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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by 조선일보

“아득한 발파 소음이 ‘희망의 소리’였어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맙시다”

[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경북 봉화 광산 사고 1년

‘221시간의 기적’ 광부 박정하


우르릉 쾅쾅!


땅속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지난해 10월 26일 경북 봉화의 한 아연 광산. 수직 갱도가 붕괴돼 광부 두 명이 지하 190m에 갇혔다. 63빌딩쯤 되는 깊이다. 사흘 뒤 서울 이태원에서 핼러윈 압사 사고가 일어났고 11월 5일까지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됐다. 온 나라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던 그때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두 광부가 매몰 221시간 만에 구조된 것이다.


“안동병원에서 퇴원하고 봉화소방서부터 찾아가 감사 인사를 했어요. 구조 작업에 참여하느라 고생한 광부들과 밥 한 그릇이라도 하고 싶어 (강원 삼척) 경동 탄광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어요. 저를 안거나 손을 잡으며 하는 말이 한결같았습니다.”


광부 박정하(63)씨는 1년 전으로 돌아간 표정이었다. 그에게 쏟아진 말은 “살아와 고맙다”였다. 봉화 탄광 사고와 서울 핼러윈 참사는 다른 날 다른 곳에서 벌어졌지만 심리적으로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광부들이 극적으로 생환했다는 뉴스는 비통하고 캄캄한 그 시기에 작은 불씨처럼, 희망의 등불처럼 다가왔다.


광부는 날마다 지하 수백m로 출근한다. 땅 밑이 일터다. 지난 2일 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만난 박정하씨는 “나를 구해놓고도 ‘살아와 고맙다’고 한 광부들에게 보답하는 일을 하고 싶다”며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자.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나아가자”고 말했다.


◇그날도 땅속으로 출근했다


2004년 동원탄좌가 문을 닫기 전까지 근로자 복지 회관으로 쓰이다 강원랜드가 매입한 뒤 복합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뿌리관’에서 이 광부를 만났다. 탄광촌 풍경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북역이 코앞이라 무궁화호 열차 소리가 덜컹덜컹 들려왔다.


-그동안 건강하게 지내셨나요.


“새벽 4시면 눈이 떠져요. 깨어 있어도 몽롱합니다. 돌덩이를 이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무겁고 환청도 들려요. 사람들 발자국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인터폰 벨소리…. 트라우마가 심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어요.”


-일은 아직 못 하시겠군요.


“광부로 27년 살았는데 갱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는 힘들 것 같아요. 어두운 곳에만 가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못 견딥니다. 잘 때도 불을 켜놔요.”


-퇴원 직후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즐겁게 살겠다’고 했는데.


“1년이 흘러도 회복이 안 됐어요. 제가 낙관적이고 명랑한 편인데, 답답하고 때론 화가 나요. 후유증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라면.


“올해 초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광산 종합 안전 대책을 발표했는데 ‘전국 광산마다 생존 박스(생존 키트)와 무선통신 시설을 설치해 달라’는 제 요청이 반영됐어요. 예산이 증액돼 실제로 설치 중이니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광부들의 권익과 근무 여건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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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하씨는 1982년부터 광부로 살았다. 고향은 전북 정읍. 그는 “연애하면서 정선 처가에 인사하러 왔다가 탄광촌을 처음 접했다”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었는데 광부 임금이 더 높고 복지 혜택도 좋아 그 직업을 택했다”고 했다.


-광부 봉급이 그렇게 많았나요.


“말단 공무원은 14만6000원을 받던 시절에 광부는 입사하자마자 31만원이었어요. 동원탄좌가 50명을 모집하면 청년 500~600명이 몰려왔습니다. 광부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직업인데.


“막장에서 광부로 일한 건 15년쯤 되고 한동안은 ‘광산 특수보호대’에서 활동했어요. 평소에는 훈련을 하고 사고가 터지면 현장에 출동하는 구조대였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사고를 당해 보니 역시 배운 게 쓸모가 있더라고요.”


-사고 당일을 좀 복기해 주십시오.


“그날은 오후 출근조였어요. 오후 4시에 입갱을 했는데 5시 38분부터 우르릉 쾅쾅 굉음이 울리며 수직 갱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갱내에 돌덩이가 떨어지면 낙반, 그냥 막 쏟아져 내리면 붕락이라고 해요. 붕락이 일어난 겁니다.”


-어떻게 피했나요.


“일단 7m 후방으로 물러나 암석과 토사가 다 쏟아지고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어요. 두 시간쯤 걸렸습니다. 밧줄 쪼가리들을 이어서 붙잡고 수직 갱도 위로 올라가 보니 H빔과 나무, 파이프 등이 뒤엉켜서 정체돼 있었어요. 출구가 막혔으니 고립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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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믹스와 ‘333 법칙’


작업조는 일곱 명이었다. 두 명은 지하 40m 지점에, 세 명은 ‘케이지(갱도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쪽에, 작업반장 박정하씨와 나흘밖에 안 된 신참 광부는 지하 190m 갱도에 있었다. 맨 위에 두 명은 자력으로 빠져나갔고 중간에 세 명은 사고 5시간 만에 구조됐다.


-갱내는 춥지요?


“평균 14도예요. 옷까지 젖으면 저체온증에 걸립니다. 엉엉 우는 신참을 달래서 비닐을 모아 움막부터 만들었어요. 버팀목으로 쓰려고 들여온 나무는 도끼로 30㎝ 길이로 잘랐지요. 땔감 삼아 불을 피웠습니다. 물을 끓여 커피 믹스를 타 마셨어요.”


-커피 믹스가 훌륭한 비상식량이더군요.


“갱내에서 발파를 하면 자욱해져요. 연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곤 합니다. 들어갈 때 물 약 10ℓ와 커피 믹스 30개를 가져갔어요. 333 법칙이라고 들어봤나요?”


-333 박수는 압니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공기가 없으면 3분, 물이 없으면 3일, 음식이 없으면 3주까지 생존할 수 있다는 게 333 법칙이에요. 다행히 금속 광산이라 갱도가 거미줄처럼 위아래로 얽혀 있어 공기 흐름이 좋았습니다. 암반에서 물이 계속 떨어졌고요. 또 커피 믹스가 있었습니다(웃음).”


-동원탄좌 시절에 배운 생존 전략인가요.


“(고개를 끄덕이며) 불을 피우면 연기와 냄새가 위로 올라갑니다. 밖에서 보면 그게 ‘생존 신호’예요. 그런데 구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커피 믹스도, 물도 사나흘 만에 바닥난 거예요. 첫날에 커피 믹스를 1인당 두 개씩 타 먹는 게 아니었는데. 하하.”


-암반 틈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셨다면서요.


“냄새가 엄청 역겨웠어요. 신참은 거의 다 토했지만 저는 꾹 참고 마셨습니다. 버티면 반드시 우리를 구하러 올 거라고 믿었어요.”


-광부들의 의리와 동료애, 굉장하지요?


“작업장을 막장이라고 부르잖아요. 진짜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 사람 냄새가 진동해요. 나이가 많든 적든 금방 정이 쌓이죠. 우리는 동료가 갇히면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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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그는 고립 이틀째부터 자력으로 나갈 궁리를 했다. 수직 갱도 위는 막혔으니 아래로 가야 했다. 덤프트럭도 다닐 만큼 넓은 갱도(램프웨이)가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20m를 내려가니 수평 갱도가 펼쳐져 있었다.”


-거기서 어떻게 했나요.


“제일 먼저 구조해 들어올 곳은 램프웨이라고 생각했어요. 신참과 괭이 두 자루를 들고 가 보니 그쪽도 붕락이 있었습니다. 이틀에 걸쳐 한 10m쯤 팠어요. 작업은 하루 서너 시간밖에 못 해요. 먹은 게 없어 힘이 부족하고 배터리도 아껴야 하니까.”


-헤드랜턴 말이군요.


“헤드랜턴을 한 번 누르면 빛이 밝게 나와요. 한 번 더 누르면 약하게 나오는데 광부들은 ‘스몰등’이라고 부릅니다. 신참과 제가 스몰등을 번갈아 켜고 사흘 만에 관통시켰어요. 다른 갱도가 나타나고 바람이 불어와 ‘이제 살았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고함을 질러도 반응이 없었어요. 이번엔 폭약을 쓰기로 했습니다.”


-갱내에 폭약이 있었네요.


“28㎜ 메가마이트 25개가 있었습니다. 수직 갱도 위에 막힌 곳을 터뜨리면 또 얼마나 쏟아져 내릴지 가늠이 안 됐어요. 우선 15개만 장전하고 ‘사람 살려!’ 소리를 지르다가 발파했습니다. 그런데 슬러지였어요.”


-슬러지가 뭡니까.


“광물 찌꺼기를 야적해 놓았다가 처리 비용이 많이 드니까 사용하지 않는 갱도 안에 넣어뒀는데 말라붙으면 딱딱해요. 그게 물을 만나 끈적한 죽처럼 변한 게 슬러지예요. 물을 머금고 있으니 나머지 폭약까지 다 터뜨려도 폭! 하고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고립된 지 닷새가 흘렀는데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겁니다.”


-초조해졌겠군요.


“탈출구를 찾으려는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갔으니까요. 커피 믹스와 식수도 떨어졌지, 쪼그리고 새우잠만 자다 보니 기력이 없었어요. 구조 작업은 하는지 안 하는지 너무 조용한 겁니다.”


-발파 소음도 들리지 않았나요?


“그게 우리에겐 ‘희망의 소리’였습니다. 5~6일째 되던 날에는 멀리서나마 발파 소음이 났어요. 그럴 때면 배고픔도 잊었습니다. 가까워지고 있구나,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하면서 기분이 희망적으로 바뀌었지요.”


그런데 7일째부터 적막했다. 희망은 절망으로 곤두박질했다. “형님, 회사가 우리를 포기한 거 아닐까요?”라고 신참이 물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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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 마침내 밖으로


농담으로라도 공포를 떨쳐 버려야 했다. 사고로 전기가 끊긴 인터폰이 갱내에 있었다. 신참이 서럽게 흐느끼자 박정하씨는 그 인터폰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1번을 꾹 눌렀다고 한다.


-먹통이 된 인터폰으로 무엇을 했나요.


“오리 백숙을 주문했어요(웃음). ‘여보세요? 오리 백숙 하나 좀 끓여놔봐. 냉장고에 전복 있으면 서너 개 넣고 푹 삶아. 언제쯤 나오냐고요? 몰라 그건’ 했는데 신참이 듣고 있더니 ‘형님, 전화가 돼요?’ 하더군요. 하하.”


-그게 마지막 날이었지요?


“네. 그날 아침에 신참이 ‘형님, 우리 발파한 곳까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올라가 보자’고 했어요. 그래서 헤드랜턴을 켰는데 깜빡거리는 겁니다. 배터리가 거의 다 방전됐다는 신호예요. 그때 저도 심리적으로 와르르 무너졌어요. 곧 암흑 천지로 바뀔 테니까요.”


-수직 갱도 위로 올라가서 무엇을 했나요.


“마지막 힘을 짜내 파이프를 두드렸습니다. ‘사람 살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역시 반응이 없었고 헤드랜턴은 완전히 꺼졌어요. 내려와서 몇 개 남지 않은 장작을 불에 올려놓고 젖은 옷을 말리고 있었습니다. 제 입에서 ‘희망이 없어 보인다. 대비하자’ 소리가 처음으로 나왔어요.”


-무엇을 대비합니까.


“죽음을. 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이렇게 죽는구나’ 싶어 저도 울었어요. 몸이 소스라칠 정도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믿지도 않는 하느님, 부처님을 찾기 시작했지요.”


-뭐라고 기도했나요?


“혼잣말로 ‘하느님, 부처님이 계시다면 1분만 외출하게 해주십시오’ 그랬어요. 한 20분쯤 지났을까. ‘발파!’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크게 들릴 수가 없었는데 신참은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거예요. ‘일단 후퇴하자’며 안전모를 쓰고 10m쯤 물러나는데 쾅! 하면서 불빛이 보였습니다.”


-마침내 구조대가 도착했군요.


“그 순간이 생생해요. ‘이제 살았구나’ 생각했습니다. ‘형님!’ 하면서 막 달려 들어온 광부 청년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지요. 그놈이 탈북자인데, 나를 업고 나갔어요. 구조 작업에 참여한 광부들이 갱도에 서서 어떤 사람은 울고 어떤 사람은 ‘진짜 고생 많았다’ 박수 치고. 그때가 밤 11시 3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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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고맙다’는 말


두 광부는 안대를 쓴 채 안동병원으로 이송됐다. 1인실을 제안받았는데 2인실을 쓰겠다고 했다. 박씨는 “겁이 많은 그 신참이라도 있었기에 221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내게는 고마운 존재”라며 “혼자 고립됐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고 했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1분간 외출을 허락한다면 무엇을 할 생각이었습니까.


“마누라 손 잡고 ‘너무 고생시켜 미안하다’ 그 한마디는 꼭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속을 많이 썩였거든요. 가장 노릇도 못 하면서 오지랖은 타고나서, 동원탄좌 문 닫은 뒤 실직 광부들 고용 창출 한다고 쏘다녔어요. 지금은 청소 등등 집에서 놀랄 정도로 제가 잘합니다(웃음).”


-기자들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을 묻자 ‘바다 여행’이라고 답했는데.


“9일 하고도 다섯 시간 동안 갱도에 갇혀 있다 보니 탁 트인 곳을 상상했어요. 가족과 함께 바다 여행을 가본 적도 없고요. 그랬더니 울진군청에서 초청해 주셨습니다.”


-핼러윈 참사가 일어난 직후라 구조 소식이 더 반가웠어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병원에서 들었어요. 생명처럼 고귀한 게 없는데, 갑자기 가족을 잃은 분들은 얼마나 애통하겠습니까. 안타까운 일을 당한 유가족께 위로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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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안전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시기입니다.


“안전은 ‘오늘도 무사히’ 같은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요. 전시 행정에 치우치지 말고 철저한 안전 교육이 필요합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요. 광부도 작업 지시를 받았는데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일해왔어요. 작업량을 채우려고 안전을 소홀히 하는 건 무모한 짓입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분이라 뵙고 싶었습니다.


“기적이라고들 하는데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에 생환할 수 있었어요. ‘반드시 구하러 온다’는 믿음으로 버텼습니다.”


-지금 어딘가에서 절망에 빠진 분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만큼 절박했을까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어 봤는지 묻고 싶어요. 가족을 생각하며 221시간을 보내 봤는지 묻고 싶어요. 힘들어도 포기하지는 맙시다.”


-’살아서 고맙다’는 말을 되새기게 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핼러윈 참사 직후라 광부들이 그런 말을 한 거예요. 구조된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좋은 사회구나, 좋은 사람이 더 많아서 지탱이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는 지상에서 광부 동료들에게 빚을 갚는 일을 하며 살겠습니다. 막장 생활이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데 힘쓸 거예요.”


극적인 생환은 많은 이들에게 선물과 같았다. 두 광부 구조 소식을 다룬 기사를 다시 읽었다.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는 댓글은 “끝까지 버텨내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였다. 희망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시대에, 절망을 이겨내고 희망을 증명한 두 광부에게 바치는 헌사 같았다. 동시에 그것은 저마다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정선=박돈규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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