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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by 조선일보

여기가 방콕? 5미터 담벼락에 ‘낙서’ 했더니… 전 세계 여행자가 몰려왔다

[아무튼, 주말]

태국 관광 공식 깨뜨린

‘방콕 힙지로’를 가다


태국 방콕 짜른끄릉 32번 골목으로 들어서자 5m쯤 되는 높은 담이 오른쪽으로 길게 이어졌다. 담을 따라 걸으니 화려하고 강렬한 그라피티 작품들이 담벼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라피티(graffiti)란 공공장소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는 비주류 예술로, “낙서다” “예술이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점차 새로운 거리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쓰는 세계 각국 여행자들이 벽화를 휴대전화로 찍거나 셀카를 촬영하느라 정신 없었다. 세련된 옷차림의 태국 젊은이도 많았다. 이곳으로 안내한 ‘방콕 리버 파트너스’의 데이비드 로빈슨씨는 “그라피티는 방콕의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Creative District)’로 전 세계 여행자들을 불러모은 일등 공신”이라고 했다.


“현지인이건 외국 관광객이건, 방콕에서는 그저 에어컨 빵빵하게 튼 대형 쇼핑몰에 틀어박히거나 수영장에 드러누웠죠. 그런데 2016년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가 생긴 이후로 벽화를 둘러보거나 세련된 카페, 힙한 갤러리, 독특한 숍 등을 찾아 걷는 관광객들이 생겨났어요. 덥고 습한 방콕에서 길을 걷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죠.”


◇쇠락했던 원도심 활력 되찾다


서울에 ‘힙지로’가 있다면, 방콕에는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가 있다. 이 지역이 등장하면서 코끼리 타고 악어 농장을 구경하며 야시장에서 값싼 음식을 먹거나 스파에서 마사지 받는 식의 방콕 관광 공식이 깨지고 있다.


힙지로가 새롭게 활기를 되찾은 을지로의 별칭이듯,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도 원지명은 아니다. 짜오프라야 강을 따라 자리 잡은 방락(Bang Rak)·끌롱산(Klongsan)이라는 방콕의 오래된 구역과 이 두 구역의 북쪽에 있는 차이나타운 일부를 합쳐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라고 부른다.


방락과 끌롱산은 방콕에서 가장 일찍 근대화가 이뤄진 지역이었다. 로빈슨씨는 “이 지역을 관통하는 짜른끄릉 거리는 방콕 최초의 포장도로”라고 했다. “1861년 라마4세 재위 기간이었습니다. 태국에 진출한 서구 열강들이 왕을 알현하러 가기 위해 닦았죠. 포장도로와 함께 방콕 최초의 버스 노선, 최초의 항만 시설, 최초의 백화점이 들어섰어요.”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덴마크 등 유럽 국가들은 이 지역에 대사관·교회·무역회사를 세우고 서구식 주택 지역을 조성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방콕에서 가장 번화하고 발전된 지역이었지만, 교통·운송의 주도권은 곧 수상에서 육지로 넘어갔다. 방콕 도시 개발도 강변에서 내륙으로 이동했다. 을지로가 긴 침체를 겪었듯, 방락·끌롱산·차이나타운도 오랫동안 활력을 잃고 쇠락하는 듯했다.


이 지역이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로 부활한 건 2015년부터. 강을 따라 늘어선 호텔 8곳에서 지역 활성화 방안을 로빈슨씨에게 물었다. 호주 출신인 로빈슨씨는 호주와 영국 등지에서 언론·광고·마케팅 분야에서 오래 일했고, 2002년 방콕으로 이주해 아프가니스탄·인도·파키스탄·중국 슬럼가 아동이나 쓰나미 피해 지역 주민을 돕는 NGO 단체에서 활동해왔다.


로빈슨씨는 “이 지역이 영국 런던 사우스뱅크나 호주 시드니 더 록스처럼 되려면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데스티네이션(목적지)’이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브랜드’를 창조해야 하고, 호텔 같은 사업체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까지 호응해야 하며, 이벤트를 열어야 한다고 했어요. 다행히도 잠재력은 남아 있었죠. 낡긴 했지만 옛 건물들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원주민들도 대를 이어 살고 있었으니까요.”


호텔·식당·상점·건물주 등 지역 관계자들은 물론 태국 정부, 대학, 예술가, 장인, 도시 재생 전문가 등 다양한 분야 40여 명이 힘을 합쳐 ‘방콕 리버 파트너스’라는 협의체를 설립했다. 2015년 ‘방락 축제’를 열자 많은 사람이 찾아왔고,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로 불리기 시작했다. 2016년엔 ‘북룩 스트리트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세계 13국 아티스트를 초청해 지역 곳곳 건물 외벽과 담벼락에 그라피티를 그리게 했다. 포르투갈 대사관은 흔쾌히 대사관 담벼락을 캔버스로 내줬다. ‘태국 예술가들의 벽화’와 포르투갈 유명 아티스트 빌스(Vhils)의 작품이 포르투갈 대사관 남쪽과 동쪽 벽을 각각 채우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 젊은이들도 오래된 건물이 고스란히 남은 이 지역에 큰 매력을 느꼈어요. 예술가, 장인, 요리사들도 임차료가 저렴하니 뭔가 차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새로운 식당, 가게가 속속 생겨나며 지역이 눈에 띄게 달라졌어요.”


◇벽화와 건축물 찾는 재미가 쏠쏠


로빈슨씨 안내를 받아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 걷기 여행을 했다. 출발점은 방콕 지상철 사판탁신(Saphan Taksin)역이다. 1번 출구를 나오면 네덜란드 유명 아티스트 단 보틀레크의 그라피티가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파스텔 색상에 길이가 80m에 달하는 초대형 작품이다.


포르투갈 대사관 벽에 그려진 태국 예술가들의 벽화빌스 벽화도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작품들이다. 빌스 벽화는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리는 일반적인 그라피티와 달리, 벽을 긁고 파내는 기법으로 완성한 독특한 작품이다. 로빈슨씨는 “심지어 차가 사고로 벽에 부딪혀 남긴 상처까지 그라피티의 일부로 융합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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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보틀레크 벽화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짜오프라야 강 반대편으로 걷다 첫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면 치아오 엥 비아오 사원이다. “방콕에 오다가 베트남에서 해적으로 오인받아 살해된 중국 하이난성(海南省) 출신 화교 108명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비롯해 많은 신을 모시고 있어서 많은 이가 복을 빌러 요즘도 많이 찾지요.”


사원을 지나 쭉 가다가 T자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반 오우 모스크(Ban Oou Mosque)다. “규모가 작지만 라마 5세 시절 지어진 100년도 넘은 건물입니다. 태국은 불교 국가로 흔히 알지만, 전체 인구의 10%가 무슬림입니다.” 이 밖에도 1837년 방콕에 정착한 인도네시아-아랍계 무슬림 상인 가문에서 세운 하룬 모스크, 태국식 무슬림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홈 퀴진 이슬라믹 식당이 있다.


모스크 흰 벽을 따라 걷다가 왼쪽에 있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방락 시장이다. “방콕 모든 구역에는 2개의 심장이 있어요. 왓(불교사원)과 시장이죠. 아침 일찍 오면 스님들이 가게와 집을 돌며 탁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시장을 나와 42번 골목과 짜른끄릉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전통 태국 디저트로 유명한 분삽(Boonsap Thai Dessert Shop)이 있고, 다시 북쪽으로 걷다가 만나는 골목엔 라마왕자 극장이 숨듯 자리하고 있다. “사방이 가게들로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지만, 방콕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중 하나입니다. 이제는 숙소로 개조해 운영되며 다행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요.”


극장이 있는 골목을 벗어나 짜른끄릉 거리를 따라 다시 북쪽으로 걸었다. 반짝이는 금색과 청색으로 된 아치가 있는 골목을 들어서면 왓수안플루(Wat Suan Plu) 불교사원이 나온다. “태국 사원은 대개 금으로 장식하는데, 여기는 파란색으로 칠했다는 점이 특별하죠.”


다시 짜른끄릉 거리로 나와 북쪽으로 걷는다. 짜른끄릉과 실롬 거리가 만나는 T자 교차로를 건너 왼쪽으로 호비스트 카페(Hobbyist Café)가 나왔다.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감성을 불어넣은, 이른바 ‘뉴트로’의 전형이죠. 힙하다는 젊은이들은 아마 여기서 다 만날 거예요.”


계속 북쪽으로 걷다 왼쪽 40번 골목으로 접어들자 성모승천 성당(Assumption Cathedral)이 모습을 드러냈다. “19세기 지어진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태국에서 가장 중요한 가톨릭 교회 중 하나입니다. 겉은 보수를 해서 새것 같지만, 안에 들어가면 오래된 대성당의 위엄이 그대로 남아있죠.”


성당과 함께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를 대표하는 서양식 건물로는 덴마크 동아시아 회사(East Asiatic Company), 프랑스 대사관, 옛 세관, 중앙 우체국이 있다. “덴마크 동아시아 회사는 1800년대 후반 덴마크 코펜하겐과 방콕을 오가는 여객선과 화물선 운항을 위해 세워진 회사의 본부 건물입니다. 낡았지만 외관이 여전히 수려하죠. 프랑스는 태국과 가장 오래전부터 교류한 유럽 국가로 꼽힙니다. 1684년부터니까 400년이 훌쩍 넘었죠. 옛 세관은 가장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로 꼽힙니다. 방콕에 여러 건물을 남긴 이탈리아 건축가 요아힘 그라시가 설계했지요. 중앙 우체국은 20세기 초 이탈리아 브루탈리즘 양식으로, 밀라노 중앙역과 비슷한 요소가 많습니다.”


공예품과 골동품 등을 판매하는 OP플레이스는 1800년대 후반 덴마크 사업가들이 세운 방콕 최초의 백화점 ‘팔크 & 비데크’의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현대적으로 재정비했다. “당시 설치된 엘리베이터가 여전히 작동한다니 놀랍죠?” 바로 옆 OP가든은 태국 환경운동가의 저택과 정원이 식물로 가득한 고급 초록빛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ATTA갤러리, 세린디아 갤러리 등 개성 넘치는 매장이 입점해 있다. 은세공품 전문 타이 홈 인더스트리스(Thai Home Industries), 오래된 창고에서 갤러리·스파·카페·숍·공유오피스 등이 들어선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웨어하우스30(Warehouse 30)도 둘러볼 만하다.


◇차이나타운 맛집이 종착지


로빈슨씨의 워킹투어는 종종 크리에이티브 바로 위에 붙어있는 딸랏 너이(Talat Noi)와 야왈랏(Yaowarat) 구역에 있는 차이나타운에서 식사로 마무리된다. “오래되고 맛있는 식당이 많아서요.”


소우 헹 타이(Sol Heng Tai Mansion)는 태국 화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푸젠성(福建省) 양식을 볼 수 있는 200년 고택. 차이나타운의 중심에 있는 삼펭 시장(Sampeng Market)에서는 옛 화교 상점들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 아티스트 아이치(Aitch), 벨기에 아티스트 로아(Roa), 스페인 아티스트 아리스(Aryz)의 그라피티 작품도 볼 수 있다. 후알람퐁 기차역(Hua Lamphong Station)도 손꼽히는 근대식 건물이다.


뺏 뚠 짜오 따(Ped Tun Chao Ta)는 허름하지만 가장 유명한 식당 중 하나다. 오리와 거위 요리로 명성이 자자하다. 꾸어이 띠여우 꾸아 까이(Kway Teow Kua Gai)는 닭고기 볶음국수로 이름났다. “이 집에선 음식과 요리사 사진은 절대 금지입니다! 주인이 아주 싫어해요.” 소이 야왈랏 11 음식 거리(Soi Yaowarat 11 Food Stalls)에서는 태국·중국 음식을 원하는 대로 찾을 수 있다. 스위트타임(Sweettime)은 작지만 태국과 중국식 디저트가 전문인 가게. T&K시푸드(T&K Seafood)는 이름에서 짐작하듯 해산물 요리가 훌륭하다. 소이 나나(Soi Nana)는 독특한 가게, 식당, 바 등이 속속 들어서며 차이나타운을 되살리고 있는 골목이다.


이날 워킹투어는 하모니크(Harmonique)에서 마쳤다. 식당이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입구로 들어가 거대한 나무 밑을 지나면 나타나는 희한한 태국 음식점으로, 화교 삼자매가 오랫동안 운영하다가 최근 후손들에게 맡기고 은퇴했다.


국물이 칼칼한 ‘똠양꿍’과 채 썬 파파야를 매콤달콤하게 무친 ‘솜땀’, 국수를 야들야들하게 볶아낸 ‘팟타이’가 환상적이었다. 태국식 수박 주스 ‘땡모반’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섭씨 30도, 습도 85%를 웃도는 방콕 거리를 2시간 넘게 걸으며 누적된 갈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


예술로 무장한 특급호텔에서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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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시즌스 호텔 방콕은 호텔이 위치한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 지역의 축소판이다. 포시즌스 방콕은 호텔업계에서 드물게 ‘아트 스페이스(ART Space)’라는 전용 전시 공간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방콕현대미술관(MOCA Bangkok)과 협업해 태국 현지 작가 기획전을 연중 내내 3~4개월 단위로 교체해가며 연다.


지난 20일부터는 ‘정신과 육체: 추상적 대화’전이 열리고 있다. 태국 여성 작가 6명의 회화·조각·설치·미디어아트 작품들을 통해 정신적 자아와 육체적 자아의 관계와 상호작용을 관찰한다. 루보쉬 바타 총지배인은 “크리에이티브 디스트릭트에서 예술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며 “우리 투숙객들이 진짜 미술관에서와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MOCA에 전시 기획을 부탁했다”고 했다.


부티크 호텔 건축으로 이름난 장 미셸 가티가 설계한 호텔 건물은 모던하지만 태국적 요소가 가미돼 있다. 이탈리아 레스토랑 ‘리바 델 피우메’, 프랑스 비스트로 ‘브라세리 팔미에’, 방콕 중식당 중 유일하게 미쉐린가이드로부터 별(1개)를 획득한 ‘유팅웬’, 남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컨셉트의 바 ‘BKK 소셜 클럽’ 등 다문화·다국적 음식을 한 곳에서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지역적 특색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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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김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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