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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술이 아닌 육각형 음식이다

[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블러디 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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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올리언스에 다녀온 분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도시에서는 개와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러 간다는 이야기였다. 술 마시는 사람 옆에 소만 한 개가 엎드려 있다고. 실내에 개를 데리고 들어오는 건 아니고 야외 테이블에서 그랬다고. 그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을 그 광경이 꽤 이색적이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술집 앞에서 개가 사람을 기다리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떠올렸다. 짐 자무시의 ‘패터슨’. 나는 애덤 드라이버만이 아니라 그의 개로 나오는 잉글리시 불도그도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개의 화면 장악력이 상당해서다. 비중도 그렇고 존재감도 그렇다. 애덤 드라이버와 일상을 함께하고, 술집까지 같이 가는 개다. 하지만 술집에는 함께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린다.


안타까운 이 장면을, 나는 좋아한다. ‘매일 일과를 마치고 개와 산책하고 단골 술집에 술을 마시러 간다’는 나의 판타지가 담겨 있어서다. 매일 일과를 마칠 수 있다는 것, 매일 산책을 한다는 것, 그것도 개와 한다는 것, 거기에다 단골 술집에 매일 간다는 것까지 모두. 누군가에게는 일상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모두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마치 이룰 수 없는 꿈 같달까. 개를 좋아하지만 키울 엄두는 나지 않는다. ‘나 자신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집 근처에 단골 술집이 있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나만 이렇게 시시하게 사는 걸까?


‘패터슨’에 나오는 그런 술집을 나는 꿈꾼다. 뭔가 아시는 분이 주인인 그런 술집 말이다. 애덤 드라이버의 단골 술집 주인은 만만치 않다. 보통이 아닌 센스를 갖고 있고, 이에 반응하는 손님이 오기에 밤마다 흥미로운 대화를 들을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상적인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어디 나만 그럴까? 혼술하는 이들이 꿈꾸는 술집이 아닐까.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이런 단골 술집을 갖는 게 현생에 이루고 싶은 꿈이다.


뉴올리언스와 개와 술에 대해 생각하다가 뉴올리언스 하면 블러디 메리지 싶었다. ‘패터슨’을 생각하면 개부터 떠오르듯이 뉴올리언스 하면 블러디 메리가 떠오른다. 칵테일 사제락(Sazerac)의 발상지라고 알고 있긴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뉴올리언스는 블러디 메리’라고 박혀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블러디 메리들이 온종일 각축을 벌이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뉴올리언스에서는 아침부터 블러디 메리를 먹는데, 또 아침에만 먹는 게 아니라서 ‘온종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화려함이란 무엇인가. 온갖 과시적인 토핑을 덕지덕지 올렸다는 의미에서의 화려함이다. 토마토 주스 위의 군비경쟁이라는 위험한 비유를 드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뉴올리언스와 블러디 메리를 함께 구글에 검색하면 대체 이게 뭘까 싶은 것들을 보실 수 있다. 기괴할 수도, 흥미로울 수도 있다. 뚱카롱이나 온갖 변종 약과들은 약과라고 느껴지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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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블러디 메리에 셀러리와 함께 꽂힌 베이컨을 보고서였다. 셀러리도 매끈한 줄기가 아니라 이파리가 덥수룩한 부위라 초록색으로 변한 설인(雪人) 예티 같았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새우, 가재, 굴 튀김이나 오크라, 아스파라거스, 오이, 할라피뇨, 올리브 피클을 꽂은 것도 있다. 새우튀김으로 하트를 만들거나 베이컨에 주름을 잡아 프릴을 만들기도 했다. 대체 왜? 먹는 거에 왜? 이런 의문이 들었다. 맞다, 식욕이 감퇴되는 비주얼이었다. 그런데… 기괴하다고 생각한 그 이미지에 나도 모르게 젖어들어 버렸다.


결국, 뉴올리언스 스타일 블러디 메리를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 뉴올리언스에 다녀온 분에게 선물받은 핫소스가 방아쇠가 되었다. ‘뉴올리언스 핫소스가 생겼으니 블러디 메리를 만들자!’라는 흐름이었다. 토마토 주스에 보드카를 타고 타바스코 소스와 우스터 소스와 소금과 후추를 뿌리는 게 블러디 메리의 레시피니 타바스코 대신 뉴올리언스 핫소스를 뿌리면 뉴올리언스 스타일 블러디 메리가 되겠다면서. 참고로 기주인 보드카를 테킬라로 바꾸면 ‘블러디 마리아’가 되고, 진으로 하면 ‘러디 메리’가 된다. 메리(Mary)의 스페인식 이름이 마리아(Maria)라서 블러디 마리아라고 하는 건 짐작이 되는데 왜 러디 메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B를 빼서 그리된 것은 알겠는데 대체 왜 빼는지 말이다. 아무리 논리 따위 없이 허술한 게 칵테일 세계의 내러티브라지만.


어쨌거나 만들어 보았다. 놀라(NOLA, 뉴올리언스의 줄인말) 블러디 메리. 베이컨도 구웠다. 토마토 주스와 보드카를 3:1로 타고 우스터 소스와 뉴올리언스 핫소스를 뿌리고 라임즙을 듬뿍 짠 후 소금과 후추를 뿌렸다. 셀러리와 베이컨을 빨대처럼 수직으로 꽂고, 라임은 컵 테두리에 꽂았다. 마셨는데, 눈이 떠졌다. 깜짝 놀랄 정도의 맛이었다.


이전까지 먹었던 블러디 메리에 비해 내가 만든 놀라 블러디 메리는 놀랍도록 맛있었던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셔놓고 호기롭게 한 잔씩 말아주고 싶을 정도로. 레몬이 아닌 라임을 넣은 게, 듬뿍 넣은 게,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음식이든 술이든 가장 중요한 건 균형이고, 그 균형을 잡아주는 게 산미임을 나는 주장해 왔는데, 내 주장에 부합하는 결과물이었다. 라임을 넣자 토마토 주스의 텁텁함이 해소되며 산뜻함이 더해졌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토마토와 아보카도와 양파로 만드는 과카몰리에 레몬보다 라임을 넣을 때 결과가 더 좋아서 그랬다. 이게 다가 아니다. 베이컨을 씹고 블러디 메리를 마시는데, 오! 전혀 괴이하지 않았다.


놀랍도록 조화로운 이 술을 비우며 나는 놀라 블러디 메리의 비밀을 깨달았다. 술이 아니라 음식이라는 것. 토마토로 만드는 차가운 수프인 가스파초의 알코올 버전이거나. 토마토의 달콤함, 보드카의 씁쓸함, 라임의 산미, 핫소스의 찌릿함, 우스터 소스의 감칠맛, 소금의 짠맛, 셀러리의 식물성 기름 맛에 베이컨의 동물성 기름 맛까지 더해진 이것은 육각형 음식 아닌가 싶었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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