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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by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나는 26년째 ‘응원 중독자’ 아내에게 血書도 여러번 썼죠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축구 국가대표팀과 동고동락 ‘태극기 아저씨’ 박용식 응원단장


점심 장사를 마친 갈비 집에서 그가 화장을 시작했다. 먼저 빨간 물결 하나가 콧등을 가로질렀다. 축구로 말하자면 킥오프(kickoff)였다. 붓을 쥔 오른손이 물감과 얼굴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위쪽은 빨갛게, 아래쪽은 파랗게. 10분쯤 지났으려나. 태극 무늬가 얼굴에 소용돌이쳤다. 초로(初老)의 남자는 사라지고 ‘태극기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저는 못 알아봐도 이 사람은 유명해요. 원정 응원을 가서 TV 카메라에 잡히면 늘 이 모습이니까요."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박용식(57)씨가 말했다. 그는 축구 국가 대표팀이 해외에서 월드컵이나 올림픽 본선을 치를 때마다 중계 화면에 등장하는 응원단장이다. 얼굴에 붉으락푸르락 태극을 물들이고 태극기를 조끼처럼 입은 채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는 이 '태극기 아저씨'에게도 민얼굴과 생업이 있었다.


지난달 29일 대전 만년동. 한 갈비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지성, 손흥민, 구자철 선수와 함께 찍은 주인장 사진이 손님을 맞았다. 역대 월드컵 공인구도 진열돼 있었다. 1994년 월드컵부터 지난해 U-20 월드컵까지 원정 응원을 59회 다녀왔다는 박용식씨는 작지만(160㎝) 옹골차 보였다. 대전 성우보육원을 30년간 후원했고 독도 홍보단장도 맡고 있다. 자서전 '응원에는 은퇴가 없다'를 최근 펴낸 그는 "다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사명감을 느낀다"며 "내 인생을 포괄하는 단어는 '응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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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미친 남자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가수 김흥국이 만든 '아리랑'은 대한민국 응원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나중에 '붉은 악마'라는 큰 응원단이 생겼지만 '아리랑'은 지난 26년간 축구 국가 대표팀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했다. 박용식씨는 2002년부터 아리랑 응원단장이다.


―축구광인데 '뽈'도 좀 차나요.


"어려서 시골 논바닥, 진흙탕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어요. 슛을 하면 고무신이 공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가니까 끈으로 동여매고 뛰었죠(웃음). 조기 축구는 3년 전에 접었습니다. 25년 동안 하도 부닥쳐서 여기저기 안 부러진 곳이 없었어요."


―포지션은.


"왼쪽 풀백, 이영표 자리요. 제가 덩치는 작아도 빨라요. 악바리 기질도 있고."


―역대 월드컵 현장부터 지난해 손흥민이 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까지 직관하셨다니 재벌인 줄 알았습니다.


"인터넷에는 '저 사람 도대체 직업이 뭐냐' '팔자 ×부럽다' 같은 글이 많아요. 보시다시피 자영업자예요. 1000만원까지 치솟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표 값을 후배가 절반 지원해준 것을 빼면 전부 자비로 다녀왔습니다. 59회 원정 응원 비용을 다 합치면 4억원이에요. 한 번 다녀오면 수백만원이 깨져요."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인가 봅니다.


"요즘 무지 힘들어요. 17년 된 고깃집을 지난 2월 말에 접었습니다. 그 전부터 경기가 안 좋았는데 코로나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어요. 출혈이 커 처분했고 이 가게에선 공동 사장이에요. 그 4억원은 주방에서 습기 먹으며 수고한 내 노동력이자 아내의 눈물입니다."


―어렵게 번 돈인데 아깝지 않은가요.


"도박도 아니고 마약도 아닌데 응원에 미치면 멈출 수가 없어요. 대회가 임박하면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그날이 기다려지고 현장을 보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응원 중독' 증상이에요."


―그 첫 경험이 궁금합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직전에 원정 응원단 모집 광고가 신문에 실렸어요. 당시 응원단장이 '호랑나비'로 뜬 가수 김흥국씨였고요.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하며 집사람이 보내준 게 시작이었습니다."


―본선 첫 상대가 무적 함대 스페인이었는데.


"외국 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죠. '동해 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연주를 듣는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그 전까지는 저도 '먹고살기 바쁜데 애국자는 무슨 말라비틀어진 애국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교민과 유학생, 저희 일행까지 5000명이 한마음으로 응원하는데 눈물이 핑 돌고 뜨거운 나라 사랑을 느낀 거예요. 그 전율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요?


"돌아오자마자 김흥국씨가 응원부장을 맡겼어요. '완장'을 차면 사람이 미친다고 하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호기심으로 시작했는데 1997~1998년쯤부터 태극기 조끼를 입고 태극 무늬까지 얼굴에 그려 넣었습니다. 한국을 세계에 알리며 기 싸움에도 지지 않는 방법이었어요. 그때 사명감이 생겼습니다. 대회가 다가오면 병이 도져요. 눈이 뒤집히는데 어떡합니까. 제가 방송에 출연해서도 말했습니다. '내 인생은 김흥국씨 때문에 망했다'고. (김흥국은 뭐라고 응수했는지 묻자) 이해해라 용식아, 하하하."


―제 배우자였다면 열 번은 더 이혼하자고 했을 겁니다.


"열 번이 뭐예요. 저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안 가겠다' 혈서도 여러 번 썼어요. 집사람은 축구라면 이를 갑니다. 이 세상에서 축구가 없어졌으면 좋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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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 박용식, 구두쇠 박용식


축구를 혼자만 즐기진 않았다. 2010년 남아공, 2014년 브라질,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땐 보육원 모범생을 현장에 데려갔다. 대전 성우보육원 김익자 원장은 "지난 30년간 장사가 잘될 때나 안될 때나 매달 한 번씩 아이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까지 선물해준 후원자"라고 했다.


―선행을 결심한 계기는.


"어릴 때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면서 고생을 '작살나게' 했어요. 영세민으로 동사무소에서 배급받던 기억이 납니다.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저는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어요. 나이트클럽 종업원도 해봤지요. 그때 막연하게 '나중에 돈 벌면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학생들을 도와야지' 마음먹었습니다. 스물일곱에 결혼했는데 어느 고아원에 갔다가 생각이 바뀌었어요. '부자는 언제 될지 모르니 지금 밥 세끼 해결할 수 있을 때 돕자.' 집사람도 흔쾌히 동의했고요."


―후원한 학생 중에 판사도 나왔더군요.


"대전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했는데 가정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뉴스를 들었어요.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첫 등록금부터 생활비까지 4년간 대줬는데 졸업하기도 전에 사법고시 2차까지 붙었습니다. 지금 서울에서 부장 판사로 있어요. 저를 형님이라 불러요."


―봉사하는 기쁨이란 무엇인가요.


"그 동생이 사시에 패스한 것만으로도 저는 보상을 다 받은 거예요. 보람을 느끼게 해줬잖아요. 베풀면 받는 사람도 행복하지만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해요.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픈 사람 심정을 몰라요. 제가 부잣집 아들이었다면 그런 생각 못 했을 거예요. 돈 좀 있다고 외제차 굴리고 폼 잡는 건 행복이 아니에요. 부럽기는커녕 불쌍한 놈으로 보여요."


―보육원 아이들에게 월드컵 직관을 선물할 생각은 어떻게 했나요.


"축구 응원하는 제 모습이 TV에 나오면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한대요. 2007년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내한 경기를 할 때 20명을 데려가 보여줬지요. 호날두, 루니, 박지성, 에브라를 눈앞에서 본 거예요. 어느 기자가 짓궂게 '월드컵 본선 무대도 보여주실 용의가 있느냐' 묻길래 '노력은 해보겠다'고 했어요."


―정작 단장님은 남아공 월드컵에 가지 못했더군요.


"아이 두 명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그해에 장사가 영 안된 겁니다. 그렇다고 둘 중 하나를 떨어뜨릴 순 없잖아요. 제가 포기하고 아이들만 보냈더니 '아름다운 선택'이라고 언론에서 난리가 났어요. 원정 응원 기록은 깨졌지만 후회 안 합니다."


―보육원 아이들에게 종종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인생에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아저씨 공부 못했어. 근데 착한 일 할 줄 알았고 축구 응원으로 나라 사랑도 실천했다. 너희도 공부할 땐 열심히 해. 그렇지만 공부 못한다고 인생 포기할 필요 없어. 네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잘할 수 있고 그게 행복인 거야."


―베트남 축구 대표팀은 왜 해외까지 가서 응원했나요.


"다들 저한테 '미쳤다'고 비아냥거렸지만 박항서 감독을 응원하고 싶었어요. 그 빡빡이 아저씨가 베트남 대표팀을 이끌면서 대한민국을 드높였다고 저는 생각해요. 외교관 100명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겁니다."


―책에 '원정 응원비를 마련하려면 구두쇠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썼는데.


"평소에는 매우 짠돌이예요. 저 자신을 위해선 돈을 안 써요."


―가게는 나 몰라라 하고 응원 유람만 다닌 건 아니군요.


"제가 바봅니까? 가게 없으면 응원도 못 가고 봉사도 못 하고 가정이 망하는데. 원정 응원도 고기 숙성시키고 준비 다 해놓고 갑니다. 단골들에게 '저 응원 갑니다. 보름 동안 없어요. 우리 집사람 생각해서 알아서 하세요'라고 연락도 돌려요. 그럼 '다음 주에 열다섯 명 예약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열심히 해' 같은 답장이 와요. 국가 대표팀을 응원하는 저를 단골들이 또 응원해주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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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부도나면 국민도 부도나"


박용식씨는 2014년부터 독도 살리기 국민운동본부에서 독도홍보단장으로 사회운동을 해왔다.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하거나 교과서 왜곡 같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한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사태를 어떻게 보시나요.


"검찰이 밝히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습니까. 배신감을 느꼈어요. 제가 소속된 민간 단체들은 자금이 없어 늘 허덕여요. 그때마다 저도 기부를 합니다. 정의연은 후원금이 몇 십억씩 들어온다는데 왜 그렇게 의혹투성이인가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워요."


―돈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죠. 어떻게 쓰느냐가 돈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옳은 일에 써야 해요. 2년마다 번갈아 오는 월드컵과 올림픽이 저한테는 부담이자 선물이에요. 응원 비용이 많이 들어 부담이고, 삶에 활력을 주기 때문에 선물입니다. 많이 번 적도 있지만 돈이 늘 내 곁에 머물진 않더라고요. 지금은 먹고사는 정도로 만족합니다."


―'12번째 태극 전사'라고도 하는데, 축구계 인맥으로 이익을 추구한 적은 없습니까.


"누구는 히딩크 감독과 찍은 사진을 식당 앞에 크게 걸라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돈 벌고 싶진 않아요. 별명이 '태극기 아저씨'라서 가끔 오해도 받습니다. 저는 '태극기 부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웃음). 정치적으론 무조건 여당 편이고요."


―무조건 여당 편이라뇨?


"정권 잡은 쪽이 나라를 잘 이끌어 성공한 정부로 남기를 바라는 겁니다. 하지만 최근엔 조국, 윤미향, 김두관, 추미애 때문에 실망했어요. 저는 철저히 국익 편입니다. 민주노총처럼 국익을 해치는 운동은 안 해요. 사드 배치를 문제 삼아 중국이 우리 기업을 부당하게 괴롭혔는데 왜 가만히 있나요? 저는 광화문에서 1인 시위를 했어요. 소신 가지고 바른말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조선시대에도 목숨 내놓고 '전하, 아니되옵니다!' 했는데 지금은 왜 못 합니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부부 동반으로 가셨더군요.


"집사람에게 응원의 맛을 전수하며 포섭하려 했는데 실패했어요. '나라가 부도나면 국민도 부도난다'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버스 투어로 유럽 몇 나라를 도는 일정 중에 원정 응원이 들어 있었는데, 한국이 IMF 외환 위기를 맞으니 국경 통과도 오래 걸리고 숙박비도 선불해야 했어요. 서럽더라고요. 대리점 부도나면 누가 물건 대줍니까? 똑같아요. 내 조국이 잘돼야 국민도 대우받는 거예요. 게다가 프랑스 월드컵에선 네덜란드에 5대0으로 깨져서 더 슬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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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만년동 예산한우갈비에는 황금 축구화가 전시돼 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한 기업이 히딩크 감독과 박용식 국가대표팀 응원단장에게 선물한 것이다.

―반대로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딴 날이죠. 월드컵 4강 진출보다 더 통쾌했지요."


―2002년 월드컵 때 사모님은 절망했다면서요.


"사실 우리가 16강에 들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아구찜 가게를 할 때인데 호기롭게 '16강 진출하면 음식 공짜' 이벤트를 걸었습니다. '설마 되겠어' 하는 생각으로 8강, 4강도요. 한국이 이길 때마다 집사람은 속이 새까맣게 탔어요. 홍명보가 승부차기 실축하길 바란 유일한 한국인일 겁니다. 그 출혈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 가게는 2003년에 망했어요."


―요즘 자영업은 얼마나 어려운가요.


"저는 저녁 손님이 강점이고 원래 이곳 사장님은 갈비탕과 냉면으로 점심 장사를 잘했어요. 힘드니까 메뉴를 합치고 동업한 거예요. 메르스가 대포라면 코로나는 핵폭탄이에요. 매출이 60% 줄었어요. 종업원 줄이고 허리띠를 졸라매도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알 수도 없고…."


―코로나 때문에 국가 대표 경기도 없고 응원도 못 가는데 어떡하나요.


"저는 단순히 축구에만 미친 사람은 아니에요. 또 다른 봉사 단체 '레드엔젤' 회원들과 얼마 전 대구, 진천, 아산에 마스크와 홍삼 음료 등을 전달했어요. 최전방에서 코로나와 싸우는 의료진을 응원하는 것도 제 임무예요. (계획을 묻자) 응원을 계속해 나가야죠. 제 꿈은 축구 이야기로 나라 사랑을 전하는 강연가입니다."


저녁 장사 시간은 다가오는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다는 표정으로 박용식씨가 냉수를 한 컵 들이켰다. 자영업자를 향한 응원을 부탁하자 "축구는 후반 막판까지 지고 있다가도 역전승을 하곤 한다"며 "희망을 잃지 않고 용기를 내면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했다.


축구공은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사진 촬영을 위해 페이스 페인팅을 시작하며 ‘태극기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제가 소심한 A형이에요. 응원하기 전엔 많이 떨어요. 이렇게 태극 무늬를 그려 넣는 게 카운트다운이에요. 이 얼굴이 대한민국이잖아요. 속으로 기도합니다. 이겨라 대한민국! 힘내라 우리 국민!”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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