력자 1~2명이 있는 팀은 한 경기 정도는 이겨요. 그런데 시즌 전체 우승컵을 가져가는 팀은 헌신하는 선수들이 많은 팀이에요. 헌신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절대 못 이겨요. 저는 거기서 오는 기쁨이 크다는 걸 알았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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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 한국과 이탈리아의 8강전에서 이영표가 승리 후 자축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카메라는 골을 넣는 선수를 화려하게 비추는데요.


"카메라도 관중도 박수도 다 스트라이커가 받지만, 벤치에 오면 공기가 달라요. 감독은 공을 어시스트한 선수에게 달려가 감사를 표해요. 처음엔 그게 안 보였어요. 그런데 어느새 저도 그래요. 전반전 끝나면 헌신한 친구에게 달려가 "너, 정말 열심히 하더라!" 격려가 절로 나와요.


골 넣는 사람은 한두 명으로 정해져 있어요. 그들은 자기 위치에서 결정적 기회를 기다리죠. 그런데 헌신의 역할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헌신의 기회는 모두에게 있다니까요(웃음)."


늘 헌신의 기회를 노리는 선량한 기회주의자. 지금은 손홍민의 토트넘이지만, 한때 이영표의 토트넘이던 시절이 있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그는 토트넘의 왼쪽 윙백을 책임졌다. 최근 한 방송 채널에서 영국을 찾아가 11년 전의 이 선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들 기억 속의 이영표는 놀라웠다.


"그는 하루종일 뛸 수 있는 선수같았다." "항상 달리고 공격하는 선수였다." "믿을만하고 꾸준하며 탄탄한 사람이었다." "100% 헌신해서 보기에 즐거운 축구를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빙그레 미소 지으며)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저보다 축구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실력으로 보면 저는 참 애매했어요. 실력이 부족하면 선택권이 많지 않아서, 저는 ‘열심히'를 선택했어요(웃음). 그런데 그 잘하던 사람들이 중간에 많이 포기를 했어요. 저는 포기를 안 해서 거기까지 갔죠.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겸손하군요.


"하하. 능력이 있는데 없다고 하는 게 겸손이에요. 저는 능력이 부족했어요. 제가 다른 친구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 적이 거의 없어요. 워낙 능력자들이 많았어요."


누가 그렇게 훌륭했지요?


"박지성이요.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이 친구가 잘하면서도 헌신적이에요. 같이 뛰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열심을 다했어요. 참 멋있었어요."


박지성과 이영표가 각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토트넘 소속으로 영국 구장에서 싸울 때, 경기중 슬며시 손을 잡은 사진은 유명하다. 이영표가 박지성에게 공을 뺏겨 토트넘이 실점한 직후에 찍힌 사진. "미안해." "괜찮아." 그 치열한 전쟁터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준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그는 박지성처럼 헌신하는 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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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내미는 박지성과 그 손을 잡은 이영표

능력 있는 선수가 아니라 헌신하는 선수가 목표였다는 거지요?


"제가 능력이 있었다면 헌신하지 않았겠죠(웃음). 골 넣고 세레머니 받고. 제가 헌신을 선택한 건 이기적인 마음이었어요. 저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가식이 없는 이영표의 달변은 귀에 시원하게 꽂힌다. 고통과 기쁨을 오가며 담금질 된 듯한 그의 눈빛은 공기를 꿰뚫고 있다. 그 눈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나를 보고 있는 듯 정작 초점은 더 먼 곳에 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쁨보다 고통으로 더 오래 단련되었다고 했다.


고통에 얼마만큼 노출되어 있다고 느꼈지요?


"(가만히 생각하다)밤에 자는 게 무서웠어요. 눈 감았다 뜨면 또다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시작되니까. 밤마다 ‘아! 어떡하지?’하고 잠들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눈 떠 있는 시간이 다 고통의 바다였어요. "


놀라운 건, 인간은 고통이 왔을 때 드디어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더라고. 고통의 메커니즘은 간단했다. 고통이 오면 피할 수 없어 고통이고, 고통이 안 오면 고통이 언제 올까 두려워서 고통이더라고. 고통에 대한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평생 짓눌려 살 판이었다. 토트넘 시절이 고통의 클라이맥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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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했지만 시선의 평점에 둘러쌓였던 토트넘 시절.

토트넘은 가장 관심받고 주목받던 시절이 아니었나요?


"그랬죠. 그래서 모두가 나를 평가하던 시절이었어요. 영국 언론인 더 선이나 가디언뿐만이 아니었어요. 한국, 일본, 중국, 아프리카, 프랑스, 독일… 전 세계 모든 언론이 저를 평가하고 평점을 줬어요. 어느 날은 칭찬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은 비난을 퍼부었죠. 타인의 시선의 감옥에 갇힌 거예요. 가장 큰 리그의 최고팀에서 뛰는 꿈을 이뤘는데, 그걸 누리지 못하고 고통에 떨었으니... 어느 정도였냐면 경기하러 갈 때 버스가 굴러서 팔이 부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거기서 벗어났습니까?


"생각을 했어요. 실제 나보다 더 인정받고 싶어 하니 고통이구나. 일단 시선을 내 삶으로 옮기자. ‘내가 발전하고 있나? 내가 즐기고 있나?’ 이것에만 집중하자고요. 그래도 칭찬받고 싶다는 욕심은 잘 해결이 안 됐어요. 탐욕은 못 없애요. 다만 타인을 위해 선한 일로 그 마음을 덮을 수는 있겠더라고요. 팀에서 더 헌신하고, 극빈국에 원정 경기 가면 거기 아이들 돕고."


가식적으로 보여도 그렇게 했더니 고통의 메커니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문득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 이야기를 꺼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비극이 있는데, 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을 때고, 또 하나는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랍니다. 목적이 자기 자신이 되면 꿈을 이뤄도 못 이뤄도 비극인 거죠." 그 비극을 돌파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도 결국 헌신이었다.


생각만 하는 것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은 천지 차이라, 의도적으로 헌신을 반복하면 마음은 담대해진다. 담대해진 마음은 고통을 덮는다. 어찌나 담대한지 이영표가 대표로 있는 사회적 기업 ‘삭스 업'의 사훈은 ‘의미 있는 일 하고 망해 보자'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상대적 풍부에 놓인 사람의 부를 정직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빈곤한 사람들에게 이동시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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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패스하듯 우리도 자기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한다고 믿는 이영표. 한국 컴패션의 일원으로 엘살바도르 빈민 가정을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 그는 현재 브라질을 비롯한 빈곤국 여섯 가정을 후원하고 있다./사진=허호

여태껏 살아오면서 솔직히 당신은 자신을 ‘테이커’라고 느꼈나요? ‘기버’라고 느꼈나요?


"저의 바탕은 테이커죠.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는 받기만 했어요. 부모님의 사랑, 친구, 이웃, 형제, 스승들이 없었으면 저는 존재하지 않죠. 태어나는 순간 내가 버려졌다면, 사람들이 나를 다 외면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겠죠. 그 모든 걸 다 대가 없이 받았어요. 크게 빚을 진 거죠.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테이커예요. 그런데 내가 가진 모든 게 다른 사람에게서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줄 수 있어요."


이어령 선생도 말씀하셨듯이, 그래서 삶 자체가 기프트인 거지요.


"네. 그런데 철저하게 받아놓고, 매 순간 더 받으려고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가령 국가대표가 되니 아침저녁으로 5스타 호텔에서 뷔페를 먹었어요. 처음엔 황홀했죠. 그런데 조금 지나니 그 좋은 음식이 물려요. 음식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거죠. 감사를 잃어버리기가 얼마나 쉬워요. 그 누구도 자기가 받았던 것보다 더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재벌도 태어날 때 허벅지에 통장 차고 나오지 않았잖아요. 똑같이 호흡 하나 갖고 온 거죠."


생각해보니 물질도 지혜도 건강도, 경험이나 지식조차 혼자 얻은 것이 아니라 다 받은 것이더라고 했다. 유일하게 그가 스스로 한 것은 ‘노력’이다. ‘연습벌레' 이영표의 성실과 노력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학창 시절, 새벽 등산과 줄넘기 2단 뛰기를 하루 천 번 씩 2년간 지속한 것은 유명하다. ‘헌신적인 플레이'와 함께 그에게 후렴구처럼 따라붙는 ‘기복 없는 탄탄한 플레이’는 무서운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


보통 사람은 당신처럼 성실과 노력을 병행하기 힘들어요. 발전도 기회도 없이 제자리인 것 같은 답보 상태는 못 견딜 일이지요.


"대학교 4학년 때 우리 축구부에 국가대표 6명이 있었어요. 전 주장인데도, 국가대표가 아니었으니 열패감이 있었어요. 그해 겨울, 혼자 나와 땀 뻘뻘 흘리며 운동하다 펑펑 울었어요. "노력해도 안 되는구나. 역시 될 놈만 되는구나." 10년 노력이 미치도록 억울했어요. 그런데 바로 2주 뒤에, 국가대표에 결원이 생겨서 테스트를 받은 거죠. 그렇게 1999년부터 2011년까지 국가대표로 뛸 수 있었어요.


기회는 언제 올지 몰라요. 사람마다 노력의 기준도 다 다르죠. 어떤 사람은 2만 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10을 하고도 부족하다고 해요. 그래도 확실한 게 있어요. 노력하면 발전해요. 문제는 내가 노력해서 발전한 만큼, 남도 노력하면 발전한다는 거예요. 거기서 갭이 생기죠. 그래서 노력에는 시간, 고통, 인내, 눈물이 꼭 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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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면서 깨달은 진리는 하나예요. 10방울 땀 흘리면 더도 덜도 말고 딱 10방울만큼만 발전해요.”/사진=장련성 기자

핵심이 뭐지요?


"대전제는 잘하고 싶으면 경쟁하는 친구보다 더 노력해야 해요. 그가 10시간 하면 나는 11시간. 그런데 그러는 사이 내가 좌절을 이기고, 어느 정도 인정받는 수준에 올라가 있더라고요. 우리는 의사 한 명 뽑는데 100명이 달려들면 1명만 성공, 99명은 실패자가 된다고 해요. 최선을 다하면 꿈을 이룬다는 건 희망 고문이라고.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고요. 그런데 가설이 틀렸어요.


1명 뽑는데 절대 100명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요. 전력질주는 그중 7~8명만 해요. 거기서 1명이 되는 거죠. 그럼 나머지 6~7명은 다음에 도전하거나, 다른 일을 해도 잘해요. 그게 핵심이에요."


노력의 열매를 맛본 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군요.


"하하. 저는 게으름 대회에 나가면 상위권을 차지할 사람이에요. 보통 최소의 노력으로 성공하고 싶을 때 재능을 끌어들여요. 재능이 없으니 해도 안 되네... 저도 그랬죠. 운동하면서 깨달은 진리는 하나예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요. 10방울 땀 흘리면 더도 덜도 말고 딱 10방울만큼만 발전해요."


재능과 노력의 관계는 의외로 깔끔하다. 신은 우리 각자에게 재능을 주셨다. 그런데 그 재능을 노력과 인내, 그리고 시간으로만 찾을 수 있게 하셨다.


인생의 전반전을 큰 기복 없는 성실한 축구 선수로 산 소감이 어떤가요?


"(생각에 잠겨)어릴 때는 축구가 재밌었어요. 내가 찬 공이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게 신기했죠. 공으로 상대의 중심을 이동시키고, 상대를 제치며 드리블 하는 것도 신이 났어요. 그래서 축구를 즐기고 좋아했죠. 프로의 세계는 달랐어요. 즐기라고 돈을 준 게 아니라, 이기라고 돈을 준 거니까(웃음).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는 건 제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오늘 이겨도 내일 지는 게 축구였다. 다만 팀에서 매일 밥 먹고 얼굴 보는 20~30명 동료 사이에서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큰 조직이든 작은 조직이든 인간은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죠. 그런데 역할이 커지면 교만이 오고, 소외받으면 내가 한없이 하찮게 느껴져요. 선수 생활은 그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중심을 잡으려던 삶이었어요. 마음의 기복을 거치면서 나를 지키는 법을 꽤 배웠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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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은퇴 티켓. ‘우리의 전부, 우리의 영광’이라는 문구가 가슴 뛴다.

2013년 10월, 밴쿠버 마지막 은퇴 경기에서 티켓에 새겨진 당신 얼굴이 자랑스러웠어요. 아워 올, 아워 아너(Our all, Our honour). ‘우리의 전부, 우리의 영광’이라니 감동적인 헌사였어요.


"(미소 지으며)그날 제 계획은 경기 끝나고 가족들하고 식사하는 게 전부였어요. 전날, 감독이 불러서 혹시 페널티 킥 찬스가 오면 그 공을 차라고 한 게 전부였죠. 그런데 드라마 같은 일들이 벌어진 거예요."


마지막 골찬스로 페널티 킥 기회가 왔지만, 이영표는 그걸 득점왕을 앞두고 있던 카멜로에게 양보했다. 카멜로는 한 골을 넣고 득점왕이 됐고, 이영표에게 무릎을 꿇고 공을 선물했다. 지켜보던 관중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Our all, Our honour! 그 장면은 생중계로 한국에 그대로 방송됐다.


영광의 순간을 참 많이 누렸군요!


"그렇죠. 그래서 은퇴 전엔 하루하루를 카운트했어요. 내 경기 인생의 마지막 월요일이네, 경기 전 마지막 먹는 된장찌개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도움을 받은 일들만 주마등처럼 떠올랐죠."


2002년 월드컵 개막 이틀 전, 이영표는 종아리가 12cm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때 히딩크 감독이 말했다. "나는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전투적인 재활 끝에, 일주일 만에 목발을 내려놓고 포르투갈전에서 뛰었다. 그가 어시스트한 골을 박지성 선수가 받아넘기면서 역사적인 16강 진출이 뚫렸다. 그 뒤부터 공과 함께 한 그의 인생도 시원하게 뚫렸다.


그러나 공은 잔디와 골문 사이를 그냥 굴러간 것이 아니었다. 노력과 실패와 고통과 환희, 때로는 그에게 허무까지 안겨주었다. 꿈을 이룬 후엔, 오히려 그를 고통의 바다로 침잠시키는 납덩이이기도 했다. 고민 끝에 깨달았다. 내가 공을 가져도, 못 가져도, 우리란 이름으로 기쁠 수 있는 삶. 그것이 축구고 인생이라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저는 행복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은퇴 후엔 우울증에 빠져 음식 냄새도 못 맡았어요. 죽음까지 생각하다 알게 됐죠. 인간은 뭔가를 이뤄서 행복한 게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행복한 거라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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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약 12만 명의 세계 어린이들이 2003년 설립된 컴패션 한국 후원자들을 통해 양육되고 있다. 컴패션 행사에서 어린이들과 공 차는 이영표.

공은 당신 인생에 무엇이었나요?


"공을 갖고 있으면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려요. 공을 패스하면 관심도 넘어가요. 공을 독점하면 내가 승리하는 것 같지만 결국 다 죽더라고요. 축구는 결국 패스예요. 패스만 잘하면 골 넣을 확률이 높아요. 축구뿐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예요. 작은 욕심으로 머뭇거리지 말고, 줄기차게 나한테 온 이익을, 기회를 나눠야 건강해져요."


패스를 잘해야 나도 살고 사회도 산다?


"네. 하지만 사람은 패스하면 안 돼요. 얼마 전 필리핀에 갔을 때죠. 컴패션 후원 가정의 아이를 찾아가는데, 그 좁은 판자촌 골목으로 수많은 다른 아이들이 지나갔어요. 맨발의 아이들이 제 어깨를 스치며 뛰어가던 그 촉감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이 가난한 아이들을 이렇게 무감각하게 지나가는 게 맞나? 그 ‘패싱'의 감각을 또렷이 기억해요... 생각해보면 우리 아이들도 41년간 미국과 캐나다에서 후원의 도움을 받았어요. 이젠 우리도 돌려줘야죠. 나라와 국경을 걷어내면 오로지 인간만 남잖아요."


이익과 기회는 패스하되, 사람은 패스하지 말자. 이영표는 어느새 축구 철학자가 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지금 당신은 무슨 꿈을 꾸고 있나요?


"얼마 전에 집 앞에서 아내와 함께 커피를 마셨어요. 날씨가 쌀쌀해서 긴 옷을 입었는데 햇빛이 어른거리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프리미어 리그에서 뛸 땐 벤치에 앉아 있으면 이를 갈았는데(웃음)… 고작 집 앞 낡은 벤치에서 행복을 느끼다니! 행복의 조건이 환경이라면 그 환경이 사라질까, 행복해도 두려웠을 거예요. 꿈이 있다면,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상의 행복을 놓지 않고 사는 거예요. 공기, 꽃, 햇빛, 바닐라라테, 사랑하는 이와 잡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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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철학자 이영표./사진=장련성 기자

양말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고통과 노력과 헌신과 영광과 국경의 아이들을 지나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끝이 났다. 문득, 나도 양말을 잡아 올리고 싶어졌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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