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혔다가도 끊어지는 실… 사람과 사람 사이 같지 않은가요
일본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
부산시립미술관 국내 첫 회고전
280㎞ 길이 붉은 실 엮어 만든 '불확실한 여정' 등 110점 출품
"난소암 재발로 시한부 판정… 전시하려는 의지가 날 살게해"
실[絲]로 거대하다. 200㎞ 넘는 실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거미줄처럼 엉킨 채 뻗어 있다. 혈관으로 가득 찬 몸의 내벽에 들어선 것 같다. "실은 잇는다. 팽팽해지고 끊어지고 때로 꼬인다. 인간 관계와 유사하지 않은가?" 일본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47)가 말했다.
인생 항해의 불안을 배 조각과 붉은 실로 표현한 ‘불확실한 여정’(2016~2019). /부산시립미술관 |
일명 '거미 여인'으로 불리는 그의 국내 첫 회고전 '영혼의 떨림'이 부산시립미술관에서 내년 4월까지 열린다. 1993년 첫 개인전 후 201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 작가를 맡으며 세계적 작가로 부상하기까지 그의 예술 인생 사반세기를 돌아보는 자리로, 대형 설치작을 포함해 회화·영상·사진 등 110여 점이 나왔다.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일본 모리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옮겨온 것인데, 당시 관람객 66만명을 기록했다.
불에 태운 100년 넘은 피아노와 나무 의자 주변을 검은 실로 둘러싼 ‘침묵 속에서’를 배경으로 선 시오타 치하루. /부산시립미술관 |
주로 빨간 실과 검은 실을 쓴다. 빨강은 사람의 인연(소우주), 검정은 칠흑의 우주(대우주)를 상징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잇는다. 손과 손('연결된 실'), 물건과 물건('작은 기억들을 연결하다')…. 전시장 입구에 작은 배 여섯 척과 함께 사방을 실로 엮은 최신작 '불확실한 여정'은 280㎞ 길이 붉은 실을 전담 팀 10명이 열흘간 손수 엮어 설치한 것이다. "실이 자꾸 겹쳐 눈이 실의 가닥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짙어질 때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했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불탄 피아노와 의자, 그 주위를 검은 실로 에워싼 설치작 '침묵 속에서'는 이런 그의 예술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홉 살 때 옆집에 불이 났다. 불탄 피아노가 마당에 끌려 나왔다. 소리가 날 리 없는데 나는 또렷이 건반이 울리는 환청을 경험했다. 없는데 있는 것 같은 느낌, 그 '부재의 존재'를 실로 드러내려 했다."
실은 삶과 죽음마저 잇는다. "이 전시를 제안받은 2017년 난소암 재발 판정을 받았다." 2년 시한부 통보였다. 항암 치료가 이어졌다. "내 몸이 적출된 것처럼 느껴졌다. 죽음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 감정은 붉게 물들인 소가죽을 정육점처럼 천장에 걸고, 그 밑에 토막 난 손발을 동(銅)으로 제작해 부려놓은 최신작 '내 몸 밖'으로 구현됐다. "하지만 전시의 의지가 날 일으켰다."
독일 벼룩시장 등에서 사모은 장난감 수백개를 붉은 실로 이은 ‘작은 기억들을 연결하다’(2019). /정상혁 기자 |
대학 1학년 때까지 회화를 다뤘다. "표현에 한계를 느꼈고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캔버스 대신 공간에 선을 그었다." 1996년 독일로 떠나 세계적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사사(師事)했다.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다. 마리나 선생이 학생들을 프랑스의 어느 성(城)에 데리고 가 사흘간 단식을 시켰다. 다음 날 새벽에 깨우더니 '지금 떠오르는 단어를 적으라'고 하더라." 그가 쓴 단어는 '일본'이었다. "그 단어로 작품을 만들라는 명이 떨어졌다. 나는 내 고향에서 흙과 어머니를 떠올렸고, 맨몸으로 야산을 기어오르고 굴러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대지로 돌아가려는 이 몸짓은 영상 'Try and Go Home'으로 남았다.
그의 고향 때문에 이번 전시는 최근 한·일 외교 갈등 속에서 취소 직전까지 갔다. "남편이 부산 사람이다. 딸은 독일, 나는 일본인이다. 한 가족이지만 여권이 세 종류다. 벽은 명백히 존재한다. 심장에도 좌심실·우심실을 나누는 벽이 존재하지 않나. 하지만 혈액은 온몸을 돈다. 정치 상황을 뛰어넘어 마음으로 통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부산=정상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