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라이프]by 조선일보

이만기 “씨름맹키로 인생도 삼세판 아입니까, 함 부딪쳐 보입시다!”

[아무튼, 주말]

모래판의 영원한 황제

천하장사 40주년 이만기


“약관의 이만기(경남대)가 ‘장사의 천하’를 통일, 스포츠 단일 대회 개인 경기 상금 사상 최고인 1700만원을 거머쥐었다. ‘떠오르는 해’ 이만기가 마침내 홍현욱·이준희의 양대 산맥을 허물고 국내 씨름의 새 질서를 낳았다. 그것은 분명 씨름계의 쿠데타였다.”


1983년 4월 1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스무 살 대학생 이만기가 혜성처럼 나타나 한라장사 최욱진을 누르고 초대 천하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것이다. 전국대회에서 우승 기록이 없는 무명 선수가 베테랑 선수들을 하나씩 넘어뜨리며 왕좌에 오른, 그 각본 없는 드라마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당시 대통령이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 시작 시간을 늦췄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인기에 불이 붙은 씨름은 국민 스포츠 반열에 올랐다.


그 중심에는 이만기라는 스타가 있었다. 한라급에서 시작한 이만기는 몸을 불려 백두급으로 월반했다. 기술에 무게를 더한 그는 씨름판의 황제로 군림했다. 1991년 3월 스물여덟에 은퇴할 때까지 천하장사 10회, 백두장사 18회, 한라장사 7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모래판 위 그의 몸짓에 대중이 웃고 울었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씨름 하면 이만기, 이만기 하면 씨름’으로 통한다. 이달 초 그가 교수로 재직 중인 경남 인제대 김해캠퍼스에서 그를 만났다. 예순이 된 천하장사는 푸근한 이웃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웃음 지을 때 생기는 주름이 자연스러웠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지예? 뭐 물어본다꼬 여까지 왔심니꺼?(웃음)”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는 진지해졌다. 모든 얘기는 씨름으로 수렴됐다. “씨름 살리는 일이면 지옥이라꼬 몬 가겠슴니까. 초대 천하장사로서 책임감이라 할까예…. 씨름은 절대 사라져선 안 됩니더.”


◇1980년대 씨름은 국민 스포츠, BTS급 인기 누렸다


-학생들 가르치랴 방송도 하랴 참 바쁘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K씨름 진흥 민관합동위원회 활동도 한다고요?


“강의, 씨름 관련된 일은 당연히 해야 하고요. 경상남도 배드민턴협회장, 경남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홍보대사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 바쁘게 사시나요.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잖아요. 나한테 좋은 일, 나한테 필요한 일만 하면 쓰나요? 내 역량이 허락하는 한, 받은 사랑을 사회에 돌려줘야 조금이나마 따뜻한 세상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해로 천하장사가 된 지 40년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네요. 1980년대엔 씨름이 야구, 축구보다 인기가 높았습니다. 상금도 제일 많았죠. 우리 민족 정서와 잘 맞아떨어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당시 장충체육관이 8000석인데 관중이 너무 많아서 ‘집에 가셔서 텔레비전으로 시청하시라’는 안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경기가 열리면 근처 교통이 마비됐고, TV 시청률은 60% 이상 나왔습니다.”


-씨름 인기에 이만기 장사가 크게 한몫했지요.


“제 입으로 말하긴 쑥스럽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씨름판에) 등장한 것을 좋아해주신 것 같아요.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을 이기는, 그런 역동적인 모습이 국민에게 대리 만족을 준 것 아닐까요. 인기요? 지금으로 따지면 BTS 수준의, 상상 초월이었지요(웃음).”


-경기를 보다가 돌아가신 분도 있었다고요.


“4회 천하장사 결승전을 TV로 보시다가, 이준희 장사가 저를 넘어뜨리는 순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씨름은 선수도, 관중도 굉장히 몰입하고 눈 깜빡할 사이에 결판이 나는 스포츠입니다. 실제 경기장에서도 한참 고요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와’ 하고 함성이 터지죠. 그래서 안타까운 사고가 터진 것 같아요. 제 시합 날만 되면 물 떠놓고 기도해주시는 어머니도 많았고요. 응원하다가 부부 싸움을 한 사연, 씨름 보다가 밥을 태워먹었다는 사연 등 에피소드가 넘칩니다. 9시 뉴스는 미뤄지기 일쑤였지요. 그때 씨름은 정말 남녀노소가 즐기는 국민 스포츠였습니다.”


◇초대 천하장사 결정전, 인생을 바꾼 호미걸이


씨름은 내 중심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려야 이기는 스포츠다. 이만기의 통산 전적은 345전 293승 52패, 승률이 84.9%다. 이준희 장사는 ‘만기는 빠르고 기술 좋고 꼬롬한데(영리한데) 갈수록 힘까지 세지니깐 완벽해지더라’라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했나요?


“첫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몸이고요. 둘째는 ‘낮추는 씨름’에서 ‘드는 씨름’으로 스타일을 바꾼 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체구가 작아서 낮추는 씨름을 했어요. 고2 때부터 몸집이 크기 시작해서 드는 씨름으로 변화했는데, 그러다 보니 기술의 폭이 굉장히 넓어졌죠.”


-필승 전략이 있었나요.


“역칠기삼(力七技三)이에요. 씨름은 체력, 근력이 기본입니다. 끊임없는 훈련이 답이지요. (굵은 왼손 엄지손가락을 보여주며) 어렸을 때부터 샅바를 잡고 당겨서 이렇게 커졌습니다. 늘 정해진 훈련량보다 많이 하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리어카 튜브를 철기둥에 매고 당기고, 뛰어서 산을 오르고, 265㎏짜리 바벨을 어깨에 얹고 스쿼트를 하고… 스포츠는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옵니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최고의 한판이라면.


“초대 천하장사 결정전 마지막 판이지요. 그 한판으로 저의 세상이 바뀐 거예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지요. 마지막 호미걸이는 너무 생생해요. 최욱진 장사를 딱 들었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때 번쩍, 순간적으로 다리를 걸었습니다. 호미걸이는 평상시 연습하던 기술이 아니었어요. 근데 딱 걸렸습니다. 2초도 안 걸렸을 거예요. 내 머릿속에서는 슬로모션처럼 진행됐지만요.”


-이길 것 같다고 생각했나요.


“(4강에서 만난) 이준희 장사를 한 판만 이겨보는 게 소원이었을 정도로, 선배들하고 실력 차이가 많이 났어요. 천하장사는 언감생심, (한라장사) 체급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 그런데 전날 한라장사 경기에서 최욱진 장사에게 졌지요. 자신감이 확 무너졌지만, 동시에 오기도 생기더군요. 만약 전날 이겼다면 나태해져 천하장사를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


-상금의 절반 이상을 선후배 뒷바라지에 썼다면서요.


“그때는 그런 문화였어요. 씨름 선수들이 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니까, 기부하는 게 당연했죠. 예전에 고교 야구가 인기였는데, 야구하는 애들은 한여름에도 수박에 콜라에 늘 풍족했어요. 우리(씨름 선수)는 대야에다가 식용 얼음 띄운 물을 바가지로 퍼 먹었습니다. 상금을 여기저기 나누다 보니 처음엔 세금 낼 돈이 없었어요. ‘기부금이라도 면세해달라’고 하니까 국세청에서 ‘기부는 당신 기분 좋아서 한 것 아닌가’ 하더라고요(웃음).”


이만기는 씨름 선수가 된 것도, 천하장사가 된 것도 모두 ‘운명’이었다고 했다. “큰형이 장조카를 마산으로 유학 보내면서, 의령 시골집에 있던 저도 함께 보냈습니다. 전학을 가니까, 선생님이 씨름부에 사람이 없으니 들어가라고 하더군요. 마침 씨름이 소년체전 종목으로 선정됐고, 경남교육청에서 우리 학교를 씨름 학교로 지정했습니다. 또 성인이 되니까 갑자기 천하장사 대회가 생겼고요. 톱니바퀴처럼 이렇게 딱딱 맞춰진 게 저도 참 신기합니다.”


◇“씨름 망가지는 것 보고 속에서 천불이 났다”


모래판의 황제는 1989년 10번째 천하장사를 끝으로 은퇴를 결심했다. 하지만 돌연 은퇴를 미뤘고, 1991년 3월에야 샅바를 벗었다.


-화려한 은퇴를 포기한 이유는요.


“저도 정상에서 멋지게 은퇴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씨름의 맥을 이어갈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만기가 떠나면 씨름판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은퇴를 미뤘죠. 그런데 기막히게 강호동이란 신예가 나타났어요. 호동이가 나를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한창 천하장사 할 때 호동이는 귀여운 아이였으니까요.”


-두 사람이 겨룬 1990년 18대 천하장사 준결승전은 아직도 회자됩니다. 강호동 선수가 괴성을 지르면서 도발했죠. 나중에 ‘나도 선배들 앞에서 소리 지르고 오버를 했다’며 그를 감쌌던데요.


“하하. 사실 관중을 보고 ‘파이팅’은 하지만, 상대 선수한테 그러진 않습니다. 강호동 선수는 지략이 뛰어난 선수예요. 그 나름대로 선배를 이길 방법을 찾은 것이죠. 제가 그때 ‘깝죽거리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경기 규칙을 지키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는 게 맞습니다. 당시에 제가 강호동을 얕잡아보고 긴장을 좀 놓았던 것 같아요. 실제 붙어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후배 강호동에게 왕좌를 뺏기고 떠난 셈이 됐는데 아쉽진 않았나요.


“전혀. 씨름판에 거름이 되어 은퇴할 수 있어서 오히려 감사했어요. 우리나라 씨름 초대 천하장사이자 천하장사를 10번 한 사람이 이만기라는 기록은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씨름은 1990년대 후반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IMF 이후 씨름이 외면받기 시작했습니다. 덩치 큰 선수들이 선전하면서 승부의 의외성은 사라졌고, 팬들은 더 재미있는 스포츠를 찾아 떠났습니다. 가장 큰 패착은 씨름인들이 시대 변화에 발맞추지 못한 점입니다. 선수도 관중도 뒷전이었고, 씨름협회·연맹 간부들만 거들먹거렸죠. 상황이 어려워지자 최홍만, 이태현 등 걸출한 선수들이 이종 격투기(K-1) 등으로 전향했습니다. 선수들도 밥벌이를 해야 하니까…. 정말 가슴이 찢어졌죠. 씨름판이 망가지는 걸 보고 속에서 천불이 났습니다. 제가 씨름협회, 씨름연맹에 쓴소리도 참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씨름연맹의) 제명 조치였죠. 그런다고 이만기가 씨름 선수가 아닌 게 됩니까? ‘호적 파내라. 그래도 이만기는 영원히 모래판 곁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K-1 진출 제안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마흔 살 즈음이었는데, 단 한 번 경기에 출전하는 조건으로 10억원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K-1이 일본 것인데, 내가 가서 얻어터지면 우리 민족의 혼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어요. 한평생 남을 때려본 적이 없는 제가 그들한테 필요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제일 잘한 놈을 쓰러뜨려서 우리 씨름을 무너뜨리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씨름판만 건전하게 섰더라면, 후배들도 그런 곳에 가지 않았을 겁니다.”


◇30대 교수, 40대 정치, 50대 방송… 60대는 다시 씨름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만기가 강단에 선 지도 30년이 훌쩍 넘었다. 인제대 스포츠헬스케어학과 교수인 그의 연구실 문에는 학생들이 스승의날에 써준 롤링페이퍼가 붙어 있었다. “교수님은 저희 학교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명강의 부탁드립니다.” “씨름 하면 떠오르는 우리 이만기 교수님! 사랑합니다!” 천하장사 김경수, 황규연, 이슬기, 정경진이 그의 제자다.


-부인과 연애하던 시절 ‘내 인생 계획은 20대 천하장사, 30대 대학교수, 40대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지요.


“정치는 참,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정치를 하려고 한 것은 허리 굽은 어르신들이 빈병과 폐지를 줍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었어요. 국민이 아닌 정치인들을 위한 정치를 하니까, 사람들이 힘들고 어렵게 산다는 생각에 내가 바꿔보자 싶었죠. 스포츠 과학 정책을 통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강했고요.”


-네 번이나 출마했는데 번번이 고배를 마신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내가 부족한 탓이 제일 크죠. 운동선수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 문제도 있다고 봐요. ‘씨름 한 놈이 뭘 안다고?’ 하는 거죠. ‘내가 너무 씨름을 잘한 게 발목을 잡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 후보가 ‘이름 석 자도 한자로 못 쓴다’ ‘스포츠를 영어로 못 써 S 자만 써놓고 수업을 한다’ 같은 흑색선전을 했어요. 사람 환장할 노릇입니다. 나도 자식이 있는 사람인데, 아무리 정치판이 진흙탕이라도 없는 말을 지어내면서까지 흠집을 내나…. 정치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을 겁니다.”


운동선수들에 대한 선입관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운동한 놈은 머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편견에는 지금도 화가 나요.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를 해도 그런 식으로 매도를 합니다. 이번 장미란 차관 논란도 마찬가지죠.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사람들인데…. 각계에서 열심히 하고 성과를 올린 사람들이 존경받는 세상이 돼야 하지 않습니까?”


-50대에는 방송 활동을 열심히 했지요. 망가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데요.


“처음에는 씨름이 잊히는 게 싫어서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나처럼 강해 보이는 사람이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니까 시청자들이 ‘천하장사도 우리처럼 평범하구나’ 하고 좋아해주시는 것 같아요. ‘백년손님’이란 프로에서 담장을 무너뜨리고, 장독을 깨먹는 모습은 지금도 얘기하더군요. (그 프로를 통해) 어렵고 어색한 사이인 장서지간 긴장을 좀 허무는 데 제가 일조하지 않았나,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하.”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해부터 MC를 맡고 있는 ‘동네 한 바퀴’도 평이 좋습니다.


“어르신들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천하장사 보고 싶었데이’ ‘니 올해 나이 멫이고? 아이고 젊다’ 하는 분들을 뵈면,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듭니다. 방송하면서 선수 시절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는 것 같아 좋고요.”


-작년에 한 방송에서 1999년생 허선행 장사와 씨름 대결을 했지요. 2대1로 졌지만, 현역 선수를 쓰러뜨리다니 대단합니다.


“처음 섭외가 왔을 때, ‘망신만 당하는 게 아닐까’ 싶어 망설였어요. 하지만 나를 통해서 젊은 선수들 이름이 방송에 나가고, 시청자 중 한 명이라도 더 씨름에 관심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출연했습니다. 죽기 살기로 준비했어요. 31년 만에 샅바를 잡으니, 타임머신 타고 옛날로 간 기분이었지요. 근육도 찢어지고 고생도 엄청 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경기를 보러 온 아들이 많이 감동한 것 같아요. ‘아빠 진짜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씨름판의 떠오르는 스타 김민재 선수가 롤모델로 이 교수를 꼽으면서 ‘기록을 따라잡겠다’고 했습니다. 가능할까요?


“기록은 깨지기 위해 있는 것이죠. 저를 능가하는 선수가 나와서 씨름을 부활시켜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김민재 선수 잘하지요. 천하장사를 제가 7년, 호동이가 3년 했으니, 좀 더 지켜보겠습니다. 하하.”


-최근 젊은 씨름 선수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인기를 끌고, 정부도 씨름 살리기에 의욕적입니다. 씨름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씨름은 민족의 역사와 함께해 온, 우리의 혼을 느낄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당장 스파게티가 좋다고 김치를 버리진 않잖아요? 영원히 함께 가는 거죠. 외국 스포츠도 좋지만, 우리 것 하나 정도는 챙겨야 하지 않을까요? 한민족의 피가 흐르는 한, 씨름은 우리가 지켜서 후대에 물려줘야 할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와 씨름계가 함께 노력해야겠죠. 씨름 전용 경기장 건립이 시급하고, 공영방송 중계도 다시 해야 합니다. 가족 관람객이 부담 없이 올 수 있도록 씨름장의 문턱도 낮춰야 하고요. 씨름인들도 각성해야죠. 우리가 잘했다면, 슬기롭게 변화를 도모했다면 씨름이 망했겠습니까.”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씨름 지키기’에 열심인가요?


“씨름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요. 소중한 문화유산인 씨름이 우리 대에서 끊겨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제가 60대에 이루고 싶은 꿈은 씨름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천년만년 사랑받을 기틀을 마련하는 것, 다시 한 번 비상할 기회를 후배들에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이만기에게 모래판은 ‘인생 학교’였다. 그는 모래판에서 예의, 노력, 중용을 배웠다고 했다. “씨름은 삼세판 아입니까. 한 번 지더라도, 다음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 인생과 꼭 닮았지예. 노력 없이, 실패 없이 단번에 되는 건 없습니다.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말고, 정신 단디 차리고 준비해서 한 번 더 부딪쳐 보입시다. 다음 판에선 이길 수 있다 아입니까!”


[김해=이옥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실시간
BEST
chosun
채널명
조선일보
소개글
대한민국 대표신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