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털이범 같다고요? 얼굴 덮는 ‘복면 패션’ 뜨는 이유
기후 변화와 재난에 대응하는 ‘생존 패션’으로, 명품 시장 등극
색다른 자극 찾는 시대정신? 갱단, 반군 미화했다는 비난도
나이키는 디자이너 매튜 윌리엄스와 협업해 발라클라바를 내놓았으나, 반군처럼 연출한 화보가 갱 문화를 미화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결국 판매를 중단했다./나이키 |
올겨울 또 하나의 이상한 패션이 부상할 조짐이다. 바로 발라클라바(Balaclava)라 불리는 복면 패션이다. 발라클라바는 머리와 목, 얼굴을 덮는 모자로 추운 날씨에 등산이나 스키, 오토바이 등을 즐길 때 쓰는 방한모다. 크림 전쟁 당시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영국군이 혹한을 이겨내기 위해 털실로 짠 모자를 쓴 것에서 유래돼 이름도 지명에서 따왔다. 원래 방한을 위해 개발됐지만, 강도나 테러리스트들이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즐겨 쓰다 보니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방한모에서 유래된 발라클라바, ‘생존템’으로 부상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모자의 유행을 주도한 건 고급 패션 브랜드들이다. 선두는 캘빈클라인. 2018 가을/겨울 패션쇼에서 캘빈클라인의 모델들은 얼굴을 감싸는 발라클라바를 쓰고, 오렌지색 소방복을 입은 채 등장했다.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은 여성스러운 복장에도 어김없이 발라클라바가 씌워졌다.
구찌는 더 과감하게 발라클라바를 활용했다. 보석으로 장식하거나 화려한 모자나 안경 등과 결합해 가면을 쓴 듯한 효과를 줬다. 다양한 색실로 짠 모자들은 마치 잭 블랙 주연의 영화 ‘나쵸 리브레’의 복면처럼 웃음을 자아냈다. 이 밖에도 디올, 마르니, 마르틴 마르지엘라, 국내 브랜드 비욘드클로젯, 블라인드니스 등이 발라클라바를 비중있게 선보였다.
디올, 구찌, 캘빈클라인 패션쇼에 등장한 발라클라바./각 브랜드 |
근사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모자가 뜨거운 액세서리로 떠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생존 패션’에 대한 요구가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최근 패션계는 기후 변화에 따른 재앙과 테러 등에 대응해 안전과 보호가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오죽하면 서바이벌 시크(Survival chic), 워코어(Warcore·전쟁(war)과 하드코어(hardcore)의 합성어) 등의 신조어도 등장했다. 캘빈클라인의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도 자연재해와 폭력에 노출된 세상을 탐구한 끝에 발라클라바와 재귀반사 테이프가 부착된 소방복, 구조 활동에서 착용하는 고무 부츠와 장갑 등을 내놨다. "공포와 두려움 대신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마스크 패션의 진화…가릴수록 돋보인다
소셜미디어 문화 확산되면서 현실에서도 자신을 은폐하거나 왜곡하기 위해 얼굴을 덮는 소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개인 정보가 무방비로 노출되고 도시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늘어나는 디지털 시대의 불안감이 만든 유행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얼굴을 가릴수록 궁금증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K-팝스타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마스크가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패션으로 번진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지난 4월 미국 코첼라 뮤직 페스티벌에서는 팝 가수 리한나가 크리스털로 장식된 구찌의 발라클라바를 쓰고 등장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의 기괴한 패션에 팬들은 ‘매우 멋지다(Super Cool)’는 찬사를 보냈고, 해당 제품은 6일 만에 매진됐다.
”진짜 리한나 맞아요?” 코첼라 페스티벌에 발라클라바를 쓰고 등장한 팝 가수 리한나./인스타그램 |
발라클라바는 색다른 자극을 찾는 시대정신이 낳은 유행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사이 패션계는 이해하기 어려운 패션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심지어 추한 것이 멋있다며 촌스러운 등산복과 어글리 슈즈가 불티나게 팔렸다. 발라클라바 역시 아름다움의 범주에서는 어긋나지만, 현재의 기준에는 더없이 완벽한 ‘패션템’이다.
체온과 안전, 정체성까지 지켜주는 발라클라바, 하지만 이 방한모가 현실에서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오랫동안 테러, 무정부, 위장 등을 상징해왔기 때문이다. 지난달 발라클라바를 출시했던 미국 스포츠 의류 용품 브랜드 나이키는 반군을 연상시키는 화보로 비난을 받은 끝에 결국 제품 판매를 중단했다.
색과 패턴을 활용해 발라클라바의 부정적인 느낌을 구찌의 발라클라바(왼쪽), 잭 블랙의 영화 ‘나쵸 리브레’의 복면과 닮았다./구찌, 다음영화 |
최근 보그와 더타임스 등 해외 언론은 직접 발라클라바를 쓰고 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는 실험을 했다. 어떤 이는 웃었고, 어떤 이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한 기자는 헤어스타일이나 화장을 신경 쓰지 않아 편했지만, 머리가 덥고 가려웠다고 호소했다. 우습다고? 혹시 아는가. 올겨울에도 영하 10도가 넘는 강추위가 불어닥친다면, 당신도 롱패딩과 함께 이 새로운 유행을 의심 없이 따를지도 모를 일이다.
김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