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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한 의원이 기록 지워달라 말했다… 그러자 속기사는 그 말까지 썼다

[아무튼, 주말] 21세기 史官 속기사의 세계

조선일보

일러스트= 안병현

우리나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건수는 16건. 아시아 국가 중 제일 많고, 전 세계에서도 넷째다. 조선시대 사관(史官)도 그랬다. 임금의 행동거지, 말 토씨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속기사(速記士)는 현대판 사관이라 부른다. 법원과 검찰청, 최근에는 대기업에서도 속기사를 채용한다. 그중 국회 속기사가 가장 전통이 깊다. 초대 제헌 국회와 함께 시작한 60년의 역사다. 국회에 오물이 뿌려졌을 때, 최루탄이 터졌을 때,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순간은 속기사를 통해 저장됐다.


지난달 26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첫 국회 입성도 기록돼 있다. 당시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조 전 장관이 인사할 때 '범법자' '이중인격자'라며 의자를 180도 돌려 뒤를 보고 앉았다.


"법무부 장관 조국입니다"


(일부 의원 야유)


(일부 의원 등 돌리고 앉음)


위는 회의록에 있는 당시 상황 묘사다. 17년 차 국회 속기사 김경재 주무관은 "과거에는 의석 행동도 구체적으로 적는 관행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에 분위기만 묘사하는 편"이라고 했다.

한번 쓰면 영원히 남는다

법무부 국정감사 날인 지난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4층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 장제원 자유한국당 의원과 김오수 차관의 승강이가 한창이었다. 여야 의원이 서로 주시하는 가운데, 회의장 한가운데 앉은 속기사는 참석자 머리 위에 있는 스크린만 쳐다보며 책상 밑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발언자의 입 모양까지 참고해 회의록을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눈동자는 화면과 양옆 의원들, 차관을 향해 시종일관 이동했다. 부동자세가 된 지 15분이 지났다. 교대자가 회의장 밖에서 들어와 맞은편에 앉아 같은 자세로 속기를 시작했다. 1명 기준 1교대 근무 시간은 최장 15분. 그 이상은 집중력이 흐트러져 회의를 따라갈 수 없다.


국회 회의록에 입력한 내용은 지울 수 없다. 지난 8일 여상규 자유한국당 의원이 국정감사 중 여당 의원에게 욕설을 했다. 여당 의원들이 항의하자 여 의원은 사과하며 속기록(錄)에서 지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삭제는 불가능하고, 요청했다는 사실도 기록된다. 국회법 117조에 "속기로 작성한 회의록 내용은 삭제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보안 등을 이유로 삭제할 때도 있지만, 공개용 회의록에 한정할 뿐 대외비 영구 보존 기록에는 남는다.


국회 속기사는 약 135명. 국회 사무처 의사국 의정기록과 소속 공무원이다. 국회의 공식 회의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기록이 남아야 의사 결정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은 6~7명 소규모 회의 때도 속기사를 찾는다. '날치기 법안 통과'를 계획하는 다수 당이 속기사를 몰래 숨겨두는 일도 잦았다.


속기사는 참석자의 행동, 말, 장내 분위기 등 모든 일을 남긴다. 일반 키보드보다 2~3배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세벌식 키보드를 쓴다. 발음이 안 좋거나, 영어 표현이 많거나, 심한 사투리를 사용하는 의원 등이 속기사의 골칫거리다. 김경재 주무관은 "모 의원은 웅얼대며 모든 발음을 뭉갠다. 속기사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고 했다. "자료를 들어 보이며" "'이의 있다'는 의원 3~4명 있음" 식으로 의원의 행동이나 장내 분위기도 지문(地文)처럼 남겨 둔다.


의정기록과는 1·2과, 16계로 나뉜다. 5~6명으로 이뤄진 한 계가 한 상임위원회를 맡는다. 현장에서 의원들의 말을 받아쓰는 속기사를 포함, 10명 이상이 녹음과 영상을 참고하며 약 6회 검토한다. 3년 전 국회에 들어온 이보람 주무관은 "사료(史料)로 사용되는 기록이기 때문에 한 문장도 허투루 하기 어렵다"고 했다.


속기사들은 "마냥 받아쓰는 게 아니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단순히 듣고 적는 것만으로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래서 박식해야 하고, 자주 언급하는 고유명사를 외워야 한다. 이를테면 법무부 국정감사에서 '특수부 축소'의 맥락이나 '정경심 교수'와 같은 고유명사를 모른다면 오기(誤記)가 많아진다. 신문, 주간지 등을 매일 읽고, 전문 서적으로 공부하기도 한다.

오물 투척, 할복에도 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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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사가 사용하는 세벌식 키보드./한국스마트속기협회

속기사는 국회 안 소동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다. 25년 차 정영희 주무관은 "회의장 안 어떤 일이 있어도 기록이 멈춰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이 있다"고 했다.


1966년 김두한 의원이 회의장에 있던 국무위원, 장관들에게 오물을 뿌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악취를 피해 탈출하고 씻으러 갔지만, 속기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교대 근무자가 오기까지 회의록이 끊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1999년에는 상임위원회에서 할복하는 사람 앞에서도 속기했다. 당시 축협 회장이던 신구범씨가 협동조합법을 반대한다며 손에 들고 있던 칼로 배를 그었다. 당시 모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각각 '똥이나 처먹어 이 ××들아!' '장관석 앞으로 나오면서 할복 자해'라는 내용으로 남아있다.


과거 '날치기 법안 통과' 때 속기사도 의원들을 따라 동분서주했다. 당시 국회의장 권한으로 본회의장이 아닌 다른 회의실에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주로 몸싸움으로 난장판이 된 본회의장에서 의사 결정을 못 할 때 '꼼수'로 사용됐다. 통과에 필요한 의원들이 다 모여도, 속기사가 없으면 안 된다. 이에 속기사는 다른 당 의원 모르게 옆 방 창문을 통해 들어오기도 하고, 몰래 '날치기' 장소를 언질 받기도 했다. 정영희 주무관은 "눈치 빠른 기자들은 속기사의 동선을 파악해 특종을 땄다"고 했다. 1960~70년대에는 언제 소집될지 몰라 의사당 근처에서 대기하는 속기사도 있었다.


국회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이경식 전 국회 의정기록과장은 "초선 의원들은 받아 적고 나면 앞뒤가 안 맞았지만, 김종필 등 대권 주자급 의원들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구사해 속기사들이 편했다"고 했다.

늘어난 회의에 디스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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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사 경쟁률 73대1 지난 14일 국정감사장에 앉아 있는 속기사(하얀 동그라미 점선). 국회 사무처는 보통 매년 7~8월 ‘9급 공개경쟁채용시험’을 통해 속기사 5명가량을 뽑는다. 올해 속기직 경쟁률은 73.5대1. 봉급은 일반 9급 공무원과 같이 170만원대다. 속기 직렬 출신 가장 높은 직급은 의정기록심의관(3급)이지만, 5급부터는 공석이 생길 때만 올라갈 수 있어 6급에서 정년을 맞는 경우가 많다. /이영빈 기자

지금은 속기사석에 앉아 봉변을 당하는 일이 줄었다. 대신 업무 부담이 늘었다. 지난해 전체 의안 건수는 6805건으로 2016년(5198건)에 비해 1600건가량 늘었고, 매년 증가 추세다. 의안 건수가 많으면 회의가 많아진다는 의미고, 속기사의 일은 늘어난다. 15분 속기했다면, 회의록까지는 7배인 1시간 40분 정도가 걸린다. 녹음을 들으며 현장에서 받아 적은 내용을 재검토하기 때문이다.


국정감사는 18일 끝났다. 그러나 공식 회의록이 나오기까지는 약 두 달이 걸린다. 본회의, 상임위가 기다리는 탓이다. 김경재 주무관은 "9월이 오면 '이제 집 못 들어간다'는 농담을 나눈다"고 했다. 정영희 주무관은 "15분간 회의장 모든 것을 기록해야 한다는 마음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허리 디스크, 거북목 증후군 등 사무직의 직업병은 다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속기사는 대개 인공지능(AI)으로 대체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속기사들은 "사람 말을 해석해야만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은 아직 멀었다"는 의견이다. 최광석 사단법인 한국스마트속기협회 부회장은 "지금 AI는 음성을 인식하고 옮기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정상덕 부천대 스마트속기과 겸임교수는 "기록물이 많을수록 더 투명한 사회"라며 "속기의 존재 이유이자 필요 이유"라고 했다.


[이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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