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양면 프라이팬 돌풍 이후 돌연 농부로… “빨리 살다 빨리 죽을 뻔했죠”

[아무튼, 주말-김성윤 기자의 공복]

[아무튼, 주말-김성윤 기자의 공복]

주방용품 신화 ‘해피콜’ 일군 이현삼

오형제가 강원 산골로 들어간 사연


강원도 홍천에 있는 공작산(孔雀山)은 산세가 공작새를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공작의 날개처럼 펼쳐진 절벽이 포근히 감싼 골짜기에 이현소(62)·이현학(60)·이현삼(57)·이태현(55)·이덕삼(51) 다섯 형제가 살고 있다. 오형제는 다 함께 배·고추·무·상추·오이·고구마 농사를 짓고, 벌을 쳐서 꿀을 얻는다. 약재와 버섯을 재배하고, 사과·배·개복숭아 등 과일을 수확하며, 죽염을 굽는다. 일과를 마치면 배드민턴을 치거나 노천탕에 나란히 들어앉아 하루의 피로를 푼다.


이 의좋은 오형제의 고향은 경남 거창이다. 이들이 거창에서 한참 떨어진 홍천 산골에 터를 잡게 된 건 셋째 이현삼씨 때문이다. 그는 입지전적인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그가 설립한 주방용품 회사 ‘해피콜’은 2001년 붕어빵 기계에서 영감을 얻어 개발한 ‘양면 프라이팬’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1시간 만에 1만2800개가 나가 홈쇼핑 방송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2008년 ‘다이아몬드 프라이팬’, 2015년 ‘초고속 블렌더’ 등 대박 상품을 연이어 내놓으며 연매출 1800억원에 순이익 200억원이 넘는 중견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이현삼씨는 승승장구하던 회사를 2016년 돌연 매각했다. 그러고는 형제들과 공작산으로 들어와 땅 5만여 평을 일궜다. 이씨는 “다시 결정할 기회가 백번 주어진대도 백번 회사를 팔고 지금 이곳 삶을 선택할 것”이라고 했다. 잘나가던 ‘회장님’은 왜 ‘농부’로 변신한 걸까. 왜 형제들과 산골짜기로 들어왔을까. 이현삼씨와 그의 형제들을 공작산에서 만났다.


◇장돌뱅이의 마케팅 무기 ‘다다구리’와 ‘단가’


오형제가 태어난 거창 산골 마을은 1970년대 중반에야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발전이 더뎠다. 이현삼씨는 “우리 집은 그런 동네에서도 유독 가난한 편이었고, 배불리 먹는 친구나 이웃이 늘 부러웠다”며 “내 목표는 일찌감치 ‘부자 되기’로 정해졌다”고 했다. 그는 스물네 살이던 1989년 10월 무작정 상경했다. 짐은 군대에서 입던 전투복과 전투화, 속옷 몇 벌이 전부였다.


-서울에 와서 처음 한 일은?


“막일이다. 꼭두새벽 인력 사무소 앞에 줄 섰다. 두 달 넘게 막노동을 했다.”


-토스트 팬을 팔게 된 계기가 있는지.


“우연히 남대문시장을 지나는데 노점이 눈에 띄었다. 빵 구울 때 쓰는 작은 토스트 팬을 팔고 있었다. 지켜보는 동안에만 1만원짜리 팬이 100개 이상 팔려나갔다. 팬 하나 팔아 1000원 남긴다 치면 하루 10만원, 한 달이면 300만원이나 됐다. 저걸 해야겠다 싶었다. 당시 내 한 달 월급이 30만원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남대문시장 토스트 팬 가게로 무작정 쳐들어갔다. ‘장사를 배우고 싶으니 가르쳐달라’고 애걸했다.”


-사장이 받아주던가.


“당연히 거절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포기하지 않고 온종일 가게에서 버텼다. 사장님이 마침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신설동으로 가. 거기 사무실이 도매상들 드나드는 데야. 거기 가서 ‘짱구 사장’을 찾아. 그 사람이 제일 큰 도매상이야’라고 알려줬다.”


-짱구 사장은 받아주었나.


“보자마자 퇴짜를 놓더라.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촌뜨기 출신에 덥수룩한 장발을 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웃음). ‘시켜보지도 않고 왜 안 된다 캅니까’ ‘시켜만 주이소. 몬 할 거 없심니더’ 하고 대들었다. 무모한 의지가 가상했는지 ‘지금은 겨울이니 봄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래서 봄에 다시 갔나.


“가난한 청년에게 없는 게 여러 가지 있는데, 특히 기다릴 여유가 절대적으로 없다. 돌아가지 않고 버텼다. 짱구 사장님이 우동 한 그릇을 시켜주더라. 날이 저물자 장사를 마친 이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그중 ‘민씨 아저씨’란 사람이 내게 관심을 보이더니 ‘장사 나한테 배워볼래’ 물었다. 가릴 처지가 아닌지라 ‘감사하다’고 하고 다음 날부터 따라다녔다.”


-뭘 배웠나.


“촌놈 데려다 허드렛일이나 시킬 심산이었는지 일을 시키면서도 월급은 주지 않았다. ‘장사하는 법을 알려주고 점심도 먹여주는데 월급까지 줘야 하냐’ 했다. 나도 전혀 불만 없었다. 수업료 한 푼 내지 않고 생생한 현장 수업을 듣는다고 생각했다. 그를 따라만 다니다 어느 날 장사를 해보게 해달라고 졸랐다. 드디어 첫 장사를 허락받았지만 막상 판을 깔자 얼어버렸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의욕만 앞섰지 준비가 하나도 안 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최고 매출을 찍는 장돌뱅이가 됐나.


“장사 잘하기로 소문난 형님을 찾아가 20분 분량 코멘트를 녹음했다. 듣고 또 들었다. 밤새워 한 줄씩 듣고, 한 줄씩 따라 적었다. 코멘트의 리듬감과 속도, 쉼표까지 통째로 외울 생각이었다. 코멘트를 외운 덕분인지 다음 날은 한결 수월했다. 차츰 자신감도 생기고 흥도 따라붙었다.”


-어떻게 독립했나.


“민씨 아저씨를 따라 강원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동안 준비했다. 민씨 아저씨에게 ‘모든 걸 혼자 알아서 할 테니 물건을 팔면 1개당 1000원씩 달라고 해서 50만원을 모았다. 그 돈으로 토스트 팬을 샀다. 부산 내려갈 생각으로 열차를 탔다가 경북 안동에서 내렸다.”


-왜 안동에서 내렸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스스로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니 큰 약국 바로 앞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에게 ‘내일 가게 열지 않으면 문 앞에서 장사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내 눈빛이 간절해 보였는지 주인은 ‘일요일에는 약국 문 닫으니 장사해도 되는데, 일요일마다 장사하는 사람이 있다’며 난감해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부탁하자 허락하더라. ‘누가 물으면 고향 동생이라고 하라’면서. 다음 날 동틀 무렵 약국에 도착하니 주인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혹시 먼저 장사하던 사람과 시비 붙을까 걱정돼 나왔다’고 했다. 고마운 배려 덕에 시비는 없었고, 토스트 팬 53개도 다 팔았다. 순매출 53만원에 순이익 30만원으로, 당시 내 월급을 하루에 벌었다.”


-약국 주인은 아무 인연도 없는데 왜 도와줬을까.


“나중에 아내와 다시 안동에 찾아갔지만 약국은 사라졌고 결국 주인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짐작해본다면, 무작정 약국에 들어갔을 때 내 마음속 간절함을 표정과 눈빛에서 본 게 아닐까 싶다. 장사는 가장 간절한 사람이 가장 잘한다.”


장사가 궤도에 올랐다. 팔도 행사를 누비고 다녔다. 그는 “갈고 닦은 ‘다다구리’ 솜씨를 발휘해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했다.


-다다구리가 뭔가.


“발 구르고 손뼉 치면서 ‘골라 골라 500원 골라’ 외치는 걸 다다구리라고 한다. 공짜나 다름없다고 알릴 때 사용하는 길바닥 마케팅 기법이다.”


-장돌뱅이의 또 다른 무기라는 ‘단가’는 뭔가.


“다다구리가 가격과 쓸모를 핵심 단어로 전달한다면, 제품에 신비주의적 서사를 덧입히는 걸 ‘단가’ ‘단가 친다’고 한다. 단가를 가장 세련된 방법으로 발전시킨 버전이 스티브 잡스의 애플 신제품 발표다. 이 상품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왜 필요한지, 생활이 어떻게 달라질지 기대감을 한껏 높이는 잡스야말로 단가의 천재다.”


◇붕어빵에서 탄생한 양면 프라이팬 신화


장사 시작하고 2년 만에 이현삼씨는 짱구 아저씨에게 당시 최고 인기 상품이던 ‘도깨비 방망이’의 부산·경남 총판 자리를 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차츰 ‘단지 돈 되는 물건보다 잘 만든 물건을 팔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해피콜을 설립하고 최초 히트 상품인 양면 프라이 팬을 개발한 계기였다.


-팔기만 해도 돈을 잘 버는데 굳이 제조업에 뛰어든 이유는 뭘까.


“당시 도깨비 방망이는 잔고장이 많았다. 고객 대부분이 고장 나면 할부 대금을 내지 않았다. 품질이 모든 것의 열쇠라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팔자’ ‘누구에게 내놓아도 자신 있는 물건을 팔자’ ‘그런 게 시장에 없다면 내가 직접 만들어 팔자’ 생각했다.”


-양면 프라이팬을 어떻게 착안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선 구이를 좋아한다. 하지만 아파트 주거가 정착하면서 생선 굽기가 어려워졌다. 생선을 구워도 냄새 나지 않고 눌어붙지 않는 팬이 있다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워주는 팬이라면 주방용품 시장 틈새를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사하느라 바쁜 날에는 종종 붕어빵으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 그날도 붕어빵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틀 안에 든 게 붕어 모양 빵이 아니라 생선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는 당장 아이디어 실현에 나섰다. 기름과 수분이 새는 걸 막으려면 완벽한 밀폐가 관건. 문제는 팬이 뜨거워지면 녹는 패킹이었다. 열과 기름, 수증기를 이겨낼 패킹 재료를 100개 넘게 실험했다. 2년 실패 끝에 양면 프라이팬을 완성했다.

조선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제품 판매 루트로 홈쇼핑을 선택했다.


“당시 홈쇼핑 성장 추세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산 주방용품은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었다. 홈쇼핑 담당자를 부지런히 찾아 다녔지만 방송을 잡기 어려웠다. 어렵게 방송을 타자 양면 팬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양면 팬을 거절하던 대형 홈쇼핑에서 먼저 스케줄을 잡아줬다. 새로 지은 공장을 밤낮으로 돌려도 물량을 맞출 수 없을 정도였다.”


해피콜은 매출이 매년 300%씩 성장했다. 많은 현금 보유액에 부산 시내 1000평 부지에 2층짜리 공장이, 김해에는 작은 사무실 딸린 4000평 땅이 있었다. 하지만 국세청 조사로 회사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는 물건 팔기에 바빴고 회계 처리나 인사 관리 등에는 문외한이었다. 개인 돈과 회삿돈을 구분하지 않고 투자해 외형을 키우는 데 집중하다 보니 장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퇴직한 관리자 한 사람이 회사 자료를 빼내 부패방지위원회에 고발했다. 국세청에 이어 검찰까지 3년에 걸쳐 조사받았다.


다행히 위기는 기회가 됐다. 그는 공장 하나만 남기고 모두 팔아 빚을 갚았다. 그러고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2008년 탄생한 다이아몬드 프라이팬은 바닥을 두껍게 만들어 음식이 잘 타지 않는 대신 옆면은 얇게 가공해 무게를 줄였다. 내부는 다이아몬드 나노 입자로 코팅해 열 전도율을 높이고 음식이 달라붙지 않게 했다. 다이아몬드 프라이팬은 일반 프라이팬보다 2배나 비쌌지만 주부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면서 대박이 났다. 2015년에는 3번째 히트 상품 ‘초고속 블렌더’를 내놨다. 해피콜은 미국·중국·인도네시아·태국·대만에 현지 법인을 두고 20국으로 수출하며 급성장했다.


◇빨리 살다가 빨리 죽을 뻔했다


해피콜이 성장할수록 이현삼 회장의 건강은 악화됐다.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 장애와 저체온증, 피부병, 이명(耳鳴)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한다는 건 성공과 추락의 피 말리는 롤러코스터를 견뎌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원래 병약한 체질인가.


“전방 수색대에서 군 복무를 할 정도로 체력이 좋았다. 그런데 영하 28도 날씨에 매복 근무를 하다가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렸다. 그때부터 감기 몸살이 오면 오래갔다.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증세가 악화됐다. 나 같은 사람에겐 비행기 에어컨이 최악인데, 인도네시아·베트남·필리핀·두바이 심지어 지구 반대편 브라질 등 해외 각국 홈쇼핑을 직접 하기 위해 일 년이면 300번 넘게 비행기를 타야 했다. 감기 몸살을 1~2년씩 달고 살기도 했다. 몸이 시리고 늘 오한이 있었다. 여름에도 목욕을 못 하고 내복을 입었다. 손이 시려 가죽 장갑을 껴야 했다. 순환이 안 되니 온몸이 허연 각질투성이였다. 위가 나빠 내과에 다녔고, 수면제 먹고 겨우 잤다.”


-어떻게 공작산을 알게 됐나.


“막냇동생의 장인이 강원도에 유명한 심마니가 있으니 같이 가보자고 했다.”


-산삼을 먹으니 효험이 있던가.


“삼을 먹고 황토방 절절 끓는 구들에서 자면 오한이 가시고 몸이 견딜 만해졌다. 신경 안정제, 수면제 안 먹어도 되고 위장도 나은 듯했다.”


-치유됐는데 왜 사업을 접었나.


“병세가 금세 재발했다. 내려가 쉬고 올라와 일하고 다시 쉬러 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처음엔 1주일 쉬면 회복할 수 있었는데, 다음엔 한 달은 쉬어야 했다. 3개월, 다시 6개월로 늘어났다. 나무를 젖히면 휘었다가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한계점을 넘어가면 부러져 되돌릴 수 없다. 내 상태가 더 이상 가면 부러질 것 같았다.”


-더 유리한 조건을 거절하고 덜 유리한 조건에 팔았다.


“최종 매각 과정에서 남은 회사는 2곳이었다. 프랑스 가전 회사 측은 2000억원과 연봉 100억 원을 줄 테니 최고경영자로 2년 일해달라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1800억원에 근무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스트브리지&골드만삭스에 최종 매각했다. 살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싶었기 때문에 연봉 200억원을 포기했다.”


이 회장은 2016년 해피콜을 매각했다. 그러곤 세상을 떠난 심마니 유족의 제안으로 공작산 땅을 사서 들어왔다. 그는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건강이 상당히 좋아졌고 삶을 회복하는 중”이라고 했다. “반년쯤 지나자 혀가 느끼는 맛이 많아졌다. 미각이 열리면서 건강을 회복하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아이스크림 맛을 알아버렸다는 거다. 외출하면 아이스크림 가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기들이 과자,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떼쓰는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웃음).”


그는 곧 형제들을 불러들였다. 제일 먼저 둘째 형 이현학씨가 왔고, 다섯째 이덕삼씨와 넷째 이태현씨가 뒤따랐다. 맏형 이현소씨는 아직 완전히 합류하지 못했다. 셋째 이현삼씨와 다섯째 이덕삼씨는 부부가 함께, 나머지 형제들은 혼자 들어와 있다. 자식들은 도시에서 공부하거나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부산에서 살며 공작산을 수시로 찾는 어머니 이달분(86)씨는 “딸이 하나 있으면 좋은데 안 되더라(낳아지더라)”며 웃었다.


형제는 모든 농사를 유기농으로 짓는다. 직접 키운 약재와 죽염만으로 100% 천연 비누도 만든다. 각질로 고생한 이현삼씨가 국내외 천연 수제 비누를 구하다 춘천에서 5대째 한의원을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서 만든 비누를 찾았다. 회사와 가문에서 전해 내려온 비법을 사들여 산이 여러 개 겹쳤다는 의미로 ‘사안(SAAN)’이란 브랜드로 비누를 만든다.


-오형제가 원래 친했나.


“어릴 때부터 가까웠다. 물론 두들겨 맞기도 하면서 조금 ‘격하게’ 우정을 쌓기도 했지만(웃음). 어릴 때는 어느 형제나 싸우면서 자라지 않나.”(넷째 이태현)


“아니지, 내가 일방적으로 맞았지(웃음).”(다섯째 이덕삼)


“평생 살면서 진짜 친한 친구 두세 명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많이 하잖나. 형제만 한 친구를 구할 수 없을 거다.”(셋째 이현삼)


-모여 사니 뭐가 제일 좋은가.


“형제들이 모여 사니까 겁나는 게 없고, 세상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둘째 이현학)


“다 같이 하니 모든 게 즐겁고 재미있다. 같이 운동하고 화투도 한번씩 치고(웃음).”(넷째 이태현)


-산골에 들어가서 그것도 형제들을 불러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아내가 반대하지는 않았나.


“형제들과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 살게 된 데는 아내의 공이 제일 컸다. 아내는 가끔 형제들이 놀러 오면 편안하게 대해줬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는 시간을 보낸 기억이 형제들이 이곳에 오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고 생각한다.”(이현삼)


-다섯째 이덕삼씨는 사회 나가면 적지 않은 나이(51세)인데 여기선 막내라 억울하겠다.


“조금 그렇기도 하지만, 귀여움을 많이 받으니 그 나름대로 괜찮다(웃음).”(이덕삼)


-농사는 지어봤나.


“우리 오형제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모두 돈벌이에 나섰다. 금형 공장, 철공소 등에서 일했다. 농사에는 문외한이다.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다.”


-자연 속에서 농사지으며 얻은 깨달음이 있을까.


“기쁨과 행복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나는 결과만 바라보며 남들보다 빠르게 살았고,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성공하고도 가난해질 뻔했다.”


[홍천=김성윤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오늘의 실시간
BEST
chosun
채널명
조선일보
소개글
대한민국 대표신문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