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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이건희 주치의’가 의사인생 마무리한 곳은 고향 보건소였다

[이옥진 기자의 진심]

삼성서울병원장 지낸 뒤 보건소로

50년 의료의 길 마침표 찍은 이종철

의사 이종철은 대형 병원장, 재벌 주치의라는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며 보건소로 내려가 4년을 일했다. 인터뷰 내내 의료계 현실에 대한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지만, 의사라는 업(業)을 향한 애정은 숨기지 못했다. “의사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 좋은 직업입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도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노(老)의사는 빙그레 웃었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2017년 10월, 새 보건소장을 찾던 경남 창원시에 뜻밖의 인물이 이력서를 보내왔다. 이력이 화려했다. ‘삼성서울병원장, 삼성의료원장, 대한소화기학회장, 성균관대 의무부총장,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장….’ 지역 보건소에 지원하는 의사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 마당에 그의 ‘스펙’은 황송한 수준이었다. 시 공무원들을 깜짝 놀라게 한 주인공은 의사 이종철이었다. 이듬해 초 창원보건소장으로 임명됐다.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언론은 이종철의 낙향을 대서특필했다. 국내 민간 병원에서 최고 수준의 경력을 갖춘 인물이 지방 보건소장으로 내려간다는 전례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삼성그룹 고(故) 이건희 회장의 주치의로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던 터였다. 고향인 창원 사람들의 건강 증진을 돕고, 공공의료 발전에 일조하는 것으로 50년 의료 인생을 마무리하겠다는 게 그의 포부였다.


묵묵히 일하던 그가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코로나 팬데믹 때였다. 당초 2년 임기로 부임한 그는 2020년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어쩔 수 없이 연임했다. 2000년부터 삼성서울병원을 운영하며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신종플루 대응을 진두지휘한 경험을 살려, 감염병을 처음 겪는 보건소 직원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는 어느 보건소보다 먼저 24시간 비상대책반을 꾸렸고, 다중이용시설 방역소독을 실시했으며, 감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찾아 선제적 검사를 했다. 한 지역 신문은 이렇게 호평했다. “창원시는 코로나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오고 있다. 그 중심에 이종철 소장이 있다.” 작년 1월 만 4년의 근무를 마치고 퇴임했고,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아름다운 은퇴를 한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국내 의료계의 산적한 문제들 때문이었다. 지방의료 공백, 필수의료 위기 등을 얘기할 때 그는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 쉬었다. “문제가 하도 많아 의료계가 한계 상황에 봉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바로잡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 특히 가난한 환자들에게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이 가해질 것입니다.” 그는 지금을 켜켜이 쌓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골든타임(환자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시간)’이라고 했다.


그의 얼굴은 의사란 직업의 소명의식에 대해 말할 때가 돼서야 비로소 환해졌다. ”생명은 하느님이 다루는 일이죠. 그 일을 의사에게 잠시 빌려준 겁니다. 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입니까.” 푸근한 미소를 가진 일흔다섯의 노(老)의사가 인터뷰 동안 가장 많이 한 말은 “의사는 환자에게 친절해야 한다”였다. 그는 “친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했다.


◇고향 보건소로 간 최초의 대형병원장


-보건소장으로 지낸 시간은 어땠나.


“고향에 돌아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는 버킷리스트를 달성한 것이라서 행복했다, 하하. 의료 복지에 있어서 취약 계층은 완전한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매주 두 번씩 왕진을 나갔는데, 주로 가난하면서 만성질환을 갖고 있는 노인들을 만났다. 약 봉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무슨 약인지도 모른 채 입에 털어 넣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몸 아프면 이곳저곳 가서 약을 받아오는데, 주치의가 없으니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거다. (환자들이) 개인 병원에 가면 의사를 3분 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인데, 나는 가면 30분씩 진료를 보니 좋아했다. 우리나라에는 보건소, 보건지소, 보건진료소 등 공공 의료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지만, 활용이 미약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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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오른쪽)이 창원보건소 재직 시절 왕진을 나가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 /창원보건소

-보건소에 의사가 거의 없지 않나.


“보건소 의사는 ‘관리 의사’란 이름으로 채용되는데, 주변 요양병원에 비해 봉급이 절반 혹은 3분의 1 수준이다. (보건소가) 복지부가 아닌 행안부 산하여서, 복지부나 질병청 같은 곳으로 진출하거나 승진할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다. 누가 가려고 하겠나. 현실적으로 공공 의료와 민간 의료의 협업을 통해 보건소가 1차 의료 기관 기능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본다. 기술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의사를 만나기 어려운 환자들은 원격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선진국이 원격진료를 허용한다. 우리나라도 코로나 시기 한시적으로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면서 아무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다.”


-보건소뿐만 아니라, 지방에 의사가 턱없이 부족하다.


“역시 대우의 문제다.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교수가 되면 억대 연봉을 받고 명예도 얻는다. 반면 지방은? 돈도, 명예도 부족하다. 의사들에게 지방에 안 간다고 뭐라 할 게 아니라, 갈 만한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속초의료원은 연봉 4억원을 제시했는데도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구하지 못했는데.


“의사들이 (고연봉 제안을) 아주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센티브가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돈 많이 주겠다 한들 의사들이 몰려가겠는가. 지방에 근무하는 의료진이 대도시 의료진보다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외롭게 하는 진료임을 사회가 알아줘야 한다.”


-이른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라 불리는 필수진료과 인력난도 심각하다.


“의료 수요에 맞는 적정한 전문 인력을 키워야 하는데, 아예 손을 놓고 있다. 우리나라는 복지부의 몇몇 공무원들이 (진료과별) 전공의(레지던트) 티오(TO·정원)를 정한다. 전문성이 없기 때문에 인력 추계 업무를 학회에 맡기는데, 학회는 소위 ‘역사적 산정’이라는 방식으로 티오를 편성한다. 과거에 했던 대로 정한단 얘기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정부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공별로 의사가 얼마나 필요할지에 대해 연구하는 독자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의사가 더 필요한 과, 덜 필요한 과의 밸런스를 찾아야지, 무작정 의대를 증설하거나 의대 정원을 확대하자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본다. 나라가 보건 의료 인력 수급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티오 조정으로 의사들이 ‘돈 되는 과’에 몰리는 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까.


“개인의 선택을 막을 순 없다.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가겠다는 의사들한테 대뜸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과별 전공의를 몇 명 양성하겠다는 계획은 할 수 있단 얘기다. 올해 대학병원 50곳 중 38곳이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소아과 말고 다른 데 가도 되니까 안 하는 거다. 다른 데 티오를 확 줄이고 소아과를 늘려야 한다. 우리 사회가 소아과 의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소아과 진찰료도 올려야 한다.”


-최근 대구에서 크게 다친 10대 학생이 병원들이 받아주지 않아 구급차를 타고 떠돌다 숨진 사건은 충격이었다.


“안타깝다. 치료가 가능한 병원을 수배해주는 중앙응급의료센터가 있지만 100% 기능을 못하고 있다. 구급대에서 각 병원에 전화해서 ‘받아줄 수 있느냐’ 물어야 하는 게 현실인데, 우리나라 같은 IT 강국에서 이게 얼마나 난센스인가. 응급 환자와 의사를 연결해주는 센터를 광역시도별로 만들어야 한다.”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의료인의 면허를 취소할 수 있게 하는 ’의료인 면허취소법’이 논란이다. 이런 이슈가 생길 때마다 의사 단체가 격한 반대를 하는데, 이를 집단이기주의로 보는 국민도 많다.


“물론 의사 중에는 밥그릇 챙기기에만 혈안이 된 놈들도 있다. 그런데 이를 일반화시키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료인 면허취소법은 의사를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하는 미친 소리다. 의료인들이 면허를 지키려고 중환자, 고난도 환자를 기피하지 않겠는가. 의사들이 불안해하지 않고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게끔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새 학원가엔 ‘초등학생 의대 준비반’도 있다. 의대 쏠림 현상은 어떻게 보나.


“의술이 생명을 다루는 기술이니, 의사가 중요한 직업임에 틀림없다. 앞으로도 인기가 식진 않을 것이다. 다만,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만 고집하는 것은 국가적으론 불행한 일이다. 가능성, 전망이 있는 직업이 많다면 당연히 그것을 지망할 텐데…. 지금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어른들이 다양한 직업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당신이 보건 의료 정책의 책임자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의료보험 제도 개혁. 멀지 않은 미래에 건강보험 재정 건전성 문제가 닥칠 것이다. 현행처럼 건강보험료를 가난한 사람으로부터는 적게, 부자로부터는 많이 걷는 것은 좋다. 하지만 마련된 재원을 쓸 때는 시장경제 논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쟁을 통해 지출을 줄이자는 것이다. 병원도, 의사도, 의약품 도매상도 모두 경쟁시켜야 한다. 또 비급여 진료만큼은 정부에서 가격 통제를 풀어 민간 보험에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민의 기본적 치료권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환자들에게 더 나은 선택권을 주기 위해 사보험을 쓰자는 말이다. 의료 과소비와 과잉 진료를 부추기는 현행 실손보험은 개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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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정부는 '제50회 보건의 날'을 맞아 이종철(오른쪽) 전 창원보건소장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뉴스1

◇삼성서울병원을 일류로 만들다


1948년 경남 마산에서 5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난 이종철의 어릴 적 꿈은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위장병을 달고 살던 어머니를 위해 소화기내과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1967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 1977년 내과 전공의가 된 그는 촉망받는 임상연구가였다. 미 로체스터 의대 연수 시절이었던 1987년 그가 미국 생리학회지를 통해 발표한 논문은 위장관호르몬에 의한 위산분비 억제 과정을 실험을 통해 증명한 세계 최초의 논문이었다.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한양대 교수로 일하며 위기능 검사 연구에 힘을 쏟았다. 방사성 동위원소가 주입된 닭의 간을 사람에게 먹여 소화 패턴을 분석하는 실험을 했는데, 5년간 무려 1500마리의 닭을 잡았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소화력을 측정할 방법이 없었어요. 햄버거를 먹는 서양과 달리 우리는 밥을 먹으니까, 서양의 것을 그대로 갖다 쓸 수 없었죠.” 연구팀은 국내 만성소화 불량 환자들을 진단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대학에 있다가, 1994년 개원을 준비 중이던 삼성서울병원에 합류했다.


“대학의 연구 환경은 척박했다. 삼성전자에서 연구를 지원해주겠다고 했고, ‘원 없이 연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응했다. 소화기내과 과장, 이건희 회장의 주치의로 스카우트됐다. (이 회장 주치의로) 누가 나를 추천했다고 하는데, 추천인이 누군지는 지금도 모른다.”


-2년 만에 기획실장이 됐다. 임상가가 왜 병원 행정의 길을 가게 됐나.


“동생의 죽음이 계기였다. 재무부 공무원이었던 막냇동생이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저녁 11시쯤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수술실에 들어간 게 다음 날 오전 9시쯤이었다. 응급실 당직을 인턴이 서고 있었는데, 호출할 사람이 1년 차 레지던트밖에 없었다. 교수만 기다리면서 밤새 수혈만 했다더라. 지금도 ‘바로 수술했다면 살 수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병원 시스템의 문제가 너무 크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 마침 (이건희) 회장이 ‘이 박사, 우리 병원을 어떻게 만들어가면 좋을지 생각해보라’면서 기획실장 자리를 제안했고, 오케이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이 응급실을 인턴이 보는 관행부터 바꾼 것이다. 반발이 거셌다. 레지던트들이 자기들은 (인턴 때) 다 고생했는데 왜 바꾸냐는 거다. 그래도 바꿨다.”


-또 무엇을 바꿨나.


“기획실장 자리를 제안받고 회장에게 제안한 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의사들을 다 교수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예를 중시하기 때문에 의사들을 붙잡아 두려면 이들을 모두 의대 교수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듬해 성균관대에 의과대학을 만들었다. 둘째, 환자 중심의 병원. 모든 과가 환자 중심으로 둘러 앉아 바로 진료하고 수술할 수 있게 하자고 했다. 그래서 센터 진료란 게 생겨났다. 셋째, 3무(無) 병원. 촌지와 기다림, 보호자가 상주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고 했다. 환자가 오래 기다려야 명의고, 빨리 수술받으려면 의사에게 촌지를 주던 시절이다. 회장이 내 제안을 듣더니 ‘내 몸은 반만 봐주고, 반은 병원 일 좀 해라’ 하더라,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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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서울병원장 재직 시절인 2008년 5월, 이종철(뒷줄 오른쪽)은 난치성 질환을 극복한 어린이들을 초청해 잔치를 열었다. /조선DB

이종철은 2000년 삼성서울병원장에 취임했다. 후발 주자였던 삼성서울병원을 국내 최고 병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무엇으로 승부를 볼까 고민하다 ‘친절한 진료’가 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이종철의 친절 캠페인은 의료계에 환자 중심의 서비스 혁신 바람을 불러왔다. “우리가 백화점에 가면 돈을 내고 물건을 산다. 그럼 직원들이 감사하다며 꼼짝 못 한다. 병원은 어떤가. 돈을 내는 환자가 의사한테 ‘감사합니다, 선생님’이라고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나는 병원에서만큼은 환자가 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료인이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의사가 환자에게 먼저 다가가 친절하게 대해야 비로소 환자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의사들에게 친절과 함께, 소명의식을 강조한다고.


“김수환 추기경을 모셔서 강연을 연 적이 있다. 의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당신들이 가장 부럽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생명 아닌가. 생명은 하느님이 다루는 일이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당신들한테는 하느님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잠시 빌려주셨다. 이게 당신들의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뒤로 나는 언제나 의사들에게 ‘소명의식을 갖고 임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종철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삼성서울병원장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삼성의료원장을 지냈다. 이건희 회장의 주치의는 1994년부터 2012년까지 맡았다.


-이건희 회장은 어떤 사람이었나.


“굉장히 머리가 좋은 사람, 미래를 보는 눈이 대단한 사람. 2000년 초 미국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이 회장이) 치료를 받을 때 5개월 정도 동고동락했다. 그 병원 중정에 스타벅스 카페가 있었다. 커피와 도넛을 사서 나눠 먹는데, 회장이 대뜸 “이 박사, 이거 보고 뭐 느끼는 거 없어?” 묻더라. 답을 못 하고 있으니까 “우리 병원도 이거 한번 해보라”고 했다. 회장은 타고난 사업가였다. 병원에서 수익이 잘 안 나니까, 카페라도 들여서 돈을 벌어보자고 한 거다. 그렇게 병원 안 카페가 한국 최초로 생기게 됐다. 지금은 카페 없는 병원이 없다.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주려면 봉급의 30%는 줘야 한다’는 말도 기억난다. 그 정도는 줘야 의미가 있다는 얘기였다.”


-이 회장이 ‘병원 걱정하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다’고 했다는데.


“병원 운영 초기에는 돈이 많이 필요했다. 맨날 (삼성) 계열사 사장들 찾아가서 기부 좀 하라고 구걸하는 게 일이었다, 하하. ‘첨단 의료 장비를 들여야 병원이 발전한다’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내 아내는 나더러 ‘대표 거지’라고 불렀을 정도다. 회장이 보기엔 기특했던 것 같다.”


◇“다음 생에도 의사가 되고 싶다”


이종철은 65세에 미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으로 연수를 떠났다. 70세에는 창원보건소장이 됐고, 같은 해 동료들과 ‘4차산업혁명과 병원의 미래’란 책을 펴냈다. 요즘에는 의료에 정보통신(IT) 기술을 도입, 활성화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는 “의료계를 위해 하고 싶은 일이 여전히 많다”며 웃었다.


이종철은 ‘환자 중심의 친절한 병원’이라는 새 패러다임을 국내 의료계에 제시했다. 그는 현역 시절 항상 ‘환자가 나를 찾아주니 감사하지 아니한가’란 생각으로 진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경호 영상미디어 기자

-끊임없이 일하고 공부하는 이유는 뭔가.


“나는 (사회로부터) 받은 게 많은 사람이다. 의료인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복을 누렸다. 연수를 다녀와 심평원에서 진료심사평가위원장으로 있는데 ‘내가 또 너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산티아고 순례길을 45일간 걸었다. 수행처럼 걷고 또 걷다가, ‘더 늦기 전에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낮은 곳, 1차 공공 의료 현장인 보건소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이 먹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었다.”


-의료에 IT 기술을 도입한다고.


“창원보건소장으로 있을 때 뇌 활성화 인지 학습 훈련 장비와 가상현실 장비를 갖춘 IT치매안심센터와 주민들의 건강 관련 수치를 측정·기록해 빅데이터를 쌓는 스마트 헬스케어존을 만들었다. 의료계엔 신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혁신이 시급하다. 지금 환자들의 불만이 뭔가. 몇 시간 기다려서 겨우 의사를 만나면 3분도 못 본다는 것 아닌가. 어떤 의사는 환자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컴퓨터만 본다. 많은 수의 환자를 봐야 돈을 버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진료에 인공지능(AI)도 활용해야 한다. 의사는 기술로 번 시간 동안 환자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미래병원의 지향점은 단지 기술로 점철된 ‘사이버 병원’에 있는 게 아니라, 환자의 삶을 매만져 줄 수 있는 ‘따뜻한 병원’에 있다고 믿는다.”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나. 특별한 비법이 있나.


“골고루 잘 먹는 것, 많이 걷는 것. 너무 평범한가, 하하. 소화기내과 의사로서 주변에 권하는 말은 ‘항상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인상을 쓰면 우리의 위도 똑같이 인상을 쓴다. 천천히 식사하는 것도 중요하다.”


-후배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환자는 약한 존재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라. 그들을 가족처럼 대하라. 언제나 낮은 자세로, 친절하게 대하라.”


조선일보

이종철이 보건소행을 택했을 때, 많은 이들이 ‘민간에 남아 있으면 떼돈을 벌 텐데 왜 고생을 자처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사람이 밥을 하루 세 끼 먹지 않나. 나이 들면 그 세 끼도 다 못 먹는다. 내가 돈을 크게 벌어서 뭐하겠나. 나는 수십억원씩 버는 삼성 사장들과 만날 때 ‘월급은 적어도, 당신보다 행복하다’고 했다(웃음). 나는 보건소 의사로 지낼 때 참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는 “의사는 무엇보다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직업”이라며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고 싶다”고 했다. 지금 의사로 살고 있는 사람들, 장차 의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이옥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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