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영화 속 동양인은 항상 조연? 그 공식, 제가 깼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제니 한
10대 동양인 소녀의 성장기 그린 소설 '내가 사랑했던 모든…'으로 NYT 40주 연속 베스트셀러 석권
동명 영화, 넷플릭스 최고 시청수
"영화 주인공도 아시아계로 고집… 아이들에게 가능성 보여줘야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로,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원작자인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제니 한(오른쪽). 왼쪽은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라나 콘도르. /넷플릭스 |
"제가 썼던 소설처럼, 영화 주인공도 무조건 아시아계가 맡아야 한다는 뜻을 끝까지 관철했죠. 미국에서 자라면서 아시아계 여성들이 주류 문화의 주인공을 맡은 걸 본 적이 없어요.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아시아계도 주인공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뉴욕타임스 40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All the Boys I've Loved Before) 등 열여섯 살 소녀 라라 진 송의 유쾌한 연애담과 성장기를 그린 일명 '내사모남 3부작'으로 미국 젊은층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떠오른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제니 한(Han·40). 지난달 12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P.S. 여전히 널 사랑해(내사모남 2편)' 개봉과 함께 이메일로 만난 제니 한은 "'내사모남'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중 아시아계가 표지로 나온 첫 번째 책"이라며 "독자들이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고, 자신을 진짜 이해해주는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에 사랑받은 것 같다"고 밝혔다.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이민 2세로 뉴욕 뉴스쿨 문예창작 석사 재학 시절 발표한 어린이책 '슈그(Shug)'가 호평받으며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여덟 살 때 학교 선생님이 연간 앨범(yearbook)에 "글재주가 뛰어나다. 언젠간 서점에 네 이름이 쫙 깔릴 것"이라 써준 격려를 마음에 새겼던 그녀다. '내사모남'은 1030세대의 폭발적 지지를 받으며 전 세계 40개 이상 언어로 출판됐고, 2018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통해 동명의 영화가 공개되자 최고 시청 수를 기록했다. 미국 전역에 퍼진 '라라 진 신드롬'에 라라 진이 마시는 한국 요구르트와 마스크 팩은 품절 소동을 빚고, 그녀가 즐기는 보쌈은 미국 패션지가 꼽은 '핫'한 음식이 됐다. 주인공을 맡은 베트남계 라나 콘도르(23)는 인스타그램 930만 팔로어를 자랑하는 할리우드 스타로 발돋움했다.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2' 속 한복 입은 주인공이 설을 쇠는 장면. /넷플릭스 |
소설이 성공하자 제니 한의 작품을 영화화하겠다는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주인공의 인종은 중요하지 않다'며 백인 주인공(whitewash)을 피력했지만 제니 한은 주인공은 한국인, 적어도 동양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편이 설렘 가득한 첫사랑 이야기라면, 2편은 아빠의 새로운 연애를 응원하며 자매애를 다지고, 남자 친구와 관계에서도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성장하는 이야기. "한국인이어서 자랑스럽다"는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 애착과 용서의 정서를 한국 특유의 '정(情)'을 빌려 설명한다. "정이란 두 사람 사이에 끊어질 수 없는 연결을 말해요.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어도 그를 향한 애정이 마음속에 늘 있고, 어딘가 연결돼 있는! 할머니에게 배웠죠."
설날 한복을 입고 각종 전과 나물을 먹거나, 블랙핑크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등 한국 소재가 적지 않다. 제니 한의 부모는 영화 속 라라 진의 조부모로 출연한다. "언어는 잊어도 고향의 맛은 절대 잊을 수 없어요. 할머니가 끓여주신 꼬리곰탕과 생일마다 부쳐주신 부침개를 먹으면서, 엄마의 육개장과 매운탕에 감탄하며 내 핏줄에 흐르는 한국을 깨닫고 되새겨왔지요."
그녀는 '내사모남 3편' 촬영을 위해 지난해 한국을 찾기도 했다. 당시 국내 제작 스태프가 봉준호 감독의 아들 봉효민 감독인 것을 뒤늦게 알았다는 에피소드를 아카데미 시상식 직후 공개해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한국이란 나라는 작지만 전 세계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은 거대해요. 제가 한국인인 걸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한국인들도 저를 자랑스러워할 날이 오길! 누구 하나라도 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면, 죽기 전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최보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