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삼성가 여인들은 왜 흰 상복을 입었을까
흰 치마저고리에 흰 두루마기 “검은 상복은 일제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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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열린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 영결식. 눈썰미 좋은 이들 사이에서 화제 된 디테일이 있다. 부인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입은 하얀 치마저고리와 두루마기로 구성된 흰 상복(喪服)이었다. 요즘 상복이 검정 일색인 것과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어떤 의미가 담긴 걸까.
일부에선 원불교식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원불교 관계자는 “원불교에는 장례는 가급적 간소하게 하자는 원칙만 있을 뿐 특별히 규정한 상복은 없다. 게다가 이 회장 장례는 원불교식이 아니라 가족장으로 치러 상복도 우리와 무관하다”고 했다.
홍 전 관장과 이부진 사장, 이서현 이사장 세 사람이 입은 상복은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57)씨가 만들었다. 김씨는 “서양 복식과 검정 기모노를 입는 일본 상복 영향으로 검정이 상복 색으로 굳어졌지만, 우리 전통 상복 색은 흰색임을 알리고 싶어 흰 무명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홍 전 관장은 2013년 친정어머니 김윤남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도 흰색 상복을 입는 등 전통 이해가 깊다. 이번에도 당연히 흰색을 입는다고 생각하셨다”며 “워낙 국민적 관심이 많은 장례식인 만큼 개인적으로 상복 문화가 개선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민속·전통 복식 전문가들은 이구동성 “이 회장이 병상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상복도 미리 준비했을 것”이라며 “우리 전통을 담으려고 한 흔적이 엿보인다”고 말했다. 상례(喪禮) 전문가인 정종수 전 국립고궁박물관장은 “근래 굳어진 검은 상복은 일제 잔재”라며 “평소 우리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삼성가인 만큼 이런 배경을 알고 흰 상복을 택한 것 같아 유심히 봤다”고 했다. 그는 “원래 조선 시대 상복은 삼베옷이 주를 이뤘는데 1934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만든 ‘의례 준칙’을 기점으로 상복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의례 준칙은 일제가 조선의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지나치게 번잡하다면서 만든 일종의 가정의례 간소화 규정집이다. 특히 장례 문화가 대폭 수정됐다. 전통 상복인 굴건제복(屈巾祭服·거친 삼베로 만든 건과 옷)을 생략하고, 왼쪽 가슴엔 검은 리본, 왼쪽 팔엔 완장을 차게 했다. 요즘 상가에서 보는 상장(喪章·상중임을 표시하려고 가슴 등에 다는 표)과 완장이 여기서 유래했다.
정 전 관장은 “30~40년 전 상조 회사가 일본에서 들어오면서 일본식 상복 문화가 더 퍼졌다”고 했다. 그는 “상주가 검정 양복을 입고, 완장을 차고 가슴에 리본을 다는 것은 일제 강요로 만들어진 일본식 문화다. 한술 더 떠 완장에 줄까지 넣어 줄 수에 따라 상주, 사위, 손자를 구별하기까지 한다. 일제 잔재도 모자라 국적 불명 문화를 덧댄 격”이라고 했다. 이번 이 회장 장례에서 상주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검은 양복을 입었지만 상장과 완장은 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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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복식 전문가인 최은수 국립민속박물관 학예 연구관도 “근래 사회 지도층 인사의 장례에서 유족이 흰색 한복을 입은 경우는 거의 못 봤다”며 “오래간만에 제대로 전통을 보여주는구나 싶어 반가웠다”고 했다. 그는 “과거엔 부모를 여읜 자식은 ‘죄인’이라는 의미로 삼베로 만든 상복을 입었다. 상주 겉옷인 최의(衰衣)는 거친 삼베로 만들고 시접 처리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조선 시대엔 누런 삼베나 무명 등으로 만들어 상복은 물들이지 않은 흰[素]색이라는 생각이 당연했다. 요즘도 안동의 전통 있는 가문에선 삼베 치마저고리 등 여전히 흰색 상복을 고수한다”고 덧붙였다.
최 연구관은 검은 상복이 확산한 것과 관련, “결정적으로 1969년 ‘가정의례준칙’과 1973년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규정에서 ‘상복으로 한복을 입을 경우 흰색 또는 검은색으로 할 수 있다’고 명시하면서 시작된 듯하다”고 했다. 그는 “상조 회사들에 전통을 바로잡자고 제안도 해봤지만, 유족들이 사흘 내내 흰색 상복 입기를 불편해해서 자연스럽게 검정으로 자리 잡혔다”고 했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이번 삼성가 상복은 작은 것처럼 볼 수도 있지만 최근 재벌가에서 아름지기, 예올 등 문화 재단을 통해 우리 문화 유산에 관심을 기울여 온 일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최 연구관도 “10~20년 전부터 삼성, 현대 등 재벌가에서 돌잔치, 칠순 같은 집안 잔치 때 가족 20~30명이 전통 한복을 제대로 갖춰 입자는 분위기가 생겼다”며 “가격은 비싼 명품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한복을 상황에 맞춰 입는 것만큼 품위와 품격을 갖추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흰색 상복의 귀환도 의미 있게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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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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