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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 알았다, 남자들이 사우나서 자는 이유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펴낸 김정운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이 생겼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는 것, TV 채널을 1번부터 100번까지 돌려보며 등장인물 욕을 하는 것. 싫다면서도 계속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꼭 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평생 사 모은 책을 근사한 책장에 꽂아 놓는 것. 그림도 원 없이 그려보고 싶었다.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인 김정운(57)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은 "그게 바로 공간 충동이었더라"고 했다.


"미친놈 소리 들으면서 있는 돈 다 털어서 여수까지 갔잖아요. 남쪽 섬에 있는 창고를 하나 샀고 그걸 개조해 그림 그리고 책 읽는 작업실을 지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다 그놈의 충동 때문이더라고. 근데 작업실 지으면서 깨달았어요.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대한민국 모든 문제가 이 공간 충동에서 시작된다는 걸!"


최근 펴낸 책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21세기북스)엔 그 깨달음이 담겼다. 왜 여수 남쪽 섬까지 갔는지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 대한민국 밑바닥에 흐르는 고통과 분노의 뿌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15일 낮 서울에 온 그를 만났다.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봤다. 그의 그림과 나의 그림이 별반 다르지 않아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한국 남자들은 왜 사우나에서 자나

김정운이 여수 섬에 지은 작업실 이름은 '미역창고(美力創考)'다.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는 뜻이다. 100평 낡은 창고를 시세 두 배 가격을 주고 사는 바보짓 끝에 완성했다. 한쪽 벽은 죄다 책장으로 만들었다. "배 아프죠? 이게 나의 슈필라움인 걸 오십 넘어 알았다니 안타깝지. 그치만 괜찮아, 오래 살 거니까, 하하!"

조선일보

15일 만난 김정운 소장이 느닷없이 “45×8이 뭐냐”고 물었다. 계산하려는 찰나 “지금 눈을 위로 치켜뜨고 있다”면서, “사람은 복잡한 생각을 할 때 그렇게 위를 보거나 멀리 본다. 사고할 땐 그래서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먼 곳을 봐야 한다. 내가 여수까지 간 이유도 그것”이라며 웃었다. 아래 사진은 김 소장이 2년쯤 지낸 여수 바닷가 작업실. 횟집이었던 곳을 고쳐 썼다. /조인원기자·21세기북스

슈필라움(Spielraum)은 그가 작업실을 짓는 좌충우돌 끝에 찾아낸 심리학 용어. 김 소장은 '놀다(Spiel)'와 '집(Raum)'의 합성어인 이 말에서 '인간이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란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다. "이걸 갖지 못해서 다들 그렇게 화나고 아프고 괴로운 거예요. 우리나라 남자들이 툭하면 1·2·3차까지 술집을 옮겨다니며 밤거리 헤매고 사우나에서 자는 것도, 20~30대 젊은 친구들이 집 놔두고 블루보틀 같은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줄 서 가며 그곳에 앉아 보려는 것도 슈필라움이란 공간에 목이 말라서인 거죠."


김정운은 독일 베를린 자유대 심리학과를 졸업(박사)하고 명지대 교수를 지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도중 사표를 쓰고 교토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공부했다. '휴테크' '워라밸' 같은 개념을 가장 먼저 전파한 이도 김 소장이다. 그는 "압축 성장을 거치는 동안 여성은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는 법을 찾아냈지만, 한국 남성들은 돈 벌고 권력 잡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면서 오히려 슈필라움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꼴을 맞게 됐다"고 했다. "요즘 무슨 숲에 들어가 사는 자연인을 보여주는 TV 프로에 중년 남자들이 열광하는 것, 소셜미디어에서 아웅다웅 다투는 것도 다 슈필라움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행복해지려고 무엇을 했나

인간 수명이 100년으로 늘어난다고들 한다. 김정운은 "대책 없이 늙어만 가면 어쩔 거냐"고 했다. "친구들이 다들 퇴직했는데, 명함이 없다고 꼴이 말이 아녜요. 형편없어." 그는 "행복은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처절한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밥상 하나 놓고 시집을 읽어도 좋고, TV 치우고 거실에서 음악을 들어도 좋겠죠. 그 정도 노력도 안 하면서 다들 불행한 이유를 사회구조 같은 남 탓으로 돌리지만, 지금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건 혹시 당신 책임 아닌가요?"


김 소장은 요즘 여수 작업실에 머물 때면 아침마다 양동이와 낚싯대 하나 들고 바닷가로 향한다고 했다. 온몸이 간질간질하고 웃음이 난다고 했다. "이 순간을 찾기까지 57년이 걸린 거야. 오래 걸렸지만 다행이지. 다들 이제부터 함께 찾읍시다. 늦지 않았다니까?"


[송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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